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도, 나는

by MSG윤결



시간이 약이라는 말의 유효기간


어른들은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 다 잊힌다, 시간이 약이다." 그 말을 믿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온기를 충분히 느끼지 못한 채 텅 빈 마음으로 잠들던 밤마다

나는 서둘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면 내 마음의 구멍도 저절로 메워지고,

남들처럼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자연스레 알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은 망각일 뿐, 치유는 마법이 아니었다. 몸은 커서 어른이 되었지만,

내 안의 '사랑'이라는 감정의 사전은 여전히 백지상태.

남들이 설렘과 영원을 약속할 때,

나는 그 단어들이 주는 무게에 짓눌려 살아갔다


누군가 다가올 때마다 기쁨보다

'나의 결핍을 알아차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그래서 나는 한 번도 결혼을 꿈꿔본 적이 없다.


혼자라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결혼 적령기라는 현실이 밀려올 때쯤, 나는 오히려 더 깊숙이 숨었다.

지지고 볶는 사람들의 소란을 구경하며, 나는 내가 가진 이 고요함이 못내 다행이라 생각했다.

갈등과 상처 속에서 위태롭게 가정을 버텨내는 이들을 볼 때마다 습관적으로 생각했다.


‘차라리 혼자라서 다행이다.’


짊어질 짐이 없다는 것, 누군가의 감정을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나 한 몸 건사하면 그만인 삶은 내게 가장 안전한 도피처였다.

그렇게 나는 '나'라는 1인칭 단수 주인공의 서사에 집중했다.

혼자였기에 겁이 없었고,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오롯이 나를 지킬 수 있었다.


결핍의 끝에서 마주한 나의 민낯


하지만 솔직해져야 할 순간이 왔다. 현실 속의 나는 여전히 번듯한 집 한 채 없고,

통장 잔고가 넉넉한 것도 아니었다. 현실적인 제약들이 발목을 잡을 때면 막막함이 밀려왔다.

'혼자라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뒤에는, 사실 '나도 남들처럼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숨어 있었다.

사랑을 모르고 자란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사랑을 모르고 자란 것은 선택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 내 삶의 빈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지는 온전히 나의 선택이다.


내게는 나만의 집이 필요하다. 그것은 부동산 앱에 올라온 아파트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먼저 내 마음이 온전히 쉴 수 있는 '심리적 거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구걸하는 아이가 아니라,

나 스스로가 나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그런 집 말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시작되는 것들


인생의 이야기는 꼭 남들과 속도를 맞출 필요가 없다. 누군가는 20대에 완벽한 가정을 이루지만,

누군가는 50대에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는 조금 늦게 시작하는 것뿐이다.

벌어놓은 돈이 없어서, 할 수 있는 게 제한적이라서 절망하기엔 내 남은 생이 너무도 소중하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내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똑바로 쳐다보게 되었다.


나는 믿는다. 늦더라도 나는 꼭 이룰 것이다. 남들이 말하는 거창한 성공이 아닐지라도,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서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그 여정을 완성할 것이다.

집 한 채 없는 지금의 가난함보다 무서운 건, 내 삶을 스스로 포기하는 마음의 가난함이다.


나는 혼자라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혼자라서 더 단단하게 나를 구축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나의 집은 이제부터 지어질 것이고, 그 설계도는 오로지 내가 그린다는 다짐이다.


늦었지만, 나는 이제라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그것이 진정 나의 행복일 것이고, 내가 원하는 인생일 것이다.

이번 생은 원하는 인생은 아니지만 나중에 먼 곳을 떠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인생은 내 만족으로 잘 살았다고 생각하고 싶다.



사랑받지 못해 사랑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던 긴 시간을 지나,

이제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부터 다시 배우려 합니다.

저와 닮은 누군가에게 이 글이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