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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석 Apr 05. 2023

카멜롯과 아발론을 찾아
캐드베리와 글래스턴베리로

17/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영국 콘월편-5)

   이제 틴타겔을 봤으니, 아서왕이 왕국의 수도로 삼은 카멜롯 성과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 향했던 아발론 섬을 찾을 차례다. 하지만 아쉽게도 동일한 지명은 현실에 없다. 대신, 영국인들이 그 장소로 비정하는 곳이 있으니 바로 캐드베리(Cadbury)와 글래스턴베리(Glastonbury)다. 


   영국 도시 이름에 유난히 베리(bury)라는 접미어가 붙는 경우가 많은데, 독일 도시에 붙는 ‘~부르크(burg)’와 마찬가지로 성벽으로 보호된 마을을 이른다. 비슷하게, 맨체스터(Manchester)나 글로스터(Gloucester)와 같이 ‘cester’가 들어간 이름은 로마군 야영지(castra)를 일컫는다. 어쨌든 bury나 cester 모두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소리다.     


   캐드베리는 런던에서 콘월을 향해 달리자면, 스톤헨지로 유명한 솔즈베리를 지나 만나게 되는 작은 도시다. 행정구역상 북캐드베리와 남캐드베리로 나뉘는데, 남캐드베리에 캐드베리 캐슬이 있다. 


   캐슬은 철기시대 언덕 요새로, 주변보다 흙을 높이 쌓아 올린 둥그런 형태의 편평한 땅을 거주지로 삼고 언덕 아래에 성벽을 둘렀다. 성벽 내부가 8헥타르 정도 되는 꽤 큰 규모인데, 아쉽게도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하나도 없다. 1960년대 고고학자들이 여기서 커다란 연회장과 집터, 대장간터와 신전터 등을 발견하면서 로마시대를 거쳐 앵글로-색슨족의 브리튼섬 이주 이후까지 거주지로 지속되어 왔음을 밝혀냈다.  


   이러한 철기시대 언덕 요새는 영국 남서부 켈트문화권에서는 흔한 유적이다. 그럼에도 이곳을 카멜롯으로 비정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일단 거대한 요새 규모가 강력한 지도자를 시사하고, 발견된 유구들이 아서왕 시대와 제법 맞아떨어진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는 근처에 캠강(River Cam)이 있는데, 카멜롯(Camelot)이 강의 이름에서 나왔다는 추정이다. 실제, 강 주변으로 West Camel, Queen Camel처럼 카멜 명칭이 붙은 마을도 몇 있다.


   하지만 조금 더 뒤져보면, 영국에는 캠강이라 이름 붙은 강이 몇 개 더 있는걸 알 수 있다. 캠브릿지(Cambridge)를 관통하는 강도 캠강이고, 옥스퍼드 서쪽 코츠월드(Cotswolds) 지방에도 캠강이 있다. 그런데 캐드베리 주변에 흐르는 캠강이 아서왕의 무대로 주목받게 된 건 16세기, 시인이었던 존 리랜드(John Leland)의 역할이 컸다. 그는 고대유물에도 관심이 많아 영국 각지를 여행하며 기록을 많이 남겼는데, 서머싯 주의 캠강 기슭에 있는 캐드베리 캐슬이 아서왕의 카멜롯이라는 지역전승을 처음 채록했다고 한다.


   어쨌든 가파른 경사지에 올라서면 숨 멎을 듯한 광활한 뷰가 발아래 펼쳐진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브리스톨을 향해 날아오는 독일 군용기를 탐지하기 위한 서치라이트 진지가 여기에 구축되었다. 초기 단계인 레이더 기술을 대신해 적의 공중공습을 막기 위해 개발된 것이 서치라이트였다. 그만큼 사방이 툭 터진 캐드베리 캐슬이 주변을 통제하기 좋은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는 반증이다. 과거에는 그 지리적 중요성이 더 컸을 테니, 비전문가의 눈으로도 여기가 카멜롯의 막강한 후보지가 될 만한 자격은 충분해 보인다.      


(사진3-18. 캐드베리 캐슬 ©위키피디아)


   그런데 캐드베리에는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펼치는 낭만적인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다. 영국인들의 가슴을 울리는 달달한 감동도 있다. 그것도 영국 곳곳의 슈퍼마켓에서 말이다. 보랏빛 상표로 유명한 캐드베리는 지금 영국의 대표적 초콜릿 브랜드다. 빅토리아 여왕이 좋아해, 지난 200년간 영국 왕실에도 납품되었다고 한다. 버밍엄 남쪽 외곽에 캐드베리의 초기 공장과 근로자들을 위한 마을이 아직 남아있는데, 공장은 지금 <캐드베리 월드>라는 초콜릿 놀이공원이 되었다. 팀 버튼 감독이 여길 방문하고 영감을 받아 만든 영화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직접 초콜릿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궤도차를 타며 초콜릿 요정 마을도 방문한다. 조금 유치했지만, 아이들은 나름 신났던 곳이다. 어트랙션을 지날 때마다 초콜릿을 정말 한웅큼 쥐어주는데, 집에 와서 몇 달을 두고 먹었다.


   캐드베리를 창업한 인물은 존 캐드베리로, 상표도 그의 성을 따른 것이다. 그의 가계를 쫓다 보면, 엑시터 출신인 아버지를 포함해 조상들은 대대로 캐드베리 캐슬이 위치한 잉글랜드 서쪽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의 성도 조상들이 살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아서의 후예든 아니든, 캐드베리는 이제 아이들이 선망하는 또 하나의 카멜롯이 되어 오늘도 전설처럼 그들을 설레게 한다.           

  

(사진3-19. 초콜릿 놀이공원 '캐드베리 월드' ©이경석)


   어느덧 이번 영국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 글래스턴베리로 떠난다. 여행 중에 생전 처음 보는 장소인데도 설명할 수 없지만 특별한 힘이 느껴지는 경우가 가끔 있다. 광활한 평야에 불현듯 우뚝 솟구친 언덕과 그 꼭대기에 세워진 탑 하나가 전부인 글래스턴베리 토르(Glastonbury Tor)와 만났을 때도 그랬다.


   언덕 아래부터 탑까지는 계단이 줄곧 계속되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나무 한 그루 없으니 거리감이나 원근감이 모두 사라지고 어느 순간 탑에 빨려가듯 초현실적 풍경을 걷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침 늦은 오후 해질녘 넘실대는 균질한 황금빛이 주위 모든 사물을 흐물흐물 형해화시키는데, 오로지 귓가에 들리는 바람 소리만이 현실 세계와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느낌이다.


   높이 518m의 꼭대기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걸린다. 주변이 온통 평지인지라 유난히 실제보다 더 높아 보인다. 꼭대기서 보는 파노라믹 뷰는 정말 엄지척이다. 


   꼭대기의 탑은 14세기에 지어진 세인트 마이클 교회(St. Michael’s Church)의 유일한 흔적이다. 이 교회가 지어지기 전에는 오래된 목조 교회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13세기 강력한 지진에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목조 교회가 영국 최초의 교회라 믿는 영국인들이 많다. 아서왕 이야기 속 아리마대의 요셉이 성배를 보관하기 위해 찾아와 세운 교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가 아발론이다. 아서왕이 모드레드와의 전쟁으로 치명상을 입은 후 그의 이부누나인 모건 르 페이(Morgan le Fay)가 인도하는 배를 타고 들어간 곳이 바로 여기라는 얘기다.      


(사진3-20. 글래스턴베리 토르 ©이경석)


   그렇지만 막상 가보면 여긴 섬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곳은 켈트 시대부터 섬이라 불렸다. 왜냐하면 언덕 아래 평지가 원래는 저지대 습지였기 때문이다. 중세 초기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들어와 언덕은 호수 속 섬처럼 보였다고 한다. 언덕에는 사과나무가 많아 사과나무 섬으로 불렸는데, 아발론이란 명칭도 사과라는 뜻의 고대 켈트어 ‘아발(abal)’에서 비롯됐다는 해석도 있다. 그럴듯하다.


   그런데 이 주변이 습지였다는 사실은 또다른 추론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습지 주변의 온도는 보통 낮기 마련인데, 그보다 더 상층부의 더운 공기와 기온이 10도 이상 벌어지게 되면 빛이 심하게 굴절되면서 우리 앞에 보이는 것은 실제보다 더 가깝게 혹은 더 높게 공중에 떠 보이는 착시가 일어난다. 일종의 신기루인데, 이러한 현상을 ‘파타 모르가나(Fata Morgana)’라고 부른다. 2015년 중국 장시성에서는 연무가 짙게 낀 하늘에 거대한 마천루가 생생하게 등장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마치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천공의 성, 라퓨타 혹은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피레네의 성>을 연상케 하는 시각적 충격은 모두 같은 현상 때문이다.


(사진3-21. 좌 : 중국 장시성에서 목격된 파타 모르가나 현상 '허공의 마천루', 우: 르네 마그리트 작 '피레네의 성')


   글래스턴베리 토르도 그러한 현상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췄고, 실제로 허공에 떠 있는 모습도 종종 목격된다고 한다. 현실에 분명 존재하지만 허상으로 보이는 곳! 그러기에 아발론은, 볼 수는 있지만 갈 수 없는 땅으로 묘사되지 않았을까 싶다. 눈치챘겠지만, ‘파타 모르가나’는 아서왕을 아발론섬으로 이끈 마녀, 모건 르 페이의 이름을 이탈리아어로 옮긴 것이다. 글래스턴베리 토르가 아발론 섬으로 변하는 신비한 현상이 모건 르 페이가 부린 마법(신기루)의 영향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이탈리아어일까? 그건 파타 모르가나 현상이 제일 많이 발생하는 곳이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섬 사이의 좁은 메시나해협이기 때문에 이탈리아어로 널리 사용된 까닭이다.             


(사진3-22. 글래스턴베리 토르에서 내려다본 주변 습지대 경관 ©이경석)

  

   12세기에 접어들면서 글래스턴베리 토르가 아발론으로 확실히 공인받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서왕의 무덤이 발견된 것이다.


   토르에서 차로 약 10분 정도 떨어진 글래스턴베리 시내에 지금은 폐허가 된 글래스턴베리 수도원(Glastonbury Abbey)에서다. 수도사들은 당시 국왕, 헨리 2세가 입수한 어떤 정보에 따라 수도원의 특정 지역을 약 5m 가량 팠다고 한다. 곧 땅 속에서 납으로 만들어진 십자가를 발견했는데, 거기엔 다음과 같은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한다.     


‘여기, 아발로니아의 유명한 아서왕이 잠들다’     


   그리고 그 아래 석관에서 키가 큰 남자의 유골과 금발 여자의 뼈가 수습되었다고 한다. 특히 남자의 두개골에선 칼로 베인 깊은 상처도 확인되었다. 이야기 속 아서왕의 사망 사유와 동일했다. 수도사들은 아서왕과 왕비 기네비어의 유골을 제단 아래 석관으로 옮겼고 수도원은 영국 각지에서 오는 순례객들로 인해 소위 핫플이 되었다고 한다. 적어도 1536년까지는 말이다. 헨리 8세가 가톨릭을 버리면서 수도원도 해산을 피하진 못했고, 결국 지금과 같은 폐허가 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 아서왕의 유골은 정말 감쪽같이 사라진다. 일부에서는 유골의 발견부터 실종까지 모든 게 자작극이라고 주장한다. 켈트족이 주류인 스코틀랜드와 웨일즈를 굴복시키려는 당시 잉글랜드 국왕들이 켈트족의 메시아인 아서왕의 전설을 무력화하기 위해 아서왕의 죽음을 공식화했다거나, 혹은 앵글로-색슨족인 잉글랜드 국왕이 아서왕의 정통성을 물려받았다는 점을 대외적으로 천명하기 위한 기만책이었다는 것이다.     


   어찌됐건, 수도원의 중심 제단 아래 아서왕과 기네비어의 유해가 재매장되었던 터는 아직도 푯말과 함께 흔적이나마 남아있다. 수도원이 있던 땅은 널따란 공원이 되었는데, 한눈에 봐도 규모가 어마어마한 성당은 이제 외벽 일부만 확인 가능할 뿐이다. (그나마 수도원에서 별채로 지어진 부엌만이 유일하게 온전히 남아있다) 이 지역 전승은 헨리 8세의 군대가 수도원을 점령하기 전에 켈트족들이 아서왕의 유해와 성배를 웨일즈로 안전하게 빼돌렸다고 전한다. 이로써 아서왕은 다시 전설로 돌아갔다. 


   하지만 허물어진 성당의 비어있는 아서왕 무덤에서 갈 곳을 잃은 나는 십자군 전쟁 직후 템플기사단을 쫓아 키프로스섬에서부터 성배 추적을 다시 계속해 보려 한다.              


(사진3-23. 좌: 글래스턴베리 수도원 폐허 유적, 우: 수도원 한켠의 아서왕 무덤이 발견된 자리 표지판 ©이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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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

(영국지도 ©https://us-atlas.com/england-map.html)




[사진출처]

사진3-18좌 : By Joe D, modified by JimChampion - File:050326_073_somerset_cadbury_castle.jpg, CC BY-SA 2.5,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358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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