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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감인간 Jul 07. 2022

흔들리는 육아와 ‘추앙’하는 글쓰기

번외 : 글쓰기에 관해 

글쓰기가 지겨웠다. 커서만 깜빡이는 백지를 들여다보거나 길을 걷다가 번쩍 떠오른 아이디어를 메모하고, 쓸만한 이야깃거리인지 요리조리 살펴보는 일 말이다. 커서를 노려보다가 열 손가락이 방향 잃은 돛단배처럼 이리저리 위태롭게 오가다가 뒷걸음질 치듯 백스페이스를 여러 차례 누른다. 그리고 다시 백지. 노트와 수첩에는 아이디어가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노트의 미로를 헤매다가 찾은 문장과 단어들은 정말 새로울 것만 같았는데, 막상 다시 읽어보면 어느새 오래된 화석처럼 형체를 알 수 없다. 


그런데 어쩌자고 문서 창을 열고, 무엇이든 끼적이고 있는 걸까. 글쓰기는 참 효용성 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글쓰기를 통해 나를 발견하고, 사색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본질적인 의미를 알고 있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미생의 현실에서는 글쓰기보다 오히려 만보기 앱을 켜놓고 걸어 다니는 게 몇 십원이라도 벌 수 있지 않은가.


그만큼 글쓰기라는 행위는 그럴듯한 낭만과 보상 심리가 높은 영역. 돌아오는 게 기대 이하일 때가 많다. 글자 수만큼 금액으로 환산되지 않고, 백지에 꽉 찬 글자들이 분리배출되지 않은 쓰레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떤 날엔 뭐에 홀렸는지 글쓰기를 돈으로 살 수 있는 비싼 무엇보다도 격하게 '추앙'할 때도 있다.



도대체 나는 글쓰기를 얼마나 했길래 지겨워할까. 작가 조정래는 '글쓰기 감옥'에서 몇 십만 자를 썼다는 건 유명한 일화이고, 장강명 작가는 근무시간을 정해 엑셀 시트에 근무시간(글쓰기 시간 포함)을 매일 적는다고 한다. 사실 어느 곳에서도 데뷔하지 않은 무명 씨로 여느 작가와 견주어 나의 글쓰기를 논한다는 게 우습다.  


글쎄. 글쓰기 좋아하는 사람, 취미로 글 쓰는 사람, 이제 갓 글쓰기에 재미를 붙인 사람 모두 얼마나, 어느 정도 글 쓰는지 모르기 때문에 작가와 비교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전업 작가로서 글쓰기와 퇴근 후, 혹은 육퇴 후 글쓰기를 비교하면 턱 없이 부족할 테지만. 지극히 주관적 차원에서 나의 글쓰기는 '해진 애착 인형'과도 같다. 




글쓰기의 시작은 초등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땐 동시인지 모르고, 동시를 썼고, '흑장미'에 꽂혀서 꽤 어른스러운(?) 시를 쓴 적이 있는데,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찢어버렸다. 그렇게 시를 쓰다가 글쓰기 학원을 다녔다. 남들은 영어와 수학 학원을 다녔는데, 어쩌다가 내가 글쓰기 학원을 간 지 모르겠지만. 


네모난 원고지, 특히 정방형의 여러 칸이 마음에 들었다. 글자 획수를 한 칸에 꽉 채워서 쓰는 기분이란 뭔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같았고, 유선지가 아닌 원고지에 줄 선 글자들은 마치 블록을 연결하는 것 같았다. 거기서도 뭔가를 썼다. 


자, 이제 사춘기다. 사춘기는 고로 '쪽지의 시절'이 아니었던가. 노트의 귀퉁이, 필요하면 교과서의 맨 뒷장을 과감하게 찢어서 편지를 썼다. 쉬는 시간에도 낄낄거리며 수다 떨었던 옆에 앉은 친구에게. 하루 종일 붙어 다닌 친구인데도, 얼굴을 보며 할 얘기가 있고, 샤프로 이런저런 말을 쓰는 얘기가 따로 있었던 게 분명하다. 


'쪽지의 시절'을 다시 발견한 건 결혼할 때였다. 추억과 오랜 골동품을 다시는 들춰보지 않고 모으는 버릇 탓에 침대 서랍 칸은 온갖 쪽지와 편지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쓰지 않는 유선 전화번호부부터 친구와의 교환일기까지. 심지어 "심심해~"라는 정말 하나마나한 말이 적힌 조그만 쪽지까지 모아뒀다. 나는 말이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오산. 종이 앞에서 쉴 새 없이 종알대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글 쓰면서 등단한 적이 없는데 나의 글쓰기 기간은 장장 20년을 훌쩍 넘어섰다. (아아, 인생이여.) 켜켜이 쌓인 물리적 시간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부질없이 글을 오래 썼네요." 죽을 때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작가들, 글쓰기를 놓지 않고 살다가 60-70대에 등단하는 사람들, 실제 90세에 등단해 99세에 처녀작을 펴낸 시바타 도요 씨까지. 이런 사람들의 얘길 들으면 글쓰기를 향한 그들의 애착, 내 가슴속에 품은 애착을 발견한다. 



누구 하나 내게 글 쓰라고 닦달하지 않는다. 나는 뭐하는 사람이길래. 싱글부터 신혼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는 회사원, 퇴근하면 요가를 하고, 산책도 하고, 어설픈 요리를 해 먹는 사람. 겉보기엔 평온하고, 별 일 없이 잘 사는 사람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조급한 사람. "오늘 하루 잘 먹고 잘 살았다~"라며 철퍼덕 침대에 드러눕다가도 새벽에 일어나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미라클 모닝'에 꽂혀 졸린 눈을 비비며 아늑한 침대를 빠져나오는 사람. 100일 된 신생 인간을 갈대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으며 돌보면서도,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이 눈에 밟히는 사람. 


요즘 육아하면서 남편이 자유시간을 양보해준 덕분에 두 시간씩 카페에 앉아 글을 쓴다.(아직도 글을 쓰다니..) 나는 왜 글을 쓰는가.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 앞에 나에게 의미를 남기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 때문 아닐까. 아직 불명확한 모성애보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할 말 없다. 보부아르가 말했다. 그냥 죽는 건 싫다고. 과거에는 이러한 욕구가 '성취'와 '경쟁'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작가'라는 명예에 더해 부를 누리고 싶다는 마음. 이 마음도 일견 동의하는 구석이 있다. 


'글쓰기는 나의 것'이 될 수 있을까. 실패와 망작에 대한 두려움.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변덕스러운 글쓰기로 지금까지 연명해왔는 걸. 재능을 인정박아 크게 박수받은 적도(어릴 때 글쓰기 상을 휩쓸었다든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이 삼 년 간 장편 소설 쓰기에 매달리는 집념도 없었지만. 그래도 가느다란 글쓰기 끈을 놓지 못한 채 허리춤에 묶고서 미로를 헤맬 수밖에. 나를 증명하고 싶은 글쓰기, 누군가를 찾아 연결되고 싶은 글쓰기. 여기까지가 내가 내린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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