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 Apr 05. 2024

이브의 속죄

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 민음사

‘모성’은 타고나는 것일까, 만들어지는 것일까? 모성만 강조한 채 성찰이 결여된 사회에서 그 사랑이라는 것은 감옥으로 변질되기 쉽다. 사회는 손쉽게 어떤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했고,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과 육아는 행복을 보장하는 무엇이 아니라 외롭고 고통스러운 고행이 되었다.      



도리스 레싱은 소설 <다섯째 아이>에서 정상가족이라는 환상을 이상으로 삼은 한 가족에게 닥친 불편한 진실과 그로 인한 붕괴를 그리고 있다. 직장인 파티에서 만난 해리엇과 데이비드. 그들은 주변인들로부터 ‘보수적이고 답답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인물이며, 서로가 가진 가치관을 한눈에 알아본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파티의 열기를 즐기는 사람들을 구경하듯 서있다가 서로를 향해 동시에 움직인다. 그것은 그야말로 ‘옛날식의 행복’을 잡아당기기 위한 것이었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커다란 저택을 구입하고 결혼하여 곧 아기를 낳는다. 그것이 그들이 그리는 행복이었으니까.      


해리엇은 침대에 앉아 아기에게 젖을 물리면서 데이비드가 가져다 놓은 차를 마셨다. 그가 루크의 머리를 쓰다듬고 자신에게 키스를 하기 위해 수그릴 때, 해리엇은 그의 강렬한 소유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좋아했고 이해했다. 왜냐하면 그가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 자신이나 아기가 아니라 행복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녀와 그의 행복.” (26쪽)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곧 둘째를 임신한다. 해리엇은 아기를 여럿 낳을 생각이긴 했지만 그 터울이 길기를 바랐다. ‘정상’적인 임신이었음에도 해리엇은 몸의 불편함을 느낀다. 그들은 부모의 도움을 받아 삶을 꾸려가기 시작한다. 해리엇의 친정엄마가 육아와 살림을 돌봐주고, 부족한 돈은 시댁에서 지원받았다.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삶은 진작부터 과부하가 걸린 상태였으나 지붕 위 구멍을 땜빵하듯 살아가며 시간은 흘러갔고, 아이 넷을 키우면서도 다섯째 아이를 임신했다. 임신과 출산이 주는 고통은 해리엇을 점점 외롭게 했다. 아무도 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했으며 데이비드는 고통스러워하는 해리엇을 ‘비판적이고 불편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해리엇은 완전히 지치고 미칠 것 같았다. 그녀는 쉽게 토라지고 화를 냈다. 복받치게 울기도 했다. 데이비드는 그녀가 턱을 괴고 식탁에 앉아 뱃속의 아기가 자기에게 독을 퍼뜨린다고 중얼거린다는 것을 보았다. (44쪽)    


데이비드 역시 휴가를 내면서까지 집안일을 도왔으나 힘에 부쳤고, 돈은 항상 모자랐다. 살림을 도와주던 해리엇의 엄마도 완전히 지쳐 있었다. 그들의 헛된 이상과 현실의 삶은 이미 붕괴된 상태였다. 해리엇은 다섯째 아이 벤의 존재를 느끼며 자신과 남편이 꿈꾸었던 행복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더 이상 회피할 수 없었다. 



벤은 뱃속에서부터 남다른 아이였다. 벤의 거센 움직임은 해리엇에게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충격과 고통을 주었다. 해리엇은 진정제를 복용해야 한 시간 남짓 잘 수 있었다. 고통을 견디기 위해 그 외의 시간은 계속 움직여야 했다. 아무도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해리엇은 그것을 오롯이 혼자 견뎠다.       


막 태어난 아기 벤은 전혀 사랑스럽지 않았다. 아기는 ‘묵직하고 누르스름한 덩어리’ 같았고, 해리엇의 가슴까지 빨려 들어갈 것처럼 젖을 빨아대는 ‘거머리’였다. 해리엇은 아기가 정상이 아니라고 느꼈다. 아기는 빨리 자랐고 점점 더 많이 먹었다. 때때로 해리엇은 아기 벤의 악의에 찬 눈빛을 보았다. 포효하는 듯 울부짖는 거친 반응도 해리엇을 막막하게 했다. 그 무엇보다 그를 분노하게 한 것은 벤을 낳은 자신을 죄인처럼 바라보는 가족과 친척들의 시선이었다. 해리엇은 데이비드 역시 자신을 비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벤의 폭력성은 마을의 개와 고양이를 죽이는 등 문제행동으로 이어졌지만 어느 병원에서도 벤이 비정상이라는 사실을 공언해주지 않았다. 벤을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데이비드는 아이를 요양소에 보내기로 마음먹고 해리엇을 설득했다. 해리엇은 쉽사리 마음먹지 못했다. 그는 어떤 책임감을 느꼈다. 해리엇은 ‘정말로 무엇이 문제인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해리엇이 느끼는 근본적인 문제는 벤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만든 행복이라는 환상 속에서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잘못된 선택을 했으며, 벤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삶이 붕괴되어 있었음을 희미하게나마 인식했던 것이다. 해리엇은 자기 삶을 망친 죄인으로서 벤이라는 희망 없는 감옥을 받아들인다. 


내버려 두면 벤은 요양소에서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해리엇은 혼자 요양소로 가 벤을 집으로 데려온다. 이후 해리엇은 전과 다른 태도로 벤을 양육했다. 때로는 벤의 트라우마를 이용해 적당히 협박하기도 하고, 마을의 부랑자를 고용해 힘의 질서에 익숙한 벤을 다스리게도 했다. 해리엇은 더 이상 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낯선 존재로서의 벤을 그저 받아들였다.


그 사이 해리엇의 가정은 회복조차 꿈꿀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무너진다. 아이들을 뿔뿔이 흩어지고, 벤의 폭력성과 그림자에 가려져 온전히 돌봄 받지 못한 넷째 아이는 벤 못지않게 몸과 마음이 아팠다. 데이비드와의 관계는 허울만 남았다. 그들은 껍데기에 불과한 가정이라는 낡은 집 혹은 스스로 구축한 견고한 감옥 안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그녀는 데이비드에게 말하였다. 「우린 벌 받는 거야. 그뿐이야」
「무엇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증오하는 톤이 있었기 때문에 방어적으로 그가 물었다.
「잘난 척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해서」(중략)
「우린 행복해지려고 했어!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아니, 나는 행복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결코 없어.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려고 했지. 그래서 바로 번개가 떨어진 거야」(159쪽)     



해리엇의 인내와 고행 속에 사랑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는 단 한 번도 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해리엇이 ‘희생양’의 역할을 받아들이면서까지 벤이라는 낯선 존재를 감당한 것은 어리석었던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시작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그것은 사회로부터 주입된 사랑은 아니었다. 자신이 가졌던 허상 속에 숨겨져 있었던 진실을 똑바로 바라보았던 용기 있는 한 여성의 냉철한 속죄에서 비롯된 사랑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불꽃처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