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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감인간 Jul 16. 2022

봄날의 햇살은 끝나지 않았어

에필로그 : 익숙한 나와 낯선 엄마의 조우 

“밑천 다 떨어졌어.”     


호기롭게 자기애와 모성애 사이에서 나만의 무언가를 찾겠다고 남편에게 선언하며 시작한 작은 사람 돌봄에 관한 이야기. 그랬던 내가 또다시 열흘 만에 노트북을 켜고야 말았다. (‘또다시’라는 말은 지금껏 무언가 써보겠다는 포부를 여러 번 밝힌 적 있었으며, 이 또한 여러 번 스스로 거둬들이거나 모른 척한 경험이 있다는 뜻.)아, 이번에도 실패인가.   

   

작은 사람이 태어난 지 백일이 갓 넘었다. ‘100일의 기적’은 없었다. 지난 열흘간 이상하리만큼 분유를 먹지 않아 전전긍긍하던 날이 이어졌고, 새벽 수유는 여전히 두 번씩 해야 하는 상황이다. 남편도 동시 육아휴직을 한 덕분에 훨씬 수월해졌지만, 희한하게도 몸의 힘듦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서 일어날 때 무릎의 힘으로만 일어설 수가 없고, 팔꿈치의 통증도 안고 살고 있다.      


매일 하는 돌봄 노동은 무한 반복 중이다. 수유하고, 트림시키고, 놀아주고, 씻기고, 기저귀 갈고. 그래도 내게 밑천이 많다고 여겼다.      


울음, 용쓰기, 터미 타임, 주먹 고기, 침독….      



작은 사람이 성장하며 겪는 변화들은 글쓰기의 소재인 동시에 나를 놓치고 싶지 않은 안간힘을 길어 올렸다.      


누구 하나 재촉하지 않았는데 쑥쑥 자라는 작은 사람의 성장 속도에 놀라움을 표하면서도 내 안의 미세한 변화도 감지했다. 앞뒤 재지 않는 작은 사람의 울음소리는 정신을 쏙 빼놓았지만, 내가 오랜 시간 천대한 나의 눈물을 돌아보게 했다. 


어제도, 엊그제도, 심지어 한 시간 전에 본 모빌인데도, 매번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허공에서 힘차게 발을 구르는 모습을 보며 ‘순간을 대하는 태도란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이런 식이라면 작은 사람의 행동에서 비롯된 글쓰기는 그야말로 ‘네버엔딩이다’ 싶었다.      


만약 행동에서 길어 올린 만한 게 없다면 작은 사람의 몸에 관해 쓰겠다는 B안도 있었다. 영국에서 주목받고 있는 열다섯 명의 작가들이 몸속 기관들을 하나씩 정해 각자의 기억과 경험, 생각을 바탕으로 글을 써낸 에세이 <살갗 아래>를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작은 사람의 몸은 인간의 몸을 탐구할 수 있는 계기였다.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항상 치켜들고 있는 엄지발가락, 접히는 뱃살,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목, 머리를 빡빡 밀고 나니 보이는 팔딱거리는 대천문까지.      


그런데 나는 열흘 만에 노트북 앞에 앉았다. 쪽글도 쓰지 않았다. 새벽에 잠을 포기하며 책 몇 장을 읽어보려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돌봄 노동에 몸을 바치는 동안 마음 한구석에는 ‘밑천 떨어졌다’라는 생각이 웅크리고 있었다. 


분유를 먹이면서도, 설거지하면서도, 지쳐서 널브러져 있으면서도. 더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심리적 거리를 두던 육아에 나를 더 몰아넣고 싶었다. 맘 카페에 수차례 들락날락했고, 다른 엄마들과 나를 비교하며 ‘엄마의 역할’을 다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되물었다.      


지금 앉아 있는 곳은 카페. 조용한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온라인 강의를 듣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들 사이에 내가 앉아 있다. 여기에서는 엄마가 아니다. 이제 나를 톺아볼 시간. ‘밑천 떨어졌다’라는 생각은 기로였다. 정말 밑천이 떨어진 것도 아니었고, 작은 사람의 행동과 감정에 따라 내가 느끼는 감흥과 깨달음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몸이 힘들다는 이유로 나의 욕구와 욕망을 덮어버리고 싶은 무심함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심함의 껍질을 벗기면 남아있는 초라한 알맹이.      


‘출산이라는 거대한 경험을 했는데도 나는 고작 이 정도인 걸까.’     


출산했기 때문에, 돌봄 노동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내가 나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을 거라는 일방적인 전제는 일부 잘못됐다. 


나를 잃고 싶지 않으면서도, 나를 확 놓아버리고 싶은 양가감정은 결혼하기 전부터 숱하게 느꼈고, 이번에도 여지없이 겪은 것이다. 모성애는 자기애를 철저하게 깔아뭉개지 않는다. 내가 겪지 못한 감정과 이성을 새로운 영역으로 넓힌다는 가능성을 제시할 뿐, 내가 나로서 설 수 있는 방식과 태도는 여전히 나의 몫으로 남아있다.      


누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는 거 아닌가요?”     


나를 마치 남처럼 무심하게 대하는 태도야말로 은근한 몰아세우기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을 순식간에 갉아먹는다. 자기애와 모성애 사이 불완전한 시소 타기. 나를 향한 열렬한 구애가 듬성듬성 구멍이 난 것처럼 보이자 급기야 모성애로 봉합하고 싶은 생각에 휩싸였던 게 아닐까. 


열흘간의 멈춤. 죽음이 아닌 생명을 위한 휴지기. 불행과 실패를 낙관하며 지금을 기록하고, 집중하는 것. 나이를 먹을수록, 일상이 단조로울수록 기회와 가능성을 빼앗지 않는 것. 나는 또다시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실패하는 순간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볼품없어 보여도 이게 나의 밑천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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