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사랑, 꽃부리 영 맑을 숙, 영숙.
사람에 대한 겁이 많고 소심한 나는 유독 엄마 앞에서만 강해진다. 겨울밤 붕어빵을 나눠 먹으며 길을 걷던 중이었다. 한 취객이 우릴 향해 달려들었고, 지체 없이 소리치던 나였다. “아저씨 누구신데요. 귀한 집 자식 건들지 말고 가던 길 가시라고요!!” 와중에 존칭은 빼먹을 수 없었나 보다. 평소라면 주위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도망쳤을 텐데. 겁에 질리면 미칠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오죽했으면 옆에 있던 엄마가 나의 팔을 붙잡으며 말릴 정도였다. 그 정도로 이성적인 판단이 서지 않았다. 길을 묻는 척하며 엄마의 팔을 쓸어내리던 취객의 두 손이 화근이었다.
그녀를 위해선 강해질 수 있었고 강해져야만 했다. 오빠가 군대를 간 시점부터 그 생각은 더 견고해졌다. 부모님의 안부는 이제부터 내가 챙겨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에게나 잘해주지 말고 쉽게 정 주지 말라고, 매일 아침 집을 나서는 엄마의 손을 잡고 당부한다. 어릴 적 유치원으로 향하는 작은 손을 쓰다듬으며 친구랑 사이좋게 놀고 오라던 목소리처럼. 난 그녀를 약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끌어내리고 싶었다. 상대방에게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게 아니라 그보다 더, 배로 내어주고 내어주는 우리 가족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다짐하는 말을 엄마에게도 자주 건넸다.
“우리 딸 있었으면 바로 해결했을 텐데.” 키오스크로 주문하는 가게에서 메뉴를 시키지 못해 서성이다 돌아온 날, 새로 산 디지털시계의 알람을 끄지 못해 회의장을 빠져나와 긴 시간을 홀로 버텼던 날. 그녀가 나를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진 나날들이 늘어가고 있다. 빠른 속도로 문화를 맞이하는 우리와 달리 수많은 날을 애먹으며 살아가는 그들을 등지고 지나가는 세상이 미워졌다. 여전히 나는 겁이 많은 어린아이인데 그녀 앞에만 서면 작은 몸을 복어처럼 부풀리게 된다. 두 손을 불끈 쥔 채로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하게 된다. 그런 내가 엄마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 날이 있었다.
3년 만에 찾아온 공황을 가족에게 어떻게 알려야 하나 고민하던 때,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에게 말없이 약 봉투를 보여줬다. 다시 마주하는 딸의 아픔을 그녀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어깨를 들썩이며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우는 아이를 작은 품으로 온전히 받아내던 그녀, 별 일 아니라는 위로의 말과 함께 연신 등을 만져주던 손. 밥을 먹다가 갑자기 왈칵 눈물을 보이며 온몸을 떨어도 그녀는 태연하게 나를 마주했다. 나보다 눈물이 많은 그녀는 단 한 번도 울음을 보이지 않았다. 물기가 가득한 나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그 시간을 함께 해줄 뿐이었다.
나를 재워주던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던 것을 모른 체했다. 내가 강한 척했던 것처럼 그녀의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파헤치고 싶지 않았다. 그 손에 머무르는 동안 온전히 울다 지쳐 잠들고 싶었다. 긴장한 탓에 젖은 손으로 등을 쓰다듬는 그녀를 영영 모르고 싶어졌다. 우린 서로를 위해 용감해진 사람들인 것을 숨기고 싶어졌다. 그렇게 우린 각자의 거대한 세상 앞에 용감해진 사람들로 살기로 했다. 서로를 용감하게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