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1년 5월 15일, 이슬람 군대가 십자군 최후의 수도인 아크레의 성벽을 부수고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이 아크레를 완전히 장악하기까지 12일이나 더 걸렸다. 그만큼 템플기사들은 완강했고, 악에 받친 무슬림은 성 내 모든 기독교도를 닥치는 대로 도륙했다.
처참한 상황이 종료되자 주변에 몇 남지 않은 성채에 머무르던 템플기사들도 전의를 상실하고 중동을 탈출하기 시작했다. 여름이 되자 십자군의 땅은 더 이상 남아 있질 않았다.
철수한 템플기사단이 집결한 곳은 키프로스였다. 템플기사들은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이 섬에 본부를 차리고 성지 수복을 위한 준비에 나섰다. 물론 끝까지 현실화되지 못하고 16년 후 템플기사단의 갑작스런 몰락과 함께 영원한 희망사항으로 남게 되었지만 말이다.
성지를 잃어버린 템플기사단은 존재 이유를 상실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예루살렘 수호와 순례자 보호가 그들이 내세운 최소한의 명분이었기 까닭이다. 하지만 기사단은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속 권력을 휘두를 여력이 충분했다. 오로지 필요한 게 있었다면 그 권력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그들만의 국가였다. 굳이 성지가 아니라도, 자신만의 영토를 가진 정치결사체로 성장했더라면 후에 허약한 교황을 내세운 프랑스 왕의 농간에 최후의 저항이라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키프로스는 하늘이 기사단에 내려준 마지막 동아줄이 될 수도 있었다. 한때 키프로스를 템플기사단이 소유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3차 십자군에 참여해 성지로 가던 도중, 폭풍을 만난다. 이때 일부 배가 난파되어 키프로스 섬에 떠밀려갔다. 당시 비잔틴 제국에서 임명된 키프로스 총독이 난파선에서 리처드 1세의 누이와 약혼녀를 발견하자 감금하고는 리처드 1세에게 몸값을 요구한다. 총독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아둔한 지도자였던 모양이다. 아버지를 상대로 두 번의 반란 끝에 왕위를 거머쥔 30대 초반의 젊고 패기만만한 잉글랜드 왕은 지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는 무모한 야심가였다.
리처드 1세는 당초 계획을 급변경하고 키프로스로 돌진, 단숨에 섬을 정복하고 만다. 그리고는 이 섬을 템플기사단에게 팔아버린다. 그렇게 우연히 들어온 키프로스를 기사단은 병참기지로 활용했다. 하지만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기사단은 성지수복에 집중하기 위해 섬을 프랑스 출신의 십자군 기사, 기 드 뤼지냥(후에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이 된다)에게 양도했다. 이로써 템플기사단만의 독립국가를 이룩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를 날려버린 꼴이 되었다.
이후 키프로스는 기 드 뤼지냥의 후손들이 약 300년간 지배한다. 그 중 첫 100년이 지날 때, 아크레가 무너졌다. 이제 십자군의 마지막 영지가 된 키프로스까지 언제든지 공격받을 수 있는 불안한 상황이 되자 템플기사단은 예루살렘과 아크레에 이어 키프로스에 세 번째 본부를 차리고 섬의 든든한 수호자 역할을 자임한다. 그들은 섬 주변에 방어용 성채를 많이 쌓았다. 아크레에서 함께 쫓겨난 구호기사단도 함께 했다. 다행히 무슬림의 대규모 공격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적은 기사단을 후원하던 기독교 세계 내부에서 나왔다. 성지를 잃어버린 기사단의 막대한 재산이 화근이었다. 결국, 1307년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선수를 친다. 기사단들을 이단으로 몰아 기습 체포작전을 벌인 것이다. 이 모든 게 키프로스에 쫓겨 오면서부터 시작됐으니, 키프로스는 그야말로 템플기사단에게 기회와 비극이 교차된 운명의 땅이었다.
콜로씨 성채, 템플기사단의 보물창고
파포스에서 고속도로를 40분간 달려 키프로스 제2의 도시, 리마솔 인근의 콜로씨(Kolossi) 성채에 도착했다. 당초 구호기사단에게 주어진 영지에 세워졌지만, 1306년부터 템플기사단이 기사단 본부로 사용한다. 1307년에 템플기사단 체포령이 떨어졌으니, 여기가 템플기사단의 마지막 야전본부였던 셈이다.
현재 남아있는 성채는 거의 폐허에 가깝다.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건물들은 뼈대만 앙상한데, 그 사이로 3층 높이의 직사각형 망루 정도만 온전한 형태로 솟아 있다. 바로 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가 상주하던 사령탑이다.
망루 내부도 텅 비어 있는데, 밋밋한 내부에서 그나마 2층 대형홀이 눈길을 끈다. 아마 간부들이 중요한 작전회의를 하거나, 연회를 베풀던 장소였으리라. 지금은 조촐한 벽난로만 있을 뿐인데, 한쪽 면에 뜬금없이 새겨진 조그만 백합문장(fleurs-de-lis)이 눈에 들어온다. 망루 안에 유일한 성화에도 어김없이 이 상징은 반복된다. 그뿐이다. 크로아 파테 하나 없어 조금은 실망했다. 템플기사단 몰락 이후 1313년 성채를 인계받은 구호기사단이 살아남기 위해 템플기사단과의 관계를 부인하고 그들의 흔적을 철저하게 지워버린 탓이다. 그래도 지구상에 남은 템플기사단의 유일한 본부 건물인데, 이 정도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지 마음이 무거워진다.
망루 옥상에 올라서자 시원한 바람에 답답함이 조금 누그러진다. 이 성채를 경계로 바다 쪽은 영국의 아크로티리 군사기지이다. 삼면이 이집트와 터키, 중동으로 둘러싸인 동지중해에서 제해권을 장악하기 가장 완벽한 위치다. 그만큼 콜로씨 성채의 전략적 가치를 템플기사단들도 일찍부터 알아본 셈이다.
옥상에는 몸을 숨기고 적들을 공격할 수 있도록 요철모양의 가벽을 둘렀다. 그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망루 주변에 크고 작은 건물들이 보인다. 기사단 숙소이거나 창고, 마구간, 부엌 등이었을 게다. 아크레에서 최후의 일전을 치르던 템플기사단은 아크레 함락 사흘 전, 보관 중인 각종 보물을 레바논을 거쳐 키프로스에 싣고 왔다 전한다. 그 보물들은 새로운 본부가 된 콜로씨 성채에 왔을 테니, 저곳 어디쯤이 틀림없다. 성배도 거기 있었을까? 확인 가능한 보물의 이동경로는 여기까지다. 어떤 자료도 남아 있지 않다. 다 어디로 간 걸까? 프랑스 국왕이나 교황청이 강제압류했을까? 아니면 몰락 전에 다른 곳에 숨겼을까?
프랑스 국왕이나 교황청의 손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템플기사단은 기부받은 막대한 자산으로 글로벌 금융네트워크를 구축했으니 후원자들의 자산양도 각서나 금융거래 전표 등을 잘 보관해야 했다. 필사본 일부가 남았긴 하지만, 문서 원본들은 보물과 함께 키프로스로 옮겨지면서 자취를 감췄다. 문서는 얼마든지 정치적으로 악용할 좋은 소재였던 만큼, 프랑스 국왕이 입수했다면 공개하지 않았을 리 없다. 특히, 기사단의 후원자 상당수가 국왕과 앙숙관계인 프랑스 남부 귀족들이었으니, 기사단과 함께 이단으로 묶어 일망타진할 기회였을 테다. 그러나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문서가 국왕에게 넘어가지 않았다면, 보물도 그럴 개연성이 크다. 실상, 필리프 4세는 프랑스 내 기사단의 재산을 몰수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키프로스를 비롯한 해외 자산을 회수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시간이 부족했다. 1314년 3월 그랜드마스터를 화형시키며 기사단을 제압한 지 8개월 후, 국왕도 사냥 중 낙마해 급사했다.
교황청의 상황도 별 볼 일 없었다. 이 시기, 교황청은 ‘아비뇽 유수’ 기간이었다.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전한 교황청에 반강제로 유폐된 교황들은 프랑스 국왕의 꼭두각시였다. 교황청이 프랑스 국왕을 패싱하고 독자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여러 상황을 종합해보면, 보물은 키프로스에 그대로 남았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템플기사단에 대한 키프로스 왕가의 신뢰가 굳건했다. 키프로스 국왕은 1308년 템플기사단원을 체포하라는 교황의 교시를 받고도 미적미적 미루다가 1310년이 되어야 겨우 재판을 열었다. 그나마 모두 무죄였다. 1311년 재판을 다시 열라는 교황의 불만 섞인 독촉에 기사단원들을 비로소 감옥에 가두는 시늉만 했을 뿐이다. 국가의 안위를 위해 템플기사단이 꼭 필요했던 키프로스였다. 그러니 기사단이 키프로스를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안전하다고 느꼈을 것은 자명했다.
재판 과정에서 보물의 행방과 관련한 중요한 기록도 나온다. 문헌에 의하면, 키프로스 국왕은 이단 재판의 비용으로 보물들을 압류했다고 한다. 즉, 템플기사단의 보물이 키프로스 국왕에게 넘어갔다는 얘기다.
기사단과 키프로스 왕가가 밀착 관계에 있었던 당시 상황을 곱씹어 본다면 압류를 문자 그대로만 볼 수는 없다. 아크레 함락 이후 마지막 십자군 왕국이 된 키프로스 국왕이 템플기사단 보물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했을 수도 있다. 재판비용을 핑계로 압류하지 않았으면, 템플기사단의 모든 재산은 교황의 교시에 따라 구호기사단 차지가 되기 때문이다. 키프로스 국왕은 구호기사단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처음에 템플기사단을 따라 키프로스에 왔던 구호기사단이 새 본부가 될 만한 곳을 찾아 비잔틴 제국이 소유한 로도스섬을 4년이나 공략해 빼앗은 것도 키프로스 국왕과의 불화가 한몫했다.
템플기사단의 보물이 구호기사단에 양도되기 직전에 다시 키프로스 어딘가에 은닉되었다고 나만 생각한 것은 아닌가 보다. 왜냐면 이후 키프로스는 해적들로부터 수없이 약탈을 당해왔기 때문이다.
당시 수도였던 파포스를 비롯해 보물들이 숨겨져 있을 만한 곳은 모조리 파헤쳐졌다. 키프로스는 내륙에 험준한 산악지역이 형성된 탓에 사람들은 주로 해변에 살았다. 당연히 해변을 따라 성채와 교회가 약탈의 일차 대상이 되었다. 견디다 못해 교회들은 내륙의 트루도스 지역으로 숨어들었다. 내부는 화려한 이콘들로 가득 채웠지만, 외양은 일반 가정집과 구분할 수 없게 하여 침략을 피해갔다. 그렇게 신앙을 지켜갔다. 이러한 역사적 특수성을 인정해 트루도스 산악 지역의 10개 교회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보물사냥군 대열에는 1489년부터 키프로스를 식민지로 삼은 베네치아 공국이 포함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이탈리아는 1870년 통일 전까지 도시국가들이 난립했다. 그중 비잔틴 속국으로 시작한 베네치아 공국은 특이한 구석이 많은 나라다. 대의명분이나 의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돈에 환장해 기독교 세계의 뒤통수를 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가령, 4차 십자군을 꼬드겨 무슬림이 아니라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도 했고, (그 최대 전리품이 베네치아 산마르코 성당 입구 위의 네 마리 청동 말이다. 당초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개선문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조각이다) 아크레에서 십자군이 최후의 항전을 벌일 때 맘루크에게 공성장비를 몰래 팔기도 했다. 게다가 키프로스를 식민지화해 십자군 전쟁의 마지막 숨통까지 끊었다.
이후 베네치아 공국은 해변을 따라 템플기사단이 네트워크를 구축한 방어용 성채 대부분을 헐어버린다. 주둔군의 경비를 충당하겠다는 어이없는 이유였다. 그렇게 헐린 대표적인 성채가 파포스 성채와 (앞으로 볼) 섬의 북쪽 키레니아에 자리 잡은 세인트 힐라리온 요새다. 보강해도 모자랄 판에, 있는 성채마저 없앴던 데에는 템플기사단 보물에 대한 욕심이 자리 잡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이제까지 베네치아 공국이 보여준 기이한 행적만으로도 충분히 넘겨짚을 수 있는 일이었다.
콜로씨 성채의 망루에서 템플기사단의 보물창고를 내려다보며 내 호기심은 한없이 뻗어갔다. 그런데 해적들과 베네치아 공국의 약탈에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면, 대체 보물들은 어디로 간 걸까?
아쉽게도 정답은 모른다. 일부에선 베네치아 공국 혹은 오스만제국이 섬을 공략할 때 파괴되거나 불에 타버렸다고 주장한다. 다른 일부는 어느 시점에 템플기사들이 안전한 다른 지역으로 밀반출했다고도 한다. 암튼 이제부턴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자 한다. 부족한 역사는 역사를 해석하는 상상력으로 메꾸면서 말이다.
콜로씨 성채에서 나와 근처의 리마솔에 잠깐 들렀다. 지중해 특유의 찬란한 태양이 눈부신 항구도시이다. 휴양지 냄새가 물씬 풍기는 꽤 현대적 분위기였는데, 항구 근처에 고풍스런 리마솔 성채가 있다. 키프로스를 점령하면서까지 약혼녀를 구해 낸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여기서 약혼식을 올렸다. 지금의 성채도 베네치아 공국이 파괴했다가 1590년 오스만제국이 복원했다.
내부는 박물관인데, 규모는 작지만 십자군 시대를 전후한 유물 컬렉션이 알차다. 그중 목이 잘린 기사의 유골이 제일 유명하다. 목뿐만 아니라 팔과 다리도 잘려나갔다. 대체 누굴까? 어떤 원통함이 있어 죽어서까지 뼈만 앙상한 벌거벗은 몸으로 지하에 잠들기를 거부하고 있을까?
안내문을 읽어보니 유골은 리마솔 성채가 아니라, 니코시아 성벽에서 발견되었다 한다. 키프로스를 둘러싸고 강대국 간에 벌어진 패권싸움의 참상을 상징한다고 판단해 전시하는 것이리라. 치열한 역사의 흔적은 이제 관광객의 눈요기가 되었지만, 여행을 계속할수록 키프로스의 현재가 겉보기와 다르게 전혀 평화롭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이 무명의 기사가 겪었던 비극적 상황이 현재도 여전히 유효함을 금세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