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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석 Mar 29. 2023

(보너스 여행) 간단정리한, 수니파와 시아파

 12/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요르단편-7)

   암만으로 돌아왔다. 암만은 요르단 인구의 15%가 모여 사는 대도시답게 시끌벅적하다. 불과 며칠 만이지만, 그래도 조금 익숙해졌는지 낯설지 않다. 때가 되면 모스크에서 울리는 아잔 소리와 무질서한 차량들이 뿜어대는 배기가스 냄새도 적응할 만하다. 


   처음 도착한 날, 6인실 도미토리에서 자다가 새벽녘 덩치가 곰만한 무슬림들이 부스럭거리며 모두 일어나는 통에, 난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배낭을 꼭 껴안고 혹여 있을지 모를 그들의 공격(?)에 대비해 죽은 듯 있어야 했다. 그런데 곧 양탄자를 바닥에 깔고 평화롭게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그들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다시 돌아온 암만에선 그 일로 다시 잠을 깨진 않았다.      


   암만은 필라델피아로 알려지기 전에 오랫동안 불려왔던 암몬(Ammon)이라는 명칭에서 유래한다. 암몬이라! 성서에서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친딸과 근친하여 낳은 아들 중 한 명이 암몬이라 전하는데, 암만은 암몬의 후손이 세운 도시로 추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집트의 태양신 아몬-라의 아몬(Amon)은 경우에 따라 아멘(Amen), 아문(Amun) 등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데, 암몬도 그중 하나다. 달리 보면, 여기서도 고대 이집트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셈이다. 중동은 정말 파도파도 끝이 없는 궁금증 유발지역이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중동정세는 위태롭기만 하다. 이란의 호메이니 혁명으로 갈라진 친미파와 반미파 그리고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 레바논 내전, 미국과 이라크 간의 두 차례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등은 고질적으로 지역정세를 위협하는 요인이다. 


   2010년 말부터는 튀니지에서 촉발된 아랍의 봄이 중동 각국의 반정부시위로 이어지면서 일부 독재권력을 교체하기도 하였다. 석유는 풍부하지만 후진적인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낸 일반 국민들의 경제적 소외가 당초 분노의 시발점이었다. 하지만 혁명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만은 아니다. 민주적 토양이 없었던 이라크나 이집트에서는 또 다른 권위적 정권이 들어섰고, 승자독식의 권력구조는 반대세력을 자극해 이슬람국가(IS) 같은 극단적 무장 저항을 촉발시켰다. 시리아와 예멘처럼 민주화 요구가 외세의 개입에 의해 내전으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혼란에서 비켜난 국가가 요르단이다. 주변국들이 모두 전쟁에 휘말릴 때에도 요르단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환경을 유지하고 있다. 알카에다나 이슬람국가 같은 테러단체가 침투할 여지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요르단 정치체제가 세련된 민주정을 가진 것도 아니고 경제가 좋은 것도 아니다. 심지어 요르단은 자국민이 약 30% 수준에 불과하다. 기타 팔레스타인계가 60%를 넘고 망명 온 체첸인이나 아르메니아인 등까지 더해진 복잡한 다민족 국가다. 그런데도 평화를 유지하는 게 참 이례적이다.     


   알다시피 요르단은 왕정국가다. 형식적으로는 입헌군주제이나, 국왕이 총리 같은 고위 공직자를 모두 임명한다. 현재 국왕은 압둘라 2세인데, 1999년 타계한 후세인 국왕의 뒤를 이었다. 후세인 국왕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살얼음판 같은 주변 상황 속에서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면서도 친서방 정책을 이어갔고, 아랍민족주의를 주창하다가도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추방하기도 했다. 때론 기회주의적이라 비난도 받지만, 국가에 위협이 될만한 것은 철저히 배격했다. 그래서인지 국민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국왕의 가문이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이건 중동에선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수니파와 시아파     


   이슬람교에는 2개의 큰 계파가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 주류는 수니파다. 


   시아파는 이란과 이라크 남부를 중심으로 바레인과 예멘(후티반군), 레바논 일부(헤즈볼라) 등지에 분포한다. 시리아는 국민 대부분이 수니파이지만 시아파가 통치하고, 바레인은 정반대다. 


   계파가 나뉜 이유는 뭘까? 누가 예언자 무함마드의 뒤를 이어 후계자가 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시아파는 무함마드 가문만이 후계자(칼리프), 즉 이슬람교의 교주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사진2-24. 중동의 시아파 분포도 ©www.stratfor.com)


   무함마드 사후, 정통 칼리프는 합의추대 형식으로 무함마드의 절친인 아부 바크로, 우마르 그리고 우스만으로 이어지는데 이때만 해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우스만이 암살되고 4대 칼리프로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가 선출되자 일이 터졌다. 우스만이 속한 옴미아드 가문이 알리를 암살의 배후로 몰아 보복 암살한 후, 옴미아드 왕조를 연 것이다. 이는 앞으로 옴미아드 가문이 칼리프를 세습하게 됨을 의미했다. 종교지도자의 자리를 힘센 정치권력이 당연직처럼 전유하자, 일부 무슬림이 반발했다. 그들이 시아파다.


   시아파는 알리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알리 이후 이슬람 제국의 황제(술탄)가 겸임하는 칼리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하니 같은 무슬림이지만, 황제 입장에선 자신의 권위를 부정하는 시아파가 눈엣가시였을 테다. 칼리프라는 명칭은 오스만제국을 끝으로 없어졌지만, 지금도 메카를 지배하며 이슬람 종주국 행세를 하는 사우디 왕가가 시아파 이란을 죽도록 싫어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중동의 모든 분쟁에는 수니파-시아파 간 갈등 프레임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요새 복잡한 동네인 이라크와 시리아만 봐도 그렇다. 수니파인 사담 후세인이 지배하던 이라크에선 걸프전 이후 시아파 정권이 들어섰고, 시리아도 아랍의 봄 이후 수니파 반군의 저항이 있었지만 러시아와 중국의 개입으로 소수 시아파 출신인 아사드 대통령의 권력은 아직 건재하다. 


   그런 시아파 집권세력 밑의 무기력한 수니파에게 먹혀든 선동이 이슬람국가(IS)였다. 이라크와 시리아 정부도 사우디 왕가가 수니파 반군을 지원한다고 비난하며, 반정부세력의 실체를 종파 프레임에 가둬버린다. 사우디 왕가는 실제로도 예멘 내전에 대놓고 개입해 시아파 반군에 무차별 폭격을 한 전력이 있으니 아주 근거없는 소리도 아니었겠지만, 권력을 놓고 벌어지는 프레임 놀이 속에 정작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모두 묻힌 셈이 됐다.     


   수니파-시아파 간 갈등이 비단 일부 정치세력의 권력 유지용으로만 이용되는 건 아니다. 이 갈등은 고르디우스 매듭처럼 중동의 모든 갈등에 얽히면서 새로운 분쟁을 확대재생산 되는 중이다.


   예를 들어, 사우디-이란과 함께 중동 분쟁의 또다른 큰 축,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증오를 넘어선 적대는 어떨까? 이들간의 관계가 이렇게 험악해진 배경에도 뜻밖에 수니파-시아파 간 갈등이 있다. 사연은 19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요르단에서 쫓겨난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레바논 수니파와 합류하자, 레바논 기독교도가 민병대를 조직하면서 1975년 레바논 내전이 발발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1982년 PLO를 타겟으로 레바논을 침공한다. 뉴욕타임즈 기자로 중동전문가인 토마스 프리드먼에 따르면, 주로 레바논 남부에 살던 소수 시아파는 처음에 이스라엘군을 환영했다고 한다. 수니파의 횡포에 시달린 탓이었다. 


   그런데 잠재적 동맹군이던 시아파가 등을 돌린 건 이스라엘의 자충수였다. 이슬람에 무지했던 이스라엘은 PLO를 튀니지로 쫓아내는 데 성공한 후, 기독교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공격하도록 방조했다. PLO 잔존세력(수니파) 소탕을 노렸지만, 오히려 천여 명의 시아파 주민이 희생되었다. 수니파 잡으려다 시아파의 원성을 산 이스라엘은 1983년 시아파 축일에 모인 비무장 군중에게 발포까지 하면서 이들간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다. 궁지에 몰린 이스라엘이 1985년 레바논에서 철수했지만, 이미 증오심으로 가득찬 시아파는 헤즈볼라를 조직해 이스라엘에 무차별 공격을 자행한다. 이스라엘은 그런 헤즈볼라 배후로 이란을 지목하면서 시아파 전체로 적대전선이 확대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복잡한 갈등이 요르단에서는 잘 보이질 않는다. 요르단 국민의 대부분이 수니파이긴 하지만 국왕이 하심가의 후손이니 수니파와 시아파를 갈라치는 프레임이 소용없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20세기 초, 영국조차 하심 가문을 꼬드겨 패전국 오스만제국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유도한 후(이를 도운 영국인이 아라비아의 로렌스다) 중동에 3개의 왕국을 수립토록 한다. 요르단, 이라크 그리고 메카 지역의 헤자즈 왕국이다. 하심가라면 민심을 다독일 수 있어 오스만 제국 이후 주인 없는 중동에 쉽게 침투할 수 있을 거란 제국주의자들의 속셈이 작용했다. 


   하지만 이라크 왕국은 1958년 쿠데타로 공화정이 되었고, 헤자즈 왕국은 사우디 왕가가 점령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남은 한 곳이 요르단 왕국이다. 정식으로는 요르단 하심 왕국(Hashemite Kingdom of Jordan)으로 국명에 하심 가문을 명문화해 정통성을 과시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일 하심가가 메카를 계속 영유했더라면 중동 지역을 둘러싼 수니파와 시아파 간 종파 분쟁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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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



[사진출처]

사진2-24. Stratfor 2015. www.stratfo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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