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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석 Mar 31. 2023

아서왕의 탄생지, 틴타겔 가는 길

14/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영국 콘월편-2)

   아서왕 이야기에서 나오는 지명 중 실제로 존재하는 유일한 곳이 이름도 예쁜 틴타겔(Tintagel)이다. 아서왕 탄생지로 알려진 틴타겔은 영국 콘월 지방에 있다. 이번 영국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이기도 하다.


   콘월은 브린튼섬의 남서쪽에 툭 튀어나온 반도다. 영국인들이 꼽는 최고의 휴양지인데, 분위기 독특하고 볼 것 많은 특이한 동네다. 잉글랜드에 속하지만 주민 상당수는 켈트족 혈통을 지녔고, 스스로를 영국인(British 또는 English)이 아닌 코니쉬(Cornish)라 부를 정도로 정체성이 강하다. 따라서 아일랜드와 웨일스, 스코틀랜드, 맨섬(브리튼섬과 아일랜드섬 중간에 위치한 영국여왕 직할 자치령), 프랑스의 브르타뉴와 함께 켈트족이 주류인 여섯 지역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된다. BC 1세기 카이사르가 브리튼섬을 정복한 이후에도 콘월은 당분간 로마의 지배에서 빗겨 있었다. 덕분에 그들 고유의 전통이 상당히 남아있다. 


   아서왕과 같은 켈트족 전설도 마찬가지다.     


   영국에 잠시 살았었다. 쏜살같은 시간이 아쉬워 주말에는 영국 각지로 1박 2일 여행을 하곤 했다. 그러다 메이데이 연휴를 맞아 2박 3일의 꽤 여유 있는 일정이 가능해지자 고민 없이 콘월로 향했다. 우리 가족이 살던 셰필드는 잉글랜드의 거의 정중앙이라 교통이 사통팔달인데도 콘월 초입까지 쉬지 않고 다섯 시간 이상을 운전해야 했다. 멀긴 멀다.      


   중간 기착지로 영화 <오만과 편견>의 촬영지이자 대표적인 영국의 풍경식 정원, 스타우어헤드(Stourhead)에 들렀다. 주차장에 내려 몇 발짝 걷지도 않았는데 컴퓨터 바탕화면에서나 봤을 법한 광경이 비몽사몽 아직 부팅 중인 눈에 사정없이 꽂힌다.


   차분한 호수 주변에 팔라디안 양식의 건축물 몇 개만 살포시 얹었을 뿐인데 보면 볼수록 과몰입된다. 호수 둘레길도 일부러 구불구불 만들어놓아 매 순간 시각적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데, 정적인 풍경에 동적인 움직임을 가미함으로써 바로크적 공간감과 입체파적 감흥을 동시에 일으킨다. 원래부터 고고하게 존재해온 듯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방문자의 시선 처리나 계절의 변화를 감안한 수목 식재 하나하나가 철저하게 의도된 풍경이다. 18세기 영국의 부호 헨리 호어 2세가 프랑스 화가, 클로드 로랭이 그린 풍경화 <아이네이아스가 있는 델로스 섬의 풍경>에 영감을 받아 디자인했다고 한다.


   풍경에 시간과 움직임의 개념을 도입하고 인간을 풍경의 일부 혹은 풍경의 주체로 만드는 단순하지만 기가 막힌 디자인 기법은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비록 계산된 아름다움이지만 개개인의 주관적인 감성을 고려했다는 점에서 스타우어헤드는 꽤 현대적인 감각까지 품고 있다.      

        

(사진3-3. 위 : 스타우어헤드 ©이경석, 아래 : 클로드 로랭 작, <아이네이아스가 있는 델로스 섬의 풍경>, 런던 내셔널갤러리)


   맘 같아선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얼른 움직여야 한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따로 있어서다. 스타우어헤드의 영지 안에 있지만, 입구에서 북서쪽으로 약 5km 떨어진 외딴곳에 서 있는 탑이 목적지다. 정식 명칭은 ‘알프레드 대왕의 탑(King Alfred’s Tower)‘이다.


   알프레드 대왕은 영국에서 유일하게 대왕이란 칭호를 받은 9세기 후반의 실존 인물이다. 그는 통일이 되기 전, 앵글로-색슨의 7개 왕국 중 하나였던 웨섹스의 왕이었다. 그는 앵글로-색슨 연합군 창설을 주도해 바이킹을 물리치고 평화 시대를 열었다. 또한, 옥스퍼드 대학 설립을 추진하고 각종 문헌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등 문화적 기반 위에 잉글랜드의 민족적 주체성을 확립했다고 평가된다. 당연히 잉글랜드의 국부로 대접받는다.


(사진3-4. 영국 윈체스터에 소재한 알프레드 대왕의 동상 ©이경석)


   진한 붉은색 벽돌로 쌓은 49미터 탑은 특이하게 삼각형 단면이다. 3면 중 하나에 대왕의 조각상이 놓인 고딕식 아치가 입구 역할을 한다. 내부는 지붕까지 뻥 뚫려 있어, 마치 거대한 우물같다. 삼각형의 꼭지점에는 각각 둥근 원통이 지붕까지 이어졌는데, 탑을 구조적으로 지탱하는 코어 역할을 한다. 원통 하나에는 나선계단이 숨겨져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갈 수 있다. 정말 좁다. 하지만 지붕에 올라가면 저 멀리 스톤헨지가 있는 솔즈베리 평원까지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원통은 환기구다. 기압차를 이용해 상층 공기를 아래로 끌어들여 자연스레 바람을 순환시킨다. 일종의 패시브 설계방식이다.


   탑은 스타우어헤드를 기획 설계한 헨리 호어가 1772년 만들었다. 탑에 대왕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바로 이 장소가 알프레드 대왕이 바이킹과의 일전을 위해 여러 왕국으로 나눠진 앵글로 색슨의 기사들을 소집했던 장소(일명 Egbert’s Stone)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일종의 기념비인 셈이다.


   결국 알프레드 대왕을 중심으로 뭉친 앵글로-색슨족이 승리하면서 통일 잉글랜드 왕국의 초석을 놓았다. 어째 줄거리가 익숙하다. 아서왕의 이야기와 대체적인 플롯이 비슷한 것을 보니, 잉글랜드 통일 과정이 아서왕 이야기에 투영됐을 수도 있겠다 싶다. 실제로 알프레드 대왕이 아서왕의 모델이라는 견해도 있다.      


(사진3-5. 알프레드 대왕의 탑 외관과 내부 ©이경석)

 

   알프레드 대왕과 아서왕을 영국 남부, 윈체스터(Wincester)라는 소도시에서 다시 한번 동시에 만날 수 있다. 일부에서 카멜롯의 실제 지명이라 주장하는 윈체스터는 통일 전 웨섹스 왕국의 수도였고 런던 이전에 통일 잉글랜드의 수도이기도 했다.


   윈체스터 구시가 중심에 자리한 대성당에는 3차 십자군에 참여했던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대관식이 열렸고, <오만과 편견>의 작가 제인 오스틴의 무덤도 있다. 무엇보다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처럼 웨섹스 왕국의 역대 왕들이 잠든 로열교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에 알프레드 대왕의 무덤만 없다. 그도 원래는 대성당에 묻혔으나 12세기에 윈체스터 캐슬 바깥의 하이드 수도원(Hyde Abbey)이라는 곳으로 이장되었다. 하지만 영국성공회를 일으킨 헨리 8세의 명에 따라 1539년 수도원이 갑작스레 폐쇄되면서 무덤의 존재도 잊혀진다. 250년 후 지방정부가 수도원 토지를 매입해 교도소를 건립키로 하고 죄수들을 공사에 동원했을 때 많은 무덤이 발굴됐다고 한다. 하지만 죄수들은 유골들을 함부로 다루었고, 관은 모두 파괴되었다고 전한다. 알프레드 대왕의 무덤도 그 중에 있었을 거라 추정된다.


(사진3-6. 위 : 윈체스터 대성당, 아래좌 : 제인오스틴 무덤, 아래우 : 성가대석 아치 하부의 웨섹스 왕들의 6개 관 ©이경석)


   현재 수도원 자리는 주택가로 변했다. 오로지 알프레드나 하이드라는 명칭이 들어간 거리명만이 이곳이 과거 대왕의 가족무덤과 그를 기리는 수도원이 있던 터라는  말해줄 뿐이다. (그 주택가 아래 아직도 대왕이 잠들어 있을 수도 있다. 혹시 모른다. 영화 <더 로스트 킹>에도 나오지만, 2012년 어느날 갑자기 레스터시티 공용주차장 바닥에서 리처드3세의 잊혀진 무덤을 찾아냈던 처럼 정말 우연히 발견될 지도!) 죽음 직전, 요정들의 섬인 아발론에 들어간 아서왕처럼 그도 전설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죽음의 과정마저 닮은 두 사람의 싱크로율에 전율이 느껴진다.      


(사진3-7. 왼쪽부터 하이드수도원의 일부 잔존 구조물인 하이드게이트, 여기 어딘가가 알프레드대왕의 매장지임을 알려주는 표지판, 알프레드대왕이 들어간 거리명과 주택가 ©이경석) 
(사진3-8. 수도원 제단 및 그 아래 3개의 무덤(왕비-알프레드 대왕-대왕의 장남)의 추정 위치를 보여주는 유리 표지판 ©이경석)

   아서왕의 흔적은 윈체스터 대성당 서쪽, 그레이트홀에 남아있다. 홀은 오래전 파괴된 윈체스터 캐슬의 일부다. 여기에 아서왕의 원탁이 있다.


   비록 13세기 말 에드워드 1세가 재현한 것이지만, 아서왕에 대한 영국인들의 오랜 흠모의 역사를 증언하는 유물이다. 영국산 오크나무로 된 지름 5.5m, 무게만 1.2톤이 되는 원탁에는 13명의 자리가 표시되어 있다. 원래 아서왕 전설 속 원탁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기사들의 서열을 없애기 위해 마법사 멀린이 만들었는데, 자리의 주인이 가까이 오면 저절로 이름이 새겨졌다고 한다.


   윈체스터의 원탁에는 특이하게도 아서왕의 자리에 이름과 함께 그림이 있다. 여기서 아서왕은 오른손엔 엑스칼리버, 왼손에는 기독교 세계의 수장을 나타내는 보물(일명 Sovereign's Orb)을 들고 있다. 보물은 둥그런 황금공 위에 십자가가 붙은 형태다. 그런데 십자가 모양이 놀랍게도 템플기사단의 크로아 파테다. 에드워드 1세가 왕위에 있던 시기는 템플기사단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기간과 겹치지만, 원탁에 그림을 그려넣은 건 16세기 헨리 8세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원탁 한가운데 그려진 빨간색 장미 안의 하얀장미(일명 튜더장미)도 그렇고 아서왕의 복장도 모두 튜더시대의 것이다. 


   14세기에 갑자기 몰락한 템플기사단의 상징이 왜 200년 후 여기 있을까? 아마도 성배 수호자를 연결고리로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을 템플기사단과 동일시했던 게 아닐까 싶다. 크로아 파테는 시간을 뛰어넘어 그 상징으로 자리 잡았을 테고!         


(사진3-9. 그레이트홀에 걸린 아서왕의 원탁 ©이경석)


   크로아 파테가 아서왕의 그림에 그려진 것이 그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는 증거는 또 있다. 바로 영국 왕실의 왕관이다. 런던에 있는 런던탑의 중심건물인 화이트타워 뒤편 왕실 보물 전시관에서 만날 수 있다. 대관식용 세인트 에드워드 왕관(St. Edward’s Crown)과 대관식 후 처음 바깥에 나설 때 쓰는 제국 왕관(Imperial State Crown)이 대표적이다.


   무게가 2.2kg나 되는 세인트 에드워드 왕관은 444개의 보석, 제국 왕관은 다이아몬드만 3천여 개가 사용되어 화려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둘 다 크로아 파테가 왕관 꼭대기에 장식되어 있다. 특히 세인트 에드워드 왕관은 11세기 처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나 청교도 혁명 당시 올리버 크롬웰이 녹여버린 것을, 다시 왕정이 복고된 1661년 찰스 2세의 대관식을 위해 복원한 역사 깊은 보물이다. 꼭대기의 크로아 파테 외에도 왕관을 빙 둘러가며 각 4개씩의 크로아 파테와 백합문양(fleurs-de-lis)이 번갈아가며 디자인되어 있다. 영국 왕관에 뜬금없는 프랑스 백합문양이라니?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만일 크로아 파테를 성배 수호자의 상징물로 본다면 백합문양도 성배와 연관시킬 수 있다. 백합문양이 프랑스 왕가의 문장이기 이전에 막달라 마리아 혹은 그녀가 품은 성배를 상징한다는 주장을 대입하면 영국 왕이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성배와 성배의 수호자가 된다는 왕관의 의미가 보다 명확해진다. 


   확실한 건 크로아 파테 앞에서 역대 영국 왕들이 선서를 하고 왕권을 부여받았다는 점이다. 전설의 인물이지만, 아서왕에게서 왕권의 정통성을 찾는 영국 왕실은 성배의 수호자 임무도 당연히 물려받았다 여겼다. 대관식과 영국 왕실의 왕관은 그걸 보여주는 작은 흔적일 지도 모른다.      


(사진3-10. 좌: 세인트 에드워드 왕관, 우: 제국 왕관 ©위키피디아)

   

  다시 알프레드 대왕의 탑을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이런 특이한 모양을 예전에 본 적 있다. 어릴 적, 제일 좋아했던 애니메이션 <미래소년 코난>에는 핵전쟁 후 살아남은 자들이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룬 하이하바섬과 탐욕이 가득찬 도시, 인더스트리아가 나온다. 그런데 인더스트리아의 한복판에 기계문명을 과시하던 높다란 건축물이 있는데, 알프레드 대왕의 탑과 모양이나 구조가 거의 흡사하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실제 알프레드 대왕의 탑을 방문했는지 모르겠지만, 애니메이션 곳곳에는 아서왕의 이야기가 많이 차용된다. 지구 종말의 날, 핵전쟁이 벌어진 지구를 탈출하려다 실패하고 불시착하는 12명의 생존자들이 나오고, 곧 그들 사이에서 인류를 구할 열세 번째 영웅, 코난이 태어난다. 선한 심성을 가진 열세 번째 원탁의 기사, 갤러헤드가 모험을 떠나 결국 성배를 얻었듯, 코난도 고향을 떠나 인더스트리아로 간다. 거기서 수수께끼 인물, 라오박사를 만난다. 박사는 12명의 과학자로 구성된(심지어 그들도 원탁에 앉아 만장일치로 의사결정을 한다!) 인더스트리아 위원회의 일원이자, 태양에너지원을 다룰 줄 아는 유일한 인류다. 마치 아서왕이 엑스칼리버를 휘두르듯, 박사는 코난의 도움을 받아 태양에너지를 사용해 지구의 평화를 위협하던 세력과 싸워 승리한다. 하지만 비극적 죽음을 앞두고 아발론섬으로 떠난 아서왕처럼, 박사는 침몰하는 인더스트리아와 함께 바닷속에 가라앉는다. 코난은 그 여파로 새롭게 떠오른 섬을 향해 떠난다. 곁에는 이야기 내내 찾아 헤매고 보호하던 성배, 라오박사의 손녀인 라나가 함께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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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

(영국지도 ©https://us-atlas.com/england-map.html)




[사진출처]

사진3-10좌 : By Firebrace - Own work,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16459012

사진3-10우 : By Cyril Davenport (1848 – 1941) - G. Younghusband; C. Davenport (1919). The Crown Jewels of England. London: Cassell &amp; Co. p. 6. (See also The Jewel House (1921) frontispiece.),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762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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