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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석 Apr 03. 2023

거친 날 것 그대로의 콘월

 15/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영국 콘월편-3)

   스타우어헤드를 떠나 콘월로 들어섰다. 끊김없이 세계 최장 95m의 아름다운 볼트형 천장(아치구조를 한 방향으로 길게 연장한 반원형 형태의 천장)을 가진 엑시터 대성당이 있는 데본셔주의 엑시터와 미국 이민자들을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출항했던 플리머스를 거쳐 드디어 그레이트 브리튼섬의 가장 남쪽 땅끝(랜즈엔드 Land’s End)까지 왔다. 


   바람이 세차다. 우리가 국토대장정을 하듯, 영국 젊은이들도 국토종단을 하는데 그 출발점 혹은 도착점이 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여기서 스코틀랜드 가장 최북단 마을, 존오그로츠(John o’Groats)까지 약 1,900킬로미터에 이르는 일명 ‘조글(JOGLE)’ 순례길이다. 콘월에 오기 일 년 전, 스코틀랜드를 종주하면서 존오그로츠와 오크니섬까지 다녀왔으니, 이제 나도 영국 종주를 완료한 셈이다.      

        

(사진3-11. 좌: 남쪽 땅끝 '랜즈엔드', 우: 순례길의 북쪽끝 '존오그로츠' ©이경석)


   여기서 보이는 영국해협 맞은편이 프랑스의 브르타뉴(Bretagne) 지방이다. 켈트족의 또다른 거점이다. 영어로는 브리타니(Brittany)라 한다. 영국이 있는 섬의 이름이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이니, 지명에서도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다. 


   기원전 4세기, 피테아스라는 그리스의 탐험가가 여기 사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최초로 남겼는데, ‘몸에 문신을 새긴 사람’이란 뜻의 ‘프레타니카이’였다. 이게 로마시대엔 브리타니아(Bretania)라는 라틴어로 바뀐 것이다. 대륙의 켈트족들은 기원전 6세기쯤 현재의 영국으로 건너왔는데, 첫 정착지가 브르타뉴에서 가장 가까운 콘월이었을 것이다. 구릉지가 많은 지형도 비슷하고 리아시스식 해안도 익숙하니 정착에 큰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 증거가 땅끝에서 얼마 멀지 않은 성마이클 언덕(St. Michael’s Mount)이다. 프랑스어로 옮기면 몽생미셸(Le Mont-Saint-Michel)이다. 그런데 이름만 같은 게 아니다. 해안가 언저리 봉긋 솟은 언덕을 이고 있는 섬 모양도 판박이다. 그리고 섬의 꼭대기에 규모는 몽생미셸보다 작지만, 대천사장 미카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한 것도 똑같다. 두 섬 모두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밀물 때면 섬이 되고, 썰물에는 육지와 연결된다. 하지만 프랑스의 몽생미셸은 다리가 놓이면서 언제고 출입이 가능해졌지만, 영국의 성마이클 언덕은 아직도 썰물 시간을 잘 맞춰야 건너갈 수 있다.

              

(사진3-12. 위 : 영국의 성마이클 언덕, 아래 : 프랑스의 몽생미셸 ©이경석)

         

   영국해협의 바다가 얼마나 다이내믹한지 온몸으로 느껴본 적 있다. 몽생미셸은 언제나 나의 여행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지만, 인연이 쉽게 닿진 않았다. 1997년 두 번째 시도도 마찬가지였다. 파리에서 몽생미셸까지는 TGV를 타고 헨느(Rennes)에서 갈아타는데, 지금은 편수가 많아 당일치기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당시엔 오지나 다름없었다. 그날도 아침에 조금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내 운은 딱 헨느까지였다. (몽생미셸은 무려 20년이 지난 2017년에야 버킷리스트에서 지워졌다) 


  대신, 일정을 급변경하여 근처 생말로(St. Malo)로 향했다. 영국해협을 낀 멋진 중세 도시다. 도시 구경을 하고는 해수욕 인파로 가득한 해변에 갔다. 도시를 둘러싼 높다란 성벽 아래 널따란 백사장을 걷다가 도시 방어용으로 해변 갯바위 위에 건립된 조그만 17세기 요새를 발견했다. 요새는 닫혀있었지만, 바위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며 잠시 망중한을 즐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뭔가 이상했다. 곧바로 불길한 직감의 원인을 알아냈다. 너무 조용했던 것이다. 부리나케 일어나 육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 믿고 싶지 않았다. 넓었던 백사장은 성벽 밑 일부를 제외하고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불과 1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일단 두 손으로 가방을 번쩍 들어 올리고, 물속으로 조심히 들어갔다. 다행히 발이 바닥에 닿았고, 수심은 가슴 정도였다. 성벽까지 약 300m. 밀물이 더 몰려오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성벽 위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보내준 응원의 박수를 받으며 다행히 탈출에 성공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쫄깃해진다. 나중에 보니 지구상에서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큰 곳 중 하나였다. 우리나라 시화발전소가 세워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였던 항스 조력발전소도 가까이 있다.


(사진3-13. 우측 생말로 성벽도시와 좌측 해변 갯바위의 성채 ©Kasia Strek, New York Times)


   연근해에 위치해 하루에 두 번 육지와 섬이 번갈아 되는 특별한 장소는 육지를 방어하거나 공격하려는 자들에겐 매우 중요한 전략적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성마이클 언덕도 분명 해양에서 건너온 세력과 육지의 거주민들 간의 충돌지점이었던 게 틀림없다. 아서왕 이야기에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에 따르면 성마이클 언덕의 동굴에 키가 5m가 넘는 식인거인 ‘코모란(Cormoran, 코니쉬 말로 바다의 거인이란 뜻)’이 살았다고 한다. 거인은 바다 너머 마을로 종종 건너와 아이들과 가축들을 잡아먹었는데, 아서왕이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전설은 18세기에 ‘잭 더 자이언트 킬러(Jack the Giant Killer)’라는 동화로 만들어지면서 아서왕 대신 잭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우리에겐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2013년 작 동명 영화로 더 익숙할 것 같다) 


   실제로 섬 꼭대기에 있는 수도원(지금은 한 남작 가문의 저택으로 바뀌었다)에 올라가다 보면, ‘거인의 우물’이라는 걸 볼 수 있다. 더 올라가면 ‘거인의 심장’이라는 표지판도 보이는데, 처음엔 도대체 심장이 어디에 있다는 건지 주변을 서성거리게 만든다. 보다 못한 한 영국인이 길바닥에 박힌 돌 하나를 조용히 가르쳐준다. 하트모양이다. 처음엔 아재개그를 들은 듯 허탈했지만, 이렇게라도 거인에 대한 전설을 간직한 섬으로 남고픈 마음을 너그럽게 이해하기로 했다.


(사진3-14. 좌: 성마이클 언덕의 거인의 우물, 우: 거인의 심장 ©이경석)


   한참 둘러보는데 섬을 관리하는 내셔널 트러스트 직원들이 30분 후 밀물이 닥친다며 빨리 육지로 건너갈 것을 재촉한다. 아쉽지만 발걸음을 옮긴다. 지금까지 콘월반도 남쪽 해안을 훑으며 땅끝을 찍었으니, 이제부턴 반도 북쪽 해안을 따라 올라간다. 마침 틴타겔 캐슬도 북쪽 해안에 있으니 다음날 이동시간을 절약할 겸 가급적 근처 마을에서 숙박할 요량이다. 하지만 워낙 인기가 많은 틴타겔 마을의 유스호스텔은 한 달 전부터 예약이 꽉 찼고, 조금 북측에 보스캐슬(Boscastle)이란 마을에서 어렵사리 방을 구했다.     


   그런데 북쪽 해안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이끼와 잡목으로 뒤덮인 절벽 아래로 세찬 파도가 포말을 일으키며 성난 듯 덤벼들고 있었다. 폭풍 같은 바람과 한 번씩 세차게 쏟아지는 빗방울은 거친 날 것 그대로의 원초적인 콘월을 제대로 보여준다. 그런데 절벽 위에 특이한 게 눈에 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우비를 입은 후 조심스레 절벽 가까이 다가섰다. 마치 영화 속 흉가 세트장처럼 커다란 공장 건물들이 군데군데 위태롭게 서 있다. 지금은 가동되지 않아 돌로 된 외관만 남았는데, 을씨년스러우면서도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생뚱한 분위기가 묘하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홀린 듯 빠져든다. 이런 척박한 땅에, 그것도 절벽 가까이 긴 굴뚝을 세운 공장들이라니! 


   그러나 이 지역은 한때 전 세계 구리의 2/3를 생산하던 곳이었다. 19세기 초 산업혁명으로 증기기관이 채광산업에 응용된 결과였다. 그러나 19세기 말 구리 가격이 폭락하면서 콘월의 광산들은 문을 닫았고, 광부들은 흩어졌다. 40년간 25만 명이 신대륙이나 호주, 남아공 등으로 이주했는데, 앞선 채광기계와 선진기술도 함께 퍼져갔다. 당시 전 세계 모든 탄광에 코니쉬 광부가 적어도 한 명은 일했을 거란 우스갯소리도 있었으니, 채광산업의 세계화는 일찍이 콘월에서 시작되었다. 유네스코는 그러한 세계사적 의미를 인정해 콘월 인근에 산재한 10곳의 광산경관을 2006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콘월 해안의 광산경관은 이제 콘월의 상징이 되었다.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트렉킹을 겸해 꽤 볼만한 곳이다. (콘월의 유명한 관광지이자 지구 최대의 온실인 에덴프로젝트도 폐광된 고령토 광산이었다. 건축가 니콜라스 그림쇼가 설계한 투명 플라스틱 돔이 초록빛 생명을 터질 듯 채우고 비눗방울처럼 살포시 땅에 내려앉은 모습은 보기만 해도 경이롭다. 특히나 아이들이 좋아했던 곳이다.)             


(사진3-15. 위 : 콘월의 광산경관, 아래 : 에덴프로젝트 ©이경석)


   참고로 지구 곳곳으로 이주한 코니쉬 광부들을 ‘Cousin Jacks’라 부르는데, 여행 중에 가끔 길거리 간판에서 보곤 한다. 레스토랑이라면, 콘월 전통의 코니쉬 패이스티(만두처럼 파이 안에 다진 고기와 야채를 듬뿍 넣어 만든 코니쉬 광부들의 간단한 식사였으며 지금은 영국의 대표적인 음식 중 하나)나 부드럽고 풍부한 맛이 일품인 코니쉬 클로티드 크림을 잔뜩 바른 스콘을 애프터눈 티와 함께 먹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많고 많은 이름 중에 잭(Jack)이 계속 등장할까? 이는 잭이 보통 특정할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치자면, 아무개 씨인 셈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말 런던 이스트엔드 지역에서 최소 5명의 매춘부를 잔인하게 연쇄 살해한 범인도 잭이었다. 정교하게 장기 일부가 훼손되고, 주변에는 당시 비쌌던 포도를 먹은 흔적이 발견되면서 귀족 출신 외과의사의 소행일 거란 추측만 있었을 뿐,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으면서 일명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 살인마 잭)’ 사건으로 불린다. 앞서 ‘잭 더 자이언트 킬러’나 ‘잭과 콩나무’ 같은 이야기 속 주인공인 잭도 마찬가지다. 


   잭은 제임스(James)의 애칭이기도하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 왕인 제임스 1세가 통합 왕국을 상징하는 깃발을 만들자 영국 함선들이 뱃머리에 달고 바다를 누볐다. 그때부터 국기를 거는 뱃머리의 작은 기둥을 ‘제임스의 기둥(Jackstaff)’이라 했는데, 기둥에 걸린 깃발을 점차 잭이라 부르면서, 영국 국기가 ‘유니언잭(Union Jack)’이 된다. 이래저래 잭은 영국에서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이름이다.      


   어둑해질 무렵, 드디어 보스캐슬에 도착했다. 저녁에만 무료인 공용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유스호스텔까지 걸어가는데, 깜놀했다. 한 면이 바다에 잠겨있는 건물이라니! 조그만 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 가장 끝부분에 자리 잡은 탓에 만조가 되면 건물은 조그만 방주가 되었다. 덕분에 밤새 파도치는 소리를 자장가 마냥 들으며 창문 밖으로 쏟아지는 별을 헤다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아서왕을 만나러 가기 전에 이보다 더 마법같이 멋진 곳이 또 있을까!     


(사진3-16. 오른편 건물이 보스캐슬 유스호스텔(아침 썰물에 촬영) ©이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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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

(영국지도 ©https://us-atlas.com/england-map.html)



[사진출처]

사진3-13 : 36 Hours in Rennes and St.-Malo - The New York Times (ny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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