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키프로스편-4)
1570년 9월 9일 운명의 날, 오스만제국의 6만 군대가 니코시아로 진격했다. 그리고 아야소피아에서 야훼를 향해 간절히 구원을 요청하던 대주교와 기독교도들을 몰살하고 마침내 키프로스를 정복했다.
1주일이 지난 9월 15일 이곳에선 이제 알라를 향한 무슬림의 첫 번째 금요일 기도가 열린다. 키프로스 침공을 지휘했던 오스만 제국의 장군도 참석했다. 그렇게 성당은 모스크로 바뀌었다. 현재의 모스크 이름은 20세기 중반에 붙여진 것이다. 키프로스를 병합할 당시 오스만 황제였던 셀레미에가 선택됐다.
어쨌든 키프로스에서 가장 큰 모스크인지라 주변에는 자연스레 시장이 들어섰다. 뷰익한이라는 대규모 여관이 생겼고, 학교도 많아지면서 무슬림의 중심공간이 되었다. 지금도 니코시아 북측에서 인구 유동이 가장 많은 곳이다.
오스만제국의 땅이 된 키프로스에 많은 튀르키예인들이 건너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곧 전체 인구의 1/3을 차지하게 되는데, 분단의 역사는 이때부터 싹이 튼 것이나 다름없다.
1683년 두 번에 걸친 빈 포위 작전의 실패로 서유럽 공략이 좌절되면서 국력이 쇠퇴하게 된 오스만제국은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특히, 영국은 1878년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키프로스를 조차하였고, 1914년에는 오스만제국이 독일과 동맹을 맺으며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아예 키프로스를 합병해버린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25년부터는 대영제국의 해외식민지로 국제적인 공인도 받는다.
이 무렵부터 키프로스 내에서 갈등이 본격화된다. 주민의 대부분인 그리스계는 키프로스를 그리스에 귀속시키자는 ’에노시스(Enosis) 운동‘을 주창하며 영국 제국주의에 저항한다. 1829년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그리스는 이스탄불에서 아나톨리아 고원까지를 잃어버린 영토라 규정하고 수복하겠다는 야심을 대놓고 드러낸 바 있다. 1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실제 이즈미르 등 튀르키예 서부 해안지역을 점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후에 터키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케말 파샤가 1922년 지금의 튀르키예 땅에서 그리스인을 모두 몰아낸다. 그해 연합군은 신생 터키공화국의 탄생을 승인하고 1923년 로잔조약으로 영토를 확정짓는다.
이때 터키는 선택지로 주어진 이스탄불과 에게해의 섬들 중 이스탄불을 가져오는 대신 에게해의 섬들을 그리스에 넘겨준다. 그리고 그리스와 대대적인 인구교환을 실시한다. 즉, 튀르키예 땅에 있던 150만 명의 그리스인들과 그리스 땅에 있던 50만 명의 튀르키예인들을 맞교환한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목도한 키프로스 튀르키예계 주민들은 자신들도 섬에서 쫓겨날까봐 독립을 반대하고 영국의 식민 지배를 지지하는 편에 선다.
1960년 키프로스가 영국에서 독립하자 갈등은 폭발했다. 처음엔 대통령과 총리를 그리스계와 튀르키예계가 분점하는 식으로 아슬아슬한 평화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리스계가 권력분점을 파기하는 헌법 개정을 시도하다가 1963년 무력충돌이 발생한다. 5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자 소수 약자였던 튀르키예계는 키프로스 북쪽에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때 유엔의 개입으로 양측의 충돌을 막기 위해 그린라인이 등장했다. (영국군 장교가 지도 위에 녹색 펜으로 선을 그어 그린라인이라 불린다)
갈등은 점점 극단으로 치달았다. 1974년 그리스 통합파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터키가 튀르키예계 주민 보호를 명분으로 두 차례 침략을 감행한다. 결국 인구의 18%인 튀르키예계가 키프로스 영토의 36%를 차지한 후, 18만 명의 그리스계를 쫓아내고 북키프로스 공화국 수립을 선포한다. 마치 38선이 지금의 휴전선이 된 것처럼, 키프로스의 그린라인은 국경선이 되었다. 하지만 북키프로스 공화국은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승인받지 못한다. (오로지 터키하고만 외교관계를 맺는다)
유엔에서 키프로스 내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은 남측의 키프로스 공화국은 2004년 EU에 가입했고 2008년부턴 유로화를 사용 중이다. 이는 EU에 가입하고픈 터키(2022년 튀르키예 공화국으로 국명이 바뀌었다)에게 키프로스 문제가 최대 걸림돌이 됐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남측 키프로스의 동의 없이는 튀르키예의 EU 가입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자의반 타의반 통일협상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계의 반대로 비록 실패했지만 2004년 남북통일 투표가 이루어졌고, 2008년에는 40년 이상 굳게 버틴 국경장벽도 철거됐다.
그럼에도 통일을 향한 여정은 험난해 보인다.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증오와 불신이 여전하다. 젊은이들은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남측 키프로스인들은 물가가 싼 북니코시아에 가서 점심을 먹고, 북측 키프로스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남니코시아로 출근한다. 그렇게 그리스계와 튀르키예계는 친구로 함께 살던 옛 시절로 돌아가고 있다. 민족과 종교라는 딱지를 걷어내고 상대방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서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이란 게 단지 감정이 아니라 결의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라 했다. 그만큼 사랑도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사랑이 사랑으로만 교환될 때’ 서로 간의 신뢰도 다시 회복될 거라 믿는다.
다시 리드라스 거리의 출입국 관리소를 거쳐 니코시아 남측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아까까지는 보이지 않던 게 눈에 띈다. ‘PEACE(평화)’라는 팻말을 단 벤치다. 누가 만들었고 언제부터 있었는지 물어봐도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종교, 인종, 국적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쉬어가도록 넉넉히 안아주는 작은 공간을 제공한 사람들의 마음씀씀이로부터 키프로스는 어쩌면 이미 통일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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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