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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감인간 Jun 25. 2022

거울에 비친 초라함을 안고 마음을 언박싱 해보니

아이 돌봄 시작 : 꾸밈과 자존감의 상관관계

겉모습이 나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유행하는 패션을 따르기보다 무채색 계열 옷을 입는 편이었고, 헤어숍도 일 년에 두세 번 가면 자주 가는 셈이었다. 그럼에도 가끔 독특한 신발이나 구두로 포인트 주는 걸 좋아했는데 그마저도 경제적 부담이 생기지 않는 선에서 누렸다. 나름대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수수하게 갖춰 입고 살았다.      


겉모습이 평범하다고 해서 자존감까지 맹탕은 아니었다. 글쓰기를 좋아했고, 성공하고 싶은 욕망도 뚜렷했으며, 당장 내게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번잡한 세상 일을 모른 척하지 말자고 다짐하곤 했다. 대형서점을 들르면 문학, 인문, 사회, 잡지 코너를 습관처럼 찾았고, 문구를 좋아하는 편이라 수첩이나 펜을 구경하다가 오랜 고민 끝에 마음에 드는 수첩을 사는 게 나만의 작은 취미였다.      


번듯한 집이나 자동차도 없고, 명품백 하나도 없었지만, 자존감에 스크래치가 나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엔 사소하지만 '나다움'을 내재한 소품들이 내 곁에 존재했으니까. 나를 둘러싼 작은 소품과 산책, 이야기가 내 세계를 온전히 채웠다. 물론 그 세계는 때론 덜컹거리고, 구멍이 숭숭 뚫리면서 찬 바람을 막느라 급급하기도 했지만, 비좁은 세계라도 '자기만의 방'이니까 안위를 찾을 수 있었다.   


   


경기 일으키듯 울음을 터뜨린 아이를 달래기 위해 현관 앞 전신 거울로 향했다. 내게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텐션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까꿍 놀이에 매달렸다. 아이는 어른의 안간힘이 안쓰러웠는지 울음을 그치고 옹알이로 대꾸했다.   

   

“아, 기분이 괜찮아졌나 봐. 다행이네.”     


내심 안도했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지 않았다. 울음은 늘 준비되어 있으니까. 아이를 곧추세워 안고 거울 앞에서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는데. 아이의 눈과 입꼬리만 바라보던 시선이 움직였다. 아뿔싸. 거울 속 내가 보였다. 늘어난 티셔츠, 사흘간 감지 못한(감는 걸 포기한) 머리, 힙시트에 눌리면서 불룩 삐져나온 뱃살.     


현재의 나를 부정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편이지만, 요즘처럼 과거의 나를 향해 뒤돌아본 적이 있던가. 그저 작은 아이 한 명이 내 품에서 칭얼대다가 잠들었을 뿐인데 나의 얼굴과 표정, 냄새, 애정을 품던 소품, 이야기, 생각까지 모두 뒤바뀐 것만 같았다. 아이가 게워낸 분유 냄새, 다듬지 않은 송충이 눈썹, 나름 팽팽했던 복부는 구태여 옷을 들춰보지 않아도 짙은 갈색으로 침착된 임신선과 늘어난 뱃살, 힘 빠진 배꼽이 훤히 보였다. 


자존감은 자잘한 감정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홀로 문장을 다듬으면서, 산책하면서, 때론 공상을 즐기면서, 다듬어지지 않은 나를 골똘하게 바라보면서 예뻐하기도, 다그치기도, 불쌍히 여겼다. 사랑, 연민, 질투, 좌절, 슬픔 등은 자존감의 토대가 된다고 생각해 귀하게 여겼다. 영글지 않은 감정도 중요했다. 땅바닥에 흩뿌려놓은 유리구슬을 한 알씩 모으듯 나의 감정을 수집했다. '이게 나를 꽉 채울 거야.'


그러나 필요한 무언가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아이를 돌보다 보면, ‘감정 없음’ 상태에 자주 이르렀다. 분유를 타고, 먹이고, 트림시키고, 손목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안고 좁은 거실을 쳇바퀴 돌 듯 걷다 보면 이른바 ‘해탈 아닌 해탈’의 경지에 도달했다. 어깨와 등허리가 저릿할 때쯤 조심스레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나면 어느새 내게 물러나 있던 것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배고프다. 힘들다. 자고 싶다. 눕고 싶다.'

  

싱크대 앞에 서서 우유에 시리얼을 부어 우적우적 씹어먹고 나면 그제야 본능적 욕구를 넘어서 익숙했던 감정들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공허하다. 뭔가 하고 싶다. 읽고 싶다. 쓰고 싶다. 하지만 거실 한쪽으로 밀어둔 책상 의자에는 단 한 번도 마음 편하게 앉아본 적이 없었다. 타인의 물건을 훔치는 것처럼 숨죽여 의자에 앉으면 잠들었던 아이는 귀신같이 알아채고 ‘엥~’하고 울기 시작했다. 


아이와 책상의 ‘밀당’은 언제나 살아있는 아이의 승리로 끝났다. 당연한 결과다. 아이는 살아있고, 나를 증축하던 사물과 이야기는 죽어있다. 누군가는 그렇게 극단적으로 가를 필요가 있냐고 타박할 수도 있지만, 돌봄 노동에 나를 던지고 난 후 겪는 감정이라 이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자존감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난다. 친정엄마가 아이 돌봄에 손을 보태기 위해 집에 들렀을 때 대뜸 내게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플라워 패턴에 곳곳에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였다. 기분 전환하라며 사다 준 옷이었다. 전적으로 나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한 번 입고서 나가고 싶다”라는 마음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이제껏 공표해온 나의 취향을 따르고, 습관을 고수하기보다 때로는 순간적으로 스치는 나의 감정을 순순히 따라주는 것. 내가 몰랐던 자존감의 겉모습이었다.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 세계에 내가 빠져들어가는 것을 느끼는 순간 내 손을 잡아당기고, 도와달라고 하고, 타자기를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그럴 때 나는 아이의 욕구가 거짓이라고, 더 나아가 내가 단 15분조차 나 자신으로 살지 못하게 하려는 마수라고 느꼈다.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지키려는 그 어떤 시도도 소용이 없는 것 같았고, 아이와 나 사이의 불평등을 느꼈다. 나의 욕구는 언제나 아이의 욕구와 저울질되었고, 언제나 밀려났다.”


- 에이드리언 리치, ≪분노와 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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