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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규리 Oct 26. 2024

은퇴 후의 삶3

전서 쓰기- 옛사람의 생각 탐구

나는 글씨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때이다.

저녁을 먹고 엎드려 네모 칸 공책에 글씨 쓰기 숙제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내 손을 잡고 연필 쥐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글씨를 쓰는 획순도 알려주셨다. 손을 잡아 이끌어 주신 그 감각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만큼 내게는 센 기억이었나 보다.  아버님은 당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셨다. 할아버지의 반대로 진학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려 늘 펜을 들고 글씨도 써보시고 배움에 대한 열망을 자녀교육으로 대체하셨다.  그 와중에 펜글씨도 아버님이 가르쳐주시는 바람에 나는 수월찮게 써나갔다. 한자를 즐겨 쓰신 아버님 덕에 한자에도 관심이 많았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다 아버님 덕분이다.

이렇게 시작된 글씨 쓰기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판서 쓰기로도 이어졌다. 또 중국어 공부를 하며 경서를 베껴 쓰는 일에도 연결되었다. 아버님께 배운 글씨 쓰기 덕분에 나는 글씨를 쓰는데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긴 사설을 늘어놓는 이유는 요즘 서예의 전서 쓰기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체본을 따라 쓰다가 문득 아버님 생각이 났다. 선생님의 마음이 아버님의 마음과 닮아있다. 자형을 알고 획순에 맞게 써야 한다고 알려주신 아버님처럼 선생님도 획순과 중봉을 지켜 쓰는 법을 요령 있게 알려주신다.

잠깐 고민했다. '한글 판본체 서예로 바로 들어가느냐, 아니면 전서부터 써나가느냐.'이다. 족히 1년은 걸린다고 하셨다. 결국 글씨의 뿌리인 전서를 쓰기로 했다.

이것은 첫 시간에 만난 글자들이다. 장인공은 오늘날과 비슷하다. 글자의 순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는 것이다.  한 가지 동, 아들 자, 써 이, 갈 지, 활 궁, 뿔 각, 구할 구이다.  위의 체본을 따라 아래에 셨다. 쉽지가 않다.

두 번째 시간에 만난 글자들이다. 큰 대, 또 우, 올 래, 비단 백, 근본 저, 고기급 국, 구멍 공, 뭇 서이다. 오늘날의 글자와 같거나 유사한 글자는 큰 대, 올 래, 뭇 서 등이다. 위의 체본을 따라 한지 수십 장을 적시고 나서 겨우 얻은 글자인데 아직도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

이번에는 가죽 피, 임금 군, 그 기, 깃발 유, 옳을 가, 미칠 급, 새 추, 물고기 어 이다.  요즘글자와 비슷한 것은 임금 군, 옳을 가, 새 추 정도이다. 역시 위가 체본이고 아래는 따라쎴다. 수십 장을 연습한 후의 내 글씨이다. 써놓고 보니 익숙하지 않은 것이 더 정겨워 보인다. 어린아이들이 귀엽듯이 내 초보글씨가 싫지는 않다. 이것을 쓰고 있는 나도 기특하게 느껴진다. 또 물고기어나 새 추는 재미 있는 그림 같다. 이런 글자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옛 사람들의 생각을 접하게 한다. 선인들의 생각을 접하다 보니 나도 절로 생각에  꼬리를 물게 된다. 그렇다 이것은 단순히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들의 생각을 더듬어가고 있는 중이다.


  옛 글자를 통해 글자의 뿌리를 탐구하는 동시에 그것으로 붓의 길을 탐구하는 것이 흥미롭고 즐겁다. 비슷한 글자도 있지만 요즘에 와서 많이 달라진 글자를 통해 옛 사람의 생각의 뿌리를 더듬어 본다. 글자에는 옛사람의 생각이 담겨있고 또 철학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토인비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던가. 옛사람의  생각을 탐구해 미래의 본을 삼고자 한다. 옛 사람의 생각과 오늘날을 잇는다면 더 멋진 미래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현대 문명의 공허함을 채워서~~


선생님의 수려하고 단아하고 힘 있는 글씨가 옷깃을 여미게 한다.


나도 선생님처럼 글씨를 잘 쓰고 싶다. 수려하고 단아하고 힘 있는 나만의 글씨를 써서 은퇴 후의  삶에 의미와 활기를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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