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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착한여성들 Mar 19. 2023

거울식

'이상'에 대하여

   

 거울식이라는 말을 들어 봤는가. 거울은 말 그대로 거울이고, 식은 먹을 식食을 써서 먹고 싶은 사람, 쉽게 말해서 이상형이라는 뜻의 성 소수자 은어다. 즉, 거울에 보이는 나와 닮은 사람이 식 된다는 말이 거울식. 

 나는 거울식을 가지고 있다. 머리가 짧고 안경을 쓴 사람이 식인데, 취향대로 입고 다니다보니 나를 닮은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오늘은 거울식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번 해 보려고 한다.


 레즈비언 소개팅 어플리케이션 중에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좋아요’를 누르는 방식의 어플리케이션이 있다. 나는 그 어플리케이션을 자주 이용한다. 한때는 친구들을 만나면 그 어플리케이션을 켠 뒤 함께 사람들의 얼굴을 구경하는 취미도 있었다. 

 하루는 집에서 레즈비언 어플을 돌리다가 식 되는 사람을 만났다. 운이 좋게도 나는 그 사람과 매칭이 되었다. 세상에 이렇게 식 되는 사람이 있다니……. 나는 그 사람을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와 오프 날짜를 잡았다. 그런데 어떤 사정이 생겼는지 그쪽에서 먼저 약속을 깼고, 나는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줄 알고 그 사람과의 연락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그 후 퀴어 동아리 연합 MT가 있었다. 이 MT는 전국 대학의 퀴어 동아리 회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행사였다. 그런데 같은 조였던 사람 중에 완식이 있었다! 1월에 완식을 두 번이나 보다니 세상에 내 완식은 많구나.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처음부터 왼손 약지에 있는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커플링이었다. 나는 그의 번호도 따지 못하고 그를 보내줘야만 했다. 연인 있는 사람의 번호를 따지 않는 양심 정도는 있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은 2월, 친구와 함께 클럽에 갔다. 당시 클럽에서는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클럽에서 솔로들한테는 빨간 꽃을, 커플들에게는 보라 꽃을 나눠줬는데, 그 꽃을 받은 사람들이 연인 또는 친구가 되고 싶은 다른 사람한테 꽃을 주는 이벤트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또 완식인 사람이 있는 것이었다. 2023년이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완식을 세 번이나 보다니! 게다가 상대는 빨간 꽃을 들고 있었다. 확실한 솔로였다. 나는 그대로 몇 번 말을 걸고 그에게 꽃을 쥐어줬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술집으로 빠져나왔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밝은 곳에서 이 사람의 얼굴을 보니 어쩐지 낯이 익었다. 그리고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도 어쩐지 익숙했다. 나는 조심스레 상대방에게 출신 학교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이 사람과 MT에서 본 사람, 어플에서 매칭된 사람이 모두 동일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나눠보고 깜짝 놀랐다. 그렇지. 세상에 완식 퀴어가 이렇게 많을 수는 없지. 그런데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다니. 이쯤 되면 하늘에서 점지해 준 인연이 아닐까 싶어서 바로 약속을 잡았다.


 나는 그와의 데이트를 위해 패션을 잘 아는 친구와 옷을 사러 갔다. 그때 친구가 내게 물어봤다. 상대방은 어떤 스타일인지, 그리고 나는 어떤 스타일로 옷을 입을 건지. 그 말에 나는 상대방의 사진을 보여줬다. (물론 얼굴은 가리고!) 그랬더니 친구가 말했다. 너랑 평소 스타일이 똑같네!

 그렇다. 나는 거울식이었다. 나랑 비슷한 사람을 좋아하는 거울식. 내 스타일과 이상형의 모습이 똑같으니까 이상형을 꼬셔야 하는데 이상형의 모습과 똑같이 꾸미게 된다. 

 데이트 당일, 안 그래도 비슷하게 생긴 상대와 비슷한 스타일의 옷을 입고 방탈출 카페로 향했다. 조금씩 힌트를 써 가며 탈출한 이후, 우리는 탈출 성공 기념 사진을 찍게 되었다. 처음으로 함께 한 방탈출. 들고 찍을 블랙보드에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모르겠어서 고민하던 찰나, 나는 상대와 내 캐리커쳐를 그리기로 했다. 그런데 상대방을 그리고 내 모습을 그리면 그릴수록 두 인물 그림이 똑같아지는 걸 실감하고 말았다. 우리는 캐리커쳐를 보고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거울식이란 이런 거구나.


 하지만 신기하게도 거울을 본다고 해서 내 모습에 매력을 느끼는 건 또 아니다. 거울을 봤을 때 매력을 느낀다면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거울을 보고 기분이 좋아지기도 할텐데 애석하게도 그렇지는 않다. 

 생각해보면 거울을 본 뒤 행복해진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그냥 거울을 본 사람이 될 뿐이다. 거울식이란 뭘까. 나를 닮은 사람을 좋아하지만 나를 보는 것만으로는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다니…….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리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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