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영국 콘월편-4)
잠이 깼다. 어느새 항해가 멈춘 듯 파도소리가 잠잠하다. 대신, 온 몸을 던져 저 거친 바다를 구슬피 울리는 빗소리의 여운이 귓가에 뭉근하다. 여긴 어딜까? 눈을 뜨고도 잠시 망설여진다. 저 문 너머 안개 낀 언덕 어딘가 숨죽인 켈트 기사들이 자신들의 땅을 침범한 우리를 향해 뛰쳐나올 것만 같다. 조심히 방주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어본다. 동은 텄지만, 어둠이 얼룩처럼 붙은 세상은 여전히 무겁다. 하지만 가슴에 신선한 공기를 한가득 채우자 정신이 번쩍 든다. 꿈을 꾸고 있었나 보다. 긴장이 풀리자 때마침 날씨도 갠다.
틴타겔 캐슬이 가까워오자 다시 몰려오는 긴장감이 설렌다. 아기자기한 틴타겔 마을에 차를 주차하고 이정표를 따라 캐슬 쪽으로 걷는다. 좁은 오솔길을 따라 급한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캐슬 입구까지 랜드로버 서비스가 있지만, 그냥 걷기로 했다. 비싼 가격도 그렇지만, 정말 가고 싶은 곳일수록 차를 타고 덜컥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괜한 고집 탓이다. 감흥은 뜸을 들일수록 커지고, 그 과정을 내 눈으로, 냄새로, 소리로, 다리로 기억할수록 온전히 나만의 특별한 ‘장소’가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쉽게 얻으면 쉽게 나간다는 옛말은 여행에도 적용되는 진리다.
그런데 날씨가 너무 험악해진다. 검은 먹구름이 빠르게 몰려오더니 기어이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여행의 절반은 날씨가 좌우한다지만,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틴타겔의 신비로움과 잘 어울린다. 오솔길이 끝날 무렵, 절벽 건너 바다 쪽으로 돌출된 거대한 바위산을 대면한다. 바위산 꼭대기가 틴타겔 캐슬이다.
바위산은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고는 하나, 절벽끼리 마주 보는 모양새로 사실상 섬이다. 천혜의 요새다. 절벽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걷다 보면 육지와 바위산을 잇는 목조다리가 나온다. 비바람이 거세면 폐쇄가 되기도 한다는데, 다행히 오늘은 열렸다. 바위산으로 건너가서도 가파른 절벽 따라 바위를 쪼아 만든 돌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한다. 바람에 눈을 뜨기조차 힘든데, 집채만한 파도들이 바위산을 포위하고 삼킬 듯 포효한다. 온몸을 감싼 완벽한 서라운드뷰와 3차원 입체음향에 반쯤 털린 영혼을 간신히 부여잡고 어렵사리 정상부에 다다랐다. 캐슬 입구가 나오고, 성벽의 흔적도 보인다.
막상 입구로 들어서자 캐슬 부지 안에는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 지형을 따라 건물들이 있을 법한 자리에 초석처럼 보이는 돌무더기가 있지만, 상상력으로 극복하기엔 폐허의 정도가 극심하다. 그래서 캐슬의 흔적을 찾겠다는 생각을 아예 단념하고, 오롯이 이곳의 압도적인 분위기를 즐기기로 했다.
그렇게 아무런 기대 없이 둘러보다가 안개 자욱한 산 정상에서 홀연히 아서왕을 만났다. 왕관을 쓰고 망토를 두른 채 땅에 내리꽂은 엑스칼리버에 두 손을 모으고 선 모습엔 기품과 비장함이 서려 있다. 비록 청동 조각상이지만, 주변의 범상치 않은 자연환경 속에서 틴타겔 캐슬을 묵직한 아우라로 감싸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틴타겔이 아서왕의 탄생지로 전해지게 된 것은 12세기 제프리라는 역사학자의 <영국 왕들의 역사>라는 책에 기인하고 있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은 틴타겔 캐슬이 13세기에 처음 세워졌다고 보는데, 당시 콘월 백작이 캐슬을 축성하며 제프리의 저술을 바탕으로 아서왕이 사용했을 법한 오래된 스타일로 꾸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틴타겔과 아서왕의 연관 관계가 빈약하다는 주장이다. 제프리의 저작물도 역사에 상상력을 버무린 문학작품으로 평가절하되는 상황이다. 이런 탓에, 틴타겔 캐슬을 관리하는 잉글리시 해리티지 재단이 아서왕의 청동 조각상을 세울 당시 입증되지 않은 신화를 역사화한다며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현재의 틴타겔이 아서왕 탄생지가 맞는지를 따지는 게 그리 중요할까 싶다. 여행자조차도 그걸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사람들이 전설이나 신화에 열광하는 건 구스타프 융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 자신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미움, 불안함, 분노, 공포, 쾌락 등의 감정과 자신이 겪는 어려움, 사회적 환경에 반응하는 이기적 행동이 자신도 모르게 인류 보편적인 원형을 따르고 있다는 (쉽게 말하자면, 신이나 영웅도 나와 똑같이 짜증내고 거짓말하고 고뇌한다는) 점을 확인받고자 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신화는 고도의 상징을 통해 인류가 오래 쌓아온 다양한 경험과 기억을 각 개인들이 공유하도록 하는 집단 무의식의 장치인 셈이다. 그렇기에 신화는 생뚱맞고, 충동적이고, 낯뜨겁고, 변덕스럽기 그지없다. 왜냐면 그게 영웅들도 비켜 갈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이고 삶이니까.
하지만 중세 이래로 종교나 합목적적인 이성 중심의 교육은 하나의 선(善)을 모두에게 강요해왔다. 그 결과, 너무나도 인간적인 감정과 본능은 죄악시되고 억압당하며, 심지어는 그 본성 때문에 모두 죄인이 되어야 했다. 자신의 욕구와 사회적 요구 사이의 괴리에서 인간들은 뒤틀리고, 고독해지고,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신화는 그래서 이 첨단과학 시대에 아직 건재하는지도 모른다. 니체의 말마따나, 신화가 사라지면 모든 문화는 건강하고 창조적인 잠재력을 상실할 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잠재의식 속에 신화로부터 위로받으며 버티는 건 아닌지, 그래서 명성에 비해 보잘것없는 틴타겔 캐슬이 잉글리시 해리티지가 관리하는 400여 개 유산 중 여전히 인기 많은 상위 다섯 곳에 들어가는 건 아닌지 잠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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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