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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석 Mar 27. 2023

성배 전설의 시작, 프랑스 남부

10/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요르단편-5)

   사실, 프랑스 남부는 오랫동안 파리에 있던 프랑스 왕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독자적인 국가나 다름없었다. 이 지역에는 로마시대 초기부터 이주한 그리스와 라틴계 주민들이 다수를 이루었지만, 북부는 갈리아인의 세력권이었다. 당연히 지역적 성향도 달랐다. 그런 탓에 남부는 북부의 지배계층에 상당히 반항적이었다. 남부의 반골 기질을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다. 카타리파 사건이 있고 300년 후 벌어진 위그노 사건이었다.     


   16세기 중반 종교개혁 와중에 프랑스 남부는 가톨릭이 주류인 북부와 다른 입장을 취한다. 칼뱅파 프로테스탄트를 받아들인 것이다. 남부는 곧 개신교 프랑스인을 일컫는 위그노의 근거지가 된다. 일촉즉발이었던 남부와 북부가 충돌한 사건이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북부 가톨릭은 남부에 화해하자며 정략결혼을 추진한다. 1572년 8월, 프랑스 국왕 샤를 9세의 어머니인 카트린이 남부 위그노 남자(훗날 부르봉 왕조를 개창하는 앙리 4세)를 사위로 맞는다. 하지만 속임수였다. 결혼식 다음날 새벽, 세느강변에 자리한 교회의 종소리에 맞춰 결혼하객으로 모인 위그노들이 카트린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학살되는 역대급 사건이 발생한다. 순식간에 프랑스 전역에서 무려 7만여 명이 몰살당한 참극이었다. 그날의 잔인함은 프랑수아 뒤부아의 그림에 남아있고, 영화 <여왕 마고>에서도 볼 수 있다. 이후 위그노의 대대적인 엑소더스가 시작된다. 


(사진2-15. 왼쪽부터 퐁네프 다리의 앙리4세 기마상, 대학살의 신호로 종을 울린 루브르궁 맞은편의 생제르맹록세루아 교회, 기마상 부근 대학살 추모동판 ©이경석)


   흥미로운 것은, 이때 탈출한 위그노의 월등한 재력과 기술력이 프랑스의 라이벌 국가들을 성장시켰다는 점이다. 영란은행을 창설해 영국을 금융중심지로 만들었고, 약 2만 명의 위그노를 받아준 프로이센을 급격히 산업화시켰다. 당시 독일에 정착한 위그노의 구심점이 베를린의 가장 아름다운 젠다르멘 마르크트 광장에 있다. 광장은 극작가 실러의 동상을 가운데 놓고 건축물들이 ㄷ자 형태로 에워싸는 모양새다. 이중 북쪽에 자리한 70m 높이의 프랑스돔이 그곳이다. 독일 수도 한복판에 앙숙 프랑스의 이름을 넣은 교회가 있는 이유다. 이 사건의 결과는 이후 산업화된 독일이 일으킨 두 차례 세계대전이란 부메랑으로 돌아왔고, 프랑스는 나치에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으니 세계대전 역시 남부와 북부의 대립으로 해석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스위스 시계도 위그노 작품이다. 그들은 스위스에서 라쇼드퐁이란 작은 도시에 주로 이주했는데, 시계산업으로 커진 도시는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르꼬르뷔제 가문이나 자동차로 유명한 쉐보레 가문까지 끌어들였다. 그 밖에도 오랄비나 듀라셀 같은 브랜드와 면도기로 유명한 질레트 가문 역시 영국으로 피신한(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간) 위그노다. 


   반면, 이 사건으로 남부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했지만, 경제적 타격을 입은 프랑스는 결국 1789년 프랑스혁명을 맞이한다. 이 사건은 사회적 관용과 개방을 포기한 대가가 어떤 파국으로 치닫는지 언급될 때 자주 회자되곤 한다. (종교의 자유를 폐기했던 퐁텐블로 칙령 300주년을 맞아, 1985년 미테랑 대통령은 전 세계 위그노 후손들에게 사과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런데 프랑스혁명도 마르세이유, 즉 프랑스 남부에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남부와 북부의 충돌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파악해 볼 수 있다. (알다시피, 혁명 당시 혁명군의 주요 타겟은 왕궁과 가톨릭 성당이었다!)

     

(사진2-16. 좌: 뒤부아의 성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 우: 베를린 마르크트 광장의 프랑스돔 ©이경석)


   이렇게 교황을 거부하고 로마가톨릭의 교리와 배치되는 독특한 영성의 흐름이 유독 프랑스 남부에서 지속적으로 형성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한 또다른 이야기에 주목한다. 바로 성배 전승의 주 무대가 프랑스 남부이기 때문이다.


   가령,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는 성배라는 단어, San Greal(신성한 술잔)이 사실은 Sang Real(왕족의 피)이란 단어를 감추기 위해 띄어쓰기를 의도적으로 달리한 거라 주장한다. 즉, 성배를 단순한 술잔이 아니라 예수의 혈통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소설이 나오기 꽤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그 배경에 프랑스 남부가 나온다. 


   즉,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결혼해 임신하는데, 마리아가 피신하여 딸을 낳은 곳이 바로 프랑스 남부라는 전승이다. 그렇게 프랑스 땅에 예수의 후손이 다스리는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개창으로 이어진다. 프랑스 왕가의 상징으로 알고 있는 백합무늬가 메로빙거 왕조의 문장에서 시작되었을 정도니, 메로빙거는 프랑스의 뿌리와 같다. (백합은 애초 막달라 마리아의 상징이었지만, 어느새 성모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하게 된다. 이 역시 마리아란 동일한 이름을 활용한 ‘의미 바꿔치기’일까?) 


   그런데 툴르즈 백작 가문의 문장도 바로 백합무늬다. 레몽 4세가 메로빙거 가문의 직계 후손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남부를 둘러싼 이 모든 정황이 우연의 일치라 보기엔 너무 잘 들어맞아 소름이 돋을 정도다.     


(사진2-17. 프랑스 왕가의 상징인 백합무늬 fleur-de-lis 문양)


   주장을 뒷받침하듯, 프랑스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유해를 모신 성당도 있다. 베즐레라는 소도시의 동쪽 언덕에 있는데, 스페인으로 향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네 출발점 중 하나로 세계문화유산이다. 유해가 발견된 13세기는 십자군 전쟁의 실패가 뻔히 예견되면서 성서 속 인물들의 유해가 죄다 서유럽에서 발견되고, 이들이 예루살렘을 대신해 새로운 순례지가 되는 게 유행처럼 번질 때였다. 따라서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이 지역에서 그녀와 관련된 전승이 오랫동안 내려왔다는 걸 오히려 반증해 준 셈이다. 

   

   신기한 게 또 있다. 성배가 주요 모티브로 등장하는 아서왕 이야기를 보면, 성배를 가지고 있던 아리마대의 요셉이 성배를 숨긴 장소가 바로 아발론(Avalon)으로 나오는데, 베즐레 바로 옆 마을 이름이 아발롱(Avallon)이라는 사실이다. (이 도시는 매우 익숙한데, 우리나라에서 활동 중인 방송인 로빈 데이아나의 고향으로 TV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막달라 마리아가 잉태한 예수의 혈통이 성배의 진정한 의미라면, 그녀의 무덤 부근에 아발롱이란 도시의 존재도 매우 의미심장해 보인다.      


(사진2-18. 베즐레 마을과 막달라마리아 성당 ©https://www.les-plus-beaux-villages-de-france.org)


   또다른 전승도 있다.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온 카타리파 기사 3명이 성배를 찾아서 프랑스 남부, 옥시타니아에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이 출처 모를 기록이 나치를 자극했다. 이에 게슈타포 수장인 히믈러가 오토 란(1904-1939)이라는 고고학자를 직접 친위대원으로 영입해 성배 찾기에 나선다. 앞서 언급한 카타리파의 최후 항전지인 몽세귀르 성채부터 샅샅이 조사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가 여기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이후 오토 란은 나치의 버림을 받아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성배추적은 오토 스코르체니(1908-1975)라는 친위대 대령에게 맡겨진다. 


   그는 건축가 출신이자, 영화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의 모델로도 알려졌는데, 역시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넘겨졌는데도 오히려 연합군의 유리한 증언으로 무죄를 받았고, 구금 중 누군가의 도움으로 탈옥까지 한다. 그리고 스페인 독재자 프랑코의 비호 아래 편안히 살다 암으로 사망한다. 생전에 독일 정부로부터 사면받은 후에는 예전 나치 친위대원들을 모아 오뎃사라는 조직도 설립했는데,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를 돕는 스파이로도 활동했다. 과격한 나치 추종자에게 내려진 관대한 처분과 모순투성이인 그의 행적 때문에 항간에서는 그가 진짜로 성배를 발견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한다. 


   나치에게 성배 이야기가 끊임없이 따라붙는 데에는 그들 스스로가 성배의 수호자임을 공공연히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1939년 히틀러가 만든 훈장이다. ‘철십자 기사 훈장(Knight’s Cross of the Iron Cross)’으로 가장 용맹하고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군인에게 히틀러가 직접 수여했다. 중요한 건 훈장의 모양이다. 예상했듯이 '크로아 파테'다! 20세기판 템플기사로 임명받은 수상자 중에는 물론 오토 스코르체니도 있다.      


(사진2-19. 왼쪽부터 몽세귀르 성채, 오토 스코르체니, 나치의 철십자기사 훈장 ©위키피디아)


   암튼 프랑스 남부의 갑작스런 카타리파와 옥시타니아 십자가 출현은 이 모든 역사적 사건들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당시 템플기사단도 교황으로부터 카타리파를 소탕하는 알비십자군에 합류하라는 독촉을 받았다. 하지만 기사단은 이를 공식 거부했다. 자세한 내막은 전해진 바가 없다. 다만, 템플기사 대부분이 프랑스 출신이었고(더구나 기사단 창설 멤버 9명 모두 프랑스 남부 출신이다), 프랑스 남부의 귀족들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추측만 할 뿐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직속 상관인 교황의 명을 거역할 명분이 될 순 없었다. 


   대신, 템플기사단이나 카타리파 그리고 나치에 이르기까지 성배전설과 얽혀 있는 모두가 그릭십자가를 애용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해석의 단초가 될 수도 있어 보인다.     


   다시 정신 차리고 앗데이르에 그려진 그릭십자가를 바라본다. 비잔틴 시대에 그려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템플기사단 혹은 성배와 관련된 다른 집단이 남긴 다른 의미의 표식일 수도 있다면 너무 앞서나가는 걸까? 어떤 게 맞을지는 오로지 오랜 세월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켜본 앗데이르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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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역사는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

(요르단 주변 지도, 구글 지도 활용)




[사진출처]

사진2-18 : https://www.les-plus-beaux-villages-de-france.org

사진2-19좌 : By MDanis - Own work,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1245043

사진2-19가운데 : By Bundesarchiv, Bild 101III-Alber-183-25 / Alber, Kurt / CC-BY-SA 3.0, CC BY-SA 3.0 de,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5413831

사진2-19우 : By Original uploader was Bruce Marvin at de.wikipedia - Transferred from de.wikipedia to Commons by Tzo15 using CommonsHelper.,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235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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