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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감인간 Jul 04. 2022

카카오톡 숫자 ‘1’이 사라지지 않는 사람, 아버지

번외 : 아버지에 관해


#1


"위험해"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몰고 다녔다. 갓 서른이 넘었을 때가 아니었을까. 좁은 오토바이 위에 아버지, 나, 엄마가 올라탔다. 나는 아버지 허리춤을 잡고 있었고, 엄마는 의자 꽁무니에 간신히 매달려 탔다.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끌며 논의 가장자리를 흙으로 둘러막은 두둑 위를 힘겹게 지났다. 비포장길을 달리는 버스처럼 오토바이가 덜컹거리며 나아갔다. 논두렁길에서 균형이 잡기 어려운지 여러 번 브레이크를 잡았고, 그때마다 엔진 굉음이 평화로운 논밭에 울렸던 게 기억난다.          


나는 빛이 바랜 연보랏빛 꽃무늬 원피스에 흰 면타이즈를 신고 있었다. 친할머니 성묘를 다녀오는 길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나와 엄마를 태운 채 아슬아슬 흙길을 나아가다가 손 쓸 틈도 없이 균형을 잃고 논두렁에 빠졌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하지만 논물에 다리가 빠지면서 흰 면타이즈가 젖었다. 진흙 색 얼룩이 진 게 기억난다. 엄마는 그 뒤로 가끔 "너네 아빠는 성묘 갈 때 오토바이 타고 가는 사람"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아버지는 터프했다. 엄마에게 얼핏 들은 얘기로 아버지는 성묘길만이 아니라 오토바이를 타고 근무지인 학교를 출퇴근했다. 당시만 해도 오토바이로 출퇴근하는 젊은 수학교사는 드물었을 테니 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창가에 매달려 손을 흔드는 제자들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아버지 사진을 보면 날랜 체구의 호남형이었다. 오토바이를 몰던 아버지는 사람도 좋아했던 것 같다. 벽장이 큰 집에 뿔테를 쓰거나 목소리가 큰 선생님들이 자주 오곤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에게 나의 양볼을 자주 내줘야 했다.               

아버지는 꿈이 많았다. 교사의 안정성을 보고 엄마와 결혼시켰다는 외할머니의 기대를 보기 좋게 뿌리치고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향했다. 나는 오토바이의 덜컹거림처럼 이삿짐을 실은 용달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 마냥 신났다. 서울행은 그 뒤로 현재까지도 외할머니의 단골 잔소리 0순위다. "그 좋은 선생직을 그만두다니.." 아버지는 손바닥만 한 메모지에 알 수 없는 기호를 빼곡히 적어놓던 사람. 수험생 시절 독서실에서 집에 가는 길, 마중 나와서 뜬금없이 "꿈을 크게 가져라"라고 말한 사람.     


나는 터프한 사람의 터프한 생활방식이 어떻게 온순해지는지 목격했다. 대체로 무심하게, 하지만 집요하게 지켜봐 왔다. 지금의 아버지는 날랜 체구가 아니다. 풍채가 좋다고 하기엔 건강 상태가 걱정될 정도의 체구다. 거실에 몸을 옆으로 뉘이고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이 그때 그 사람이었는지 모를 정도다. 가끔 아버지가 쓰는 컴퓨터 바탕화면이 이따금 바뀔 때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유추한다. 분명 본인이 설정한 듯한 바탕화면이었는데, 파도가 부서지는 어느 곳, 이름 모를 휴양지, 멋들어진 갈색 벽돌 건물이 들어선 오래된 골목의 모습이었다. 여러 생각이 스쳤다.     

 

#2.


“아버지는 여전해. 아버지는 둔해. 아버지는 자기 할 말만 해.”      


아버지는 몇 달 전부터 숲해설가 교육 과정을 듣는 중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은퇴한 뒤 여유를 누리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이미 은퇴하고도 남을 연세이지만, 일을 한 번도 쉬지 않았던 사람이다. 소일거리라도 주는 곳이라면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택시를 갈아타고 재수생이 모여있는 기숙학원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수학교사였다가 수학 강사가 됐다. 그리고 나이들수록 자꾸만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밀려났다. 도심 중심지인 종로에서 경기도로, 화성으로, 버스 배차 간격이 긴 산골까지. 몇 년 전부터 기숙학원에 머무는 재수생이 자율 학습하다가 모르는 걸 물어보면, 문제를 풀어주는 '질문 선생'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해 아버지는 일자리를 잃었다. 일자리를 잃어가는 과정은 물 흘러가듯 자연스러웠다.      


크게 분노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지'라는 대범하면서도, 순응하는 태도. 가끔 나는 아버지가 메고 가던 배낭이 눈에 거슬렸다. 왜 모든 걸 짊어지고 가는 걸까. 기숙학원에 세탁기도, 전자레인지도 있다는데. 엄마는 구태여 아버지는 흑미밥을 먹어야 한다면서 갓 지은 흑미밥을 랩지에 약과처럼 소분해 덜었다. 크린랩에 덜어놓은 밥이 식으면 돌돌 말아서 배낭에 차곡차곡 넣었다. 랩에 돌돌 말린 밥 뭉치는 가벼워 보여도 열댓 개가 되면 무게가 상당했다.      


“그냥 햇반 여러 개 사놓고 먹음 되잖아.”     


일평생 번거로움과 수고로움을 허리춤에 달고 다니는 부부의 정직한 패턴에 나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며 말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일회용 밥을 사는 방법을 몰랐을까 싶지만, 당시에는 왜 고단함을 택하는 건지 그 과정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돈을 아낀다고 햇반을 사지 않은 건지. 아니면 살아오던 대로 하던 방식에서 벗어나길 원치 않았던 건지. 나는 이러한 선택지에 관해 의견을 묻지 않고 간단하고 명확한 정답만을 제시한 셈이다.      



#3.


결혼하고 카카오톡에 가족 대화방을 만들었다. 간혹 꽃 사진이 줄지어 올라왔다. 아버지다. 아버지는 말 한마디 보태지 않고, 가족이 모여있는 채팅방에 꽃 사진을 여러 장 투척한다. 나는 "ㅋㅋㅋㅋ 뭐야"라며 무뚝뚝함을 대신하며 대꾸하곤 했다. 


“꽃 이름은 뭐야?”     


답변을 달았는데도 대화창 옆에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진을 올리는 사람, 답변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 


아버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대화창 숫자 '1'이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 내가 얻은 건 약간 참을성이 생겼다는 점이다. 그간 끈기라 함은 내가 원하는 일을 이루기 위한 끈기였지, 다르거나 원치 않은 걸 견디는 힘은 아니었다.  


문득 무슨 꽃인지 궁금해서 꽃 검색 사이트를 들러 꽃 이름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낯선 이름의 꽃들이었는데 줄줄이 나왔는데 비슷해 보여도 똑같이 보이지 않았다. 끝내 나는 “꽃잎이 아주 크네”, “독특한 꽃 모양이네”라는 등 최대한 겹치지 않은 형용사와 수사를 동원해 다시 답변을 달았다. 


#4.     


지인들은 가끔 나를 용감하다고 표현한다. '용감'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지 않는 나라고 생각했는데 어찌 보면 작은 무언가를 했을 때를 일컫는 게 아닌가 싶다. 돌연 회사에 사표를 냈을 때, 혼자 산티아고 길 걷고 왔다고 했을 때, 여행지에서 홀로 걱정 없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두고 하는 말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 자체가 용감하다기보다 터프하게 말없이 사는 사람을 지켜봐 왔고, 생각보다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목격해왔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많고 많았던 꿈들이 사그라든 모습을 마주해서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요즘도 꽃 사진을 툭 올려놓고 말이 없다. 아기와 씨름하다가 꽃 사진을 확대해 이리저리 본다. 선명한 색감, 균형감 있게 핀 꽃잎. 무더운 날씨에 바깥에 나가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소파에 앉아 소박하게 핀 꽃들을 감상한다. 


이번에도 숫자 '1'은 단박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무슨 꽃이냐고 묻는 메시지를 쓸 것이다. 사실 내가 정말 묻고 싶은 말은 이것. "아빠는 어떤 사람이야?" 나에게는 참을성만이 아니라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라는 상상력도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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