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자가에 비영리단체 다니는 김 팀장 이야기
임대아파트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우리는 만족했다. 양가에 손 벌리지 않고, 빚내지 않고 임대 보증금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월세 30만 원이라는 금액도 ‘서울에서 산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여겼다. “산책할까.” 우리는 퇴근하고 시도 때도 없이 밖으로 나섰다. 아파트 주변에는 걷기 좋은 길이 많았다. 초여름을 앞두고 진한 아카시아 향을 풍기는 나무숲이 우거진 오솔길, 잔잔한 연못이 있는 공원, 나지막한 산등성이가 보이는 흙길까지. 그 모든 풍경이 우리의 일상을 감싸주었다.
하나의 문이 열리면 하나의 문이 닫힌다. 임대아파트에서 무자녀 신혼부부는 최대 10년까지 거주할 수 있었다. 우리는 “10년까지 버티자”라고 은근히 결심했다. 우리가 가진 돈, 앞으로 모을 수 있는 돈으로는 서울에서 이만한 주거환경을 누릴 방법이 달리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2020년 부동산 시장은 유례없이 뜨거웠다. 서울과 수도권은 물론 지방까지 안 오른 곳이 없었다.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밀어두었지만, 관련 뉴스를 계속 보게 됐다. ‘현재 삶에 감사하자’는 마음과 ‘저 집들은 좋겠다’는 마음이 뒤엉켰다.
돌이켜보면 나는 ‘자가’가 필요했다. 빚을 내더라도 10년 후에도 계속 살 수 있는 집 말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어렵게 마련한 아파트를 잃고 우리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사 준비를 했지만 떠나지 못했다. 10년을 산 다세대 주택에서는 비 오는 날마다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방바닥에 바가지를 두고 물을 받아냈다. 그 모든 게 내게는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였다. 다만 등하교 길에, 우리가 잃어버린 그 아파트를 몇 년이고 지나쳐야 했던 일은 아직도 선명하다. 내가 살았을지도 모를 방의 작은 창문을 올려다보는 일은 끝내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만의 집’이라는 감각이 내게 꽤 절실해졌던 건.
그렇게 나는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면서 퇴근 후엔 자칭 ‘청약스쿨’을 다녔다. ‘청약스쿨’은 내 집 마련 커뮤니티 카페들에 가입한 뒤 퇴근길에 정보를 살펴보는 일을 말한다. 남편에게는 ‘청약스쿨’에서 배운 정보들을 공유했다.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세계였다. 입주권, 분양권, 계약금, 중도금, 잔금, 임장, 갭투자, 시세차익, 입지, 역세권, 초품아… 낯선 단어들이 끝도 없이 등장했다. 다들 치열했고, 간절했다. 살아남기 위한 생존 본능이 글과 댓글마다 묻어났다. 그동안 경제 뉴스에 문외한이었던, 혹은 돈과 자본을 ‘불순한 것’으로 여겼던 나의 순진한 태도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질문이 따라왔다. 내게 ‘자본주의’는 무엇인가. ‘비영리’와 ‘자본’은 어떤 관계인가. ‘호혜’와 ‘연대’를 삶의 중요한 가치로 여겨왔는데, ‘아파트 당첨을 통한 시세차익’을 노린다는 게 과연 맞는 방향일까. 동시에 ‘내 앞가림도 못하면서 가치 뒤에 숨는다’는 자책도 들었다. 당시 꾸준히 들었던 팟캐스트 <월급쟁이 부자들>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절박한 사연이 매주 소개됐다. 그들의 고민은 대체로 비슷했다. 자기 집을 갖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한편 팟캐스트에 나오는 부동산 전문가들의 말을 듣다보면 뒤처졌다는 불안감도 뒤따랐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부동산 시장에 내가 휘말린 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오랫동안 도덕적 잣대 속에서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렇다고 해서 내가 중요하게 여겨온 가치들이 모두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선택이 필요했다. 내 삶을 지탱할 방법을,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삶의 크기를 다시 정의해야 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부동산 시장이 과열되던 시기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분양가는 계속 오르기 때문에 빠르게 진입하는 쪽이 낫다 싶었다. 임대아파트가 결혼을 이뤄낸 것처럼 민간아파트 분양도 도전해 보기로 했다. 결심하고 나니 ‘서울 아파트’가 탐났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부부 수입에서 감당 가능한 원리금의 마지노선을 정해보니 수도권이 한계였다. 몇 곳에 청약을 넣었고, 떨어지고 또 떨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요리를 하던 중 휴대폰 문자를 확인하더니 내게 말했다.
“야, 이거 청약됐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