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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Dec 19. 2023

프리랜서의 불안함과 감사함

난 프리랜서 영상 번역가다.


10년 가까이 이 일을 하는데도 어디서도 내 일에 관해 자세히 이야기해 본 적은 없는 듯하다. 아마도 유명 작가처럼 되지 못했다는 열등감과 회사원보다도 적은 급여로 인한 부족한 직업 정체성, 언제 직업을 바꿀지 모른다는 프리랜서 특유의 불안감 등 때문일 것이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가 유명 작가까지는 아니어도 어디 가서 실력이 부족하다는 평은 듣지 않을 줄 알았으나, 어느 업체에선 꼼꼼하고 훌륭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어느 업체에선 테스트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니 실력에 대한 자신감(혹은 안일함이나 오만함)이 쌓일 시간이 없다. 심지어 모든 작가들이 그러하듯 내 글이 100퍼센트 마음에 들 때 납품하는 것이 아니라 마감일에 맞춰서 납품하기 때문에 여기서 오는 자책감은 항상 꼬리표처럼 날 따라다닌다.


처음엔 수입이 자연스럽게 회사원만큼은 오를 거란 희망도 품었지만, 몇 년이 지나도 제자리걸음인 나의 한 달 수입을 보면 이 일이 풀타임인지 파트타임인지 정체성이 모호할 때가 있다. 이럴 때 보면 수입이라는 것이 직업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닫게 된다. (물론 나보다 경력이 적더라도 자신만의 실력과 여러 수완으로 자신의 몸값을 높이는 똑똑한 번역가들은 많다.)




하지만 어찌어찌 번역 일을 10년 가까이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나한테도 직업 정체성이란 게 생기게 되었다. 거래처와 신뢰가 쌓이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으면서 느리지만 성장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 덕분이었다.

'그래. 내가 영상 번역가지. 뭐겠어.'

'어디서든'은 아니지만, '어디서라도' 쓸모가 있는 사람임에 감사하게 되었다. 나의 직업 정체성은 누구든지 감탄하는 뛰어난 번역 실력도 아니고 어느 정도 번다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수입도 아닌 내가 이 업계에서 버틴 시간이 되었다.




사실 난 운이 좋은 편이었다. 데뷔 때부터 좋은 번역업체를 만나서 지금까지 쭉 한 업체랑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업계에 만연한 소위 '더러운 꼴'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실력은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감은 업계의 성수기와 비수기를 따지지 않고 끊임없이 들어왔다. 오히려 내가 휴가 기간을 따로 요청하지 않으면 쉴 수도 없을 정도였다. 대신 일이 끊기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쉬고 싶을 때는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언제든 일이 끊길 수도 있다는 프리랜서로서의 불안감은 늘 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이 정도 불안감은 특별할 것도 없었던 것 같다. 회사원이라고 언제든 해고될 불안감이 없을까, 자영업자라고 언제든 사업을 접어야 할 불안감이 없을까.


내가 진짜 불안감을 느낀 건 상상만 하던 불안이 현실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작년부터 약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일감이 끊겼을 때는 정말 당황스러웠다. 예고도 없이 닥친 상황에 프리랜서의 불안정한 삶을 진정으로 실감하게 됐다. 분명 쉬는 날이 없어서 허덕이던 일정이 이어졌는데, 곧바로 한 달에 일이 한두 건만 들어오자 당장 생활을 빠듯해졌고, 모아둔 돈도 쓰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충만하지는 않았지만, 일감이 한 번도 끊기지 않았던 나는 내가 그간 얼마나 곱게 살아왔는가를 새삼 느끼며 새로운 업체를 구해 보기도 하고 아예 전업을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오랜 거래처들의 일감이 줄어든 탓이었다. 새 거래처를 구해도 손발을 맞추던 사람들이 아니라 메인 일감을 받기는 어려웠고, 메인 거래처에서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니 일정을 꽉 채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기간에 관심 있던 분야에서 경험이라도 쌓아보고 싶었지만, 역시 나이의 장벽을 넘기란 쉽지 않았다.


진로 고민을 진지하게 하던 중에 기존 거래처에 일감이 늘어나자 나 역시도 다시 주말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앞으로 두 달은 주말 없이 일해야 하는 일정이다. 예전에 이런 일정이 이어지면 자아실현을 못 하는 기분이라 워라밸 타령을 하며 우울감을 느끼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게 얼마나 배부른 소리였는지 체험했다. 인생사 정답은 없지만, 고난를 겪은 뒤, 일 많을 때 생기는 우울감이 사라진 것만큼은 확실하다. 글 쓰는 사람의 특성상 한창 바쁠 땐 말 그대로 화장실 갈 새도 없을 정도로 바쁘게 일하게 되는데, 이걸 몇 주 동안 지속하는데도 예전처럼 우울해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라며 파이팅 넘치는 내 모습을 보더니 남편이 옆에서 감탄한다.

'멘털이란 정말 마음대로 되는 거구나.'


그렇다. 같은 일이라도 우울한 일이 될지 감사한 일이 될지는 내 마음에 달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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