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맨체스터에서 이륙한 비행기는 저녁 9시 30분경 키프로스 서쪽 파포스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꼭 20년 만이었다. 입국을 처음 시도한 게 1997년. 국내에서 비자까지 미리 받았지만(지금은 비자 면제국이지만, 당시엔 주한영국대사관이 대행한 키프로스 관광비자를 발급받아야 했다), 항공권을 도무지 구할 수 없어 안타깝게 돌아서야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키프로스는 유럽 최고의 휴양지다. 바캉스 시즌에 항공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지금도 똑같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저가항공사들이 엄청 많아졌고, 인터넷으로 가격비교까지 해가며 직접 예약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무려 5시간의 비행이지만 15만 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티켓을 손에 쥐는 데 성공했다. 항공사는 영국계 저가항공사인 이지젯.
탑승객 중에 군인들이 꽤 많다. 식민지였던 키프로스가 1960년 독립한 이후에도 영국은 남쪽 두 곳에 대규모 군사기지를 운영 중이다. 그것만 봐도 이 섬이 얼마나 전략적 요충지인지, 그리고 그로 인해 겪었을 지난한 역사의 굴곡들을 짐작해볼 수 있다.
칠흑 같은 밤이었다. 항공기 문이 열리고 트랩에 첫발을 내딛자 피부에 닿는 따스한 바람이 낯선 긴장감을 부드럽게 녹여준다. 그런데 누군가 활주로에 조말론 향수라도 잔뜩 뿌린 걸까? 캄캄한 공기에 상큼한 향기가 한가득이다. 맛있는 음식을 탐하듯, 나도 모르게 자꾸 숨을 들이키게 된다. 대체 이 기분 좋은 향기의 정체는 뭘까?
여행지는 오감을 통해 내 머릿속 기억저장소에 특별함으로 간직되지만, 거기에 복잡미묘한 감정의 라벨을 붙여주는 건 그중에 후각이 으뜸이다. 사람마다 독특한 체취가 있듯, 장소마다 뿜는 냄새도 제각각이다. 주변의 자연환경과 건축자재, 음식과 그곳의 독특한 문화가 적절히 섞인 결과다. 티베트 라싸에선 야크버터 냄새가 온몸을 눅진하게 만들고, 인도 바라나시에선 시신 태우는 냄새가 온 도시를 무겁게 휘감는다.
그런데 이렇게 한 번 자극된 특정 후각은 어디선가 다시 반복될 때 그 냄새를 처음 경험했던 과거의 기억을 불러낸다. 프루스트 효과라 했던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향을 맡으며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빠져든 것처럼, 은은한 커피향은 쿠바 아바나의 비에하 광장에 있는 노천카페로 나를 이끌고, 오토바이가 내뿜는 배기가스 악취는 스모그로 가득한 파키스탄 라호르의 혼잡함 속으로 내 의식을 순간 링크시킨다. 냄새에 밴 행복감이나 불편함 같은 느낌이 데자뷰를 일으키는 일종의 촉매제다.
4월 초 키프로스를 감싸던 은은한 향기의 출처는 오렌지꽃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비로소 눈으로 본 키프로스는 그냥 총천연색 꽃천지였다. 지구에 있는 모든 꽃들은 죄다 모인 듯, 빨갛고 노란 형형색색의 이름 모를 꽃들이 온 천하를 물들였다. 그 꽃향기에 취할 지경이다. 지상에 천국이 존재한다면 여기가 아닐까 싶다. 키프로스는 연중 날씨가 온화해 오렌지꽃이 지고 나면 미모사, 자스민, 장미, 로즈마리 같은 향기 좋은 꽃들이 돌아가며 일 년 내내 만발한다. 가히 지구의 방향제라 불릴 만한 섬이다.
이 매혹적인 섬에 어울리는 별칭이 또 있다. 바로 ‘아프로디테의 섬’. 아프로디테가 키프로스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잘 모르더라도 사랑과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가 여기 아니면 어디서 태어났을런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아프로디테와 키프로스는 환상의 조합이다. 이 아프로디테 신화의 중심지가 바로 섬 서쪽, 파포스 지역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여신을 먼저 영접하기로 했다.
아프로디테의 성역, 파포스
섬에선 대중교통이 불편해 차를 렌트했다. 아일랜드, 몰타와 함께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건 영국의 식민지배 흔적이다. 당연히 좌측통행이다. 하지만 영국에서 충분히 익숙해진 터라 문제가 없다. 통행량도 그리 많지 않다.
파포스 시내에서 남쪽으로 30분을 달리면 아프로디테의 탄생지로 전해지는 해변이다. 공터에 차를 대고 방금 지나온 도로 밑 굴다리를 통과하자 바다가 보인다. 제비꽃처럼 짙은 보랏빛 바다. 그 위에 점점히 박힌 베이지색 라임스톤 바위. 석양을 받으니 색의 대비가 한층 더 강렬해진다. 여기서 아프로디테가 태어나 파도에 밀려 내려왔다니, 미의 여신은 데뷔도 이렇게 드라마틱한 곳에서 하는 모양이다.
아프로디테는 바다 거품에서 태어났다. 이름 자체가 아프로스(거품)+디테(여성), 즉 거품에서 태어난 여성이다. 제우스가 바다의 여신과 바람을 피워 낳았다는 설(호메로스)과 크로노스가 포악한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잘라 바다에 던졌을 때 쏟아져 나온 정액이 거품을 일으켜 태어났다는 설(헤시오도스)로 탄생신화가 나뉘지만, 모두 거품에서 태어나기는 매한가지다. 실제 여신이 도착한 바닷가는 강한 서풍으로 파도가 무척 세다. 파도는 자갈 해변에서 하얗게 부서지며 아직도 거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부서진 바닷물이 물러가면서 자갈을 굴린다. 그렇게 구르는 자갈들이 서로 부딪히며 나는 또르륵 소리가 어찌나 경쾌한지 마치 음악 소리 같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자니 보이는 풍경이나 들리는 소리가 잘 세팅된 뮤지컬 극장에 온 듯하다. 보티첼리의 대작, <비너스의 탄생>처럼 이제 무대 뒤에서 주인공인 아프로디테만 등장하면 되는데, 참을성 없는 관객 몇몇이 바다에 뛰어들며 스스로 여신을 참칭한다. 이곳에 몸을 담그면 여신이 젊음과 아름다움을 준다는 속설이 있어, 수심이 급격히 깊어지지만 사람들은 한 치의 망설임이 없다. 나도 발만 살짝 담가 본다. (설마 발만 예뻐지는 거 아니겠지?)
아프로디테가 내려주는 축복을 듬뿍 받고 이제 북쪽으로 핸들을 꺾어 올라간다. 몇 곳의 멋진 해변과 산을 하나 넘어 섬의 북서쪽 끄트머리에서 다시 한번 아프로디테의 흔적과 마주한다. 이름하여 아프로디테의 목욕탕(Baths of Aphrodite).
신화에 따르면 아프로디테는 제일 못생긴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와 강제로 결혼하지만, 전쟁의 신 아레스와 바람을 피운다. 헤파이스토스는 불륜현장을 덮쳤지만, 파포스의 샘에 가서 목욕을 하는 조건으로 아내를 용서한다. 순결을 다시 찾아준다는 그 샘이 바로 여기다.
주변은 국립공원이라 가벼운 트레킹이 필요하다. 꽃냄새 풀풀 나는 오솔길 끝 조금 으슥한 곳에 접어들자 물이 고인 바위동굴이 나타난다. 천장이 하늘로 개방된 일종의 노천탕인데 온갖 나무들이 그 위를 덮어 훌륭한 보호막이 된다. 은밀한 밀회를 즐기기 딱 좋은 곳이다.
아프로디테는 불륜을 들킨 이후에도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한다. 정작 남편과의 사이에선 자식이 없지만, 정부인 아레스와는 열 명도 넘는 자식을 두었다. 디오니소스와 헤르메스와도 관계를 맺었는데, 심지어 그녀와 항상 붙어 다니는 아들, 사랑의 신 에로스(큐피트)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다.
여신은 인간도 가리지 않았다. 아레스의 질투로 죽임을 당해 붉은 꽃 아네모네가 된 미소년 아도니스가 대표적이다. 또한 안키세스라는 왕자를 유혹해 낳은 아들,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전쟁 이후 이탈리아에 정착하면서 로마제국의 시조가 된다. 자연스럽게 아프로디테(비너스)는 로마의 수호신이 된다. 로마시대 도시들이 중심에 비너스 신전을 웅장하게 두었던 이유를 알아낸 것 같다.
샘을 지나면 아프로디테의 오솔길이라는 좁은 산책길로 이어진다. 완주에 3시간이 걸린다지만, 길을 따라 언덕에만 올라도 황홀한 파노라믹 뷰를 깜짝 누릴 수 있다. 일렁이는 푸른 바다와 만나는 절벽이 시원하게 펼쳐진 해안! 안구정화에 탁 트인 마음까지 덤으로 챙기고 파포스로 귀환한다. 그런데 파포스란 도시 이름도 알고 보면 아프로디테와 관계가 깊다.
세계 5대 박물관 중 하나라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는 19세기 프랑스 화가, 장 레옹 제롬이 그린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가 있다. 작품은 뒤태만 보이는 전라의 여인과 조각가로 보이는 남성이 오묘한 자세로 입을 맞추는 장면을 묘사한다.
자세히 보면 여인의 엉덩이 아랫부분이 상체와는 다르게 상아처럼 희다. 여인의 이름은 갈라테이아. 그림 속 남성, 피그말리온이 만든 조각상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키프로스 왕인 피그말리온은 자기 왕국의 여인들을 싫어해 독신으로 지낸다. 그러다가 완벽하게 아름다운 여인을 조각하고, 사랑에 빠진다. 급기야 조각상이 진짜 인간이 되기를 절실히 빌었는데, 아프로디테가 소원을 들어준다. 마침내 상체부터 인간으로 변해가는 조각상과 강렬한 키스를 하며 피그말리온은 완전한 사랑을 성취한다.
화가는 그 키스의 순간을 화폭에 옮겼는데, 아직 하체가 조각상인 탓에 부자연스러우면서도 관능적인 자세가 묘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단 한 컷에 극적인 순간을 응축하면서도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를 남겨 눈앞에 생생한 동영상급 감흥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피그말리온을 소재로 한 회화 중 단연 걸작이다.
여기서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심리학 용어가 유래됐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격언쯤 된다. 주변의 높은 기대나 관심을 받는 사람은 그만큼 노력하게 되어 결과가 실제 좋아지는 현상이다. 피그말리온 입장에서는 그랬겠다. 간절함으로 아프로디테를 움직여 원하던 것을 얻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갈라테이아는 인간이 되었지만 자유의지를 빼앗긴 셈이고, 심하게 말하면 요샛말로 ‘그루밍 성폭력’을 당한 셈이다.
독설가로 유명한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도 그러한 관점에서 자신의 희극 <피그말리온>을 완성한다. 그는 갈라테이아(극에서는 일라이자)를 피그말리온(극에서는 헨리 히긴스)에 맹목적으로 끌려다니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다른 남자를 선택하는 주체적 인간으로 그린다. 하지만 신화와는 다른 결말을 의도했던 그의 희곡을 바탕으로 제작된 오드리 햅번 주연의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는 할리우드 입맛에 맞게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이루는 뻔한 결말로 돌아왔고, 그해 아카데미상을 휩쓴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그렇게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가 결혼해 낳은 딸이 파포스다. 후에 그의 아들(혹은 남편)이 키프로스 서쪽에 도시를 세워 파포스라 하고 아프로디테 신앙의 중심지로 삼았다고 전한다.
BC 12세기 그리스 미케네인들이 조성한 고대 파포스 지역(Palae-Paphos, 현재 시가지의 남쪽)에 아프로디테 신전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이후 지금 파포스 항구 부근에 새로운 도심(Nea-Paphos)이 형성된다. 여기선 두 곳의 고고학 유적이 유명한데, 왕들의 무덤(Tombs of the Kings)과 파포스 고고학공원으로 알려진 옛 로마인들의 주거 유적이다. 전자가 죽은 자들의 공간이라면, 후자는 산 자들의 공간이다. 모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왕들의 무덤은 해변가 바위지형을 이용해 굴을 파서 살아있는 사람이 살아도 될 법한 동굴집을 조성한 후 무덤으로 썼다. 그중에서도 지하에 중정을 만들고 주변을 도릭 기둥으로 두른 3번 무덤은 이탈리아 저택에 온 기분마저 들게 한다. 바위틈에 혹은 지하에 조성한 크고 작은 무덤들이 수십 기에 이르지만, 무덤 속 주인들에 대해선 밝혀진 바 없다. 규모는 작아도 이집트 왕가의 계곡이나 요르단 페트라를 섞어 놓은 듯 독특한 유적 사이로 돌아다니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바로 인근, 파포스 고고학공원에서 발굴된 로마인의 고급주택가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모자이크를 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바닥을 수놓은 그림들은 1,500년의 세월이 믿기지 않을 만큼 화려한 색채가 돋보인다. 아프로디테 신앙의 중심지로서 파포스가 고대부터 얼마나 번성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파포스에서 마지막 날, 파포스 고고학공원 입구에 즐비하게 늘어선 해산물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저렴한 가격에 와인까지 곁들여 좋아하는 해산물을 맘껏 즐길 수 있으니 키프로스가 더더욱 사랑스러워진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포만감에 잠시 바다 건너편을 응시하다 눈에 들어온 것은 파포스 성채. 파포스 항구 끄트머리에 육지에서 약간 돌출된 곳에 성채가 세워져 있다.
단순하면서도 묵직한 직육면체의 성채는 역사만큼이나 우여곡절이 많았다. 비잔틴 제국이 처음 세웠지만 1222년 대지진으로 무너진 후 키프로스를 양도받은 기 드 뤼지냥이 재건했다. 이후 베네치아인들이 의도적으로 파괴한 걸 오스만 제국이 재차 복구한 게 지금 모습이다. 키프로스에는 이렇게 방어용 목적의 성채들이 전역에 있는데, 특히 십자군 전쟁에서 퇴각한 템플기사단이 남긴 유산들도 적지 않다. 아프로디테에 취해 해야 할 일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같다. 내일부터 다시 템플기사단을 만나러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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