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 100
니혼슈를 즐기는 이들에게 술병을 비우는 과정은 세 번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첫 번째는 잔에 따를 때 퍼지는 은은한 곡물의 향과 목을 타고 넘어가는 마시는 재미, 두 번째는 양조장의 철학이 담긴 고풍스러운 라벨을 감상하는 보는 재미다. 그리고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바로 모으는 재미다. 흔히 사람들은 라벨 수집에 열중하지만 진정한 고수들은 병의 꼭대기, 즉 '뚜껑'에 주목한다. 특히 1.8L 큰 병인 잇쇼빙(一升瓶)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 묵직하고도 정교한 뚜껑은 수집가들의 소유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물론 우리가 흔히 접하는 720ml 욘고빙의 스크루 뚜껑 역시 버리기엔 아깝다. 잘만 활용하면 세상에 하나뿐인 근사한 장식품으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니혼슈를 접하면서 지금까지 소중히 모아 온 이 왕관(王冠)들을 마그네틱 자석으로 변신시켜 집안 곳곳에 생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엔 냉장고 문이 나의 갤러리였다. 하지만 집안의 절대 권력자이신 마누라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자석을 붙이면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는 둥 과학적 근거는 다소 모호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압박과 함께 지저분해 보인다는 냉정한 평가가 뒤따랐다. 결국 긴밀한 협상 끝에 냉장고 대신 현관문을 나의 전시 공간으로 허락받을 수 있었다.
항상 니혼슈를 마시고 탐닉할때는 뚜껑까지 찍는 습관이 생겼다. 병에는 술 정보인 라벨도 있지만 꼭대기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이름인 뚜껑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뚜껑을 마그네틱 장식으로 만드는 과정은 의외로 간단하여 그 즐거움이 배가된다. 커터칼을 이용해 뚜껑의 불필요한 뒷부분을 조심스럽게 잘라내고, 본체 사이즈에 딱 맞는 자석을 쏙 집어넣기만 하면 끝이다. "참 쉽죠?"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이 작업은 단순한 재활용을 넘어 술과의 추억을 박제하는 의식과도 같다.
흔히 돼지고기를 두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버릴 것 없는 특수부위의 향연이라 말하곤 한다. 니혼슈 역시 마찬가지다. 맑은술은 우리의 목을 축여주고, 라벨은 지식을 채워주며, 마지막 남은 소박한 뚜껑은 일상의 공간을 장식하는 예술품이 된다. 병 전체가 버릴 구석 하나 없는 귀한 존재인 셈이다.
지금은 비록 현관문의 일부분만을 차지하고 있는 소박한 컬렉션이지만 나의 꿈은 원대하다. 퇴직한 후 노후에는 사랑방 같은 니혼슈바를 열어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지금까지 컬렉션 한 뚜껑을 하나씩 선물해 주는 상상을 해본다. 술에서 얻는 사람과의 훈훈한 향기가 있다면 뚜껑은 니혼슈바 주인장이 전하는 진심 어린 마음이 될 것이다. @알쓸사잡 (알면 쓸데없는 사케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