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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수미 Mar 18. 2024

무왕과 서동 사이

익산 백제 여행

善化公主主隱                선화공주님은

他 密只 嫁良 置古          남 몰래 사귀어

薯童房乙맛둥[薯童]      서동 도련님을

夜矣 卯乙 抱遣 去如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가는 서동요이다. 이 4구체 향가는 역사와 설화 사이에서, 국사와 국어 사이에서 가느다란 줄다리기를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익산이 있다. 익산에서 서동과 무왕을 찾는 여행을 한다.   

  『삼국유사』에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는 과부로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고 한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으로 마를 캐서 팔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 불렀다.’ 당시 백제의 서울은 부여(사비)였고, 익산 금마는 부여로부터 50km 남쪽에 있다. 여름이면 연꽃이 가득한 금마의 한 호수가 있다. 백제의 기와나 그릇이 많이 출토되어 서동의 생가터라고 추정된단다. 그 호수를 ‘마’를 파는 서동과 ‘용’의 연못을 합쳐 ‘마룡지’라 부른다. 초봄의 마룡지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서 황량했다. 지금 유적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어 연못에 접근할 수 없지만, 곧 정비가 끝난다니 홍련으로 가득한 마룡지가 기대된다. 귀여운 용과 서동의 엄마 동상은 앙증맞고 귀여워 동화같은 상상력을 키워준다. 이제 설화에서 역사로 이동한다. 사람의 이야기보다 더 단단한 돌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이다.   

  『삼국사기』에는 무왕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니 법왕法王의 아들이다. 풍채가 빼어나고, 뜻과 기개가 호걸스러웠다. 법왕이 왕위에 오르고 이듬해에 돌아가시자,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다.(武王 諱璋 法王之子 風儀英偉 志氣豪傑 法王卽位 翌年薨 子嗣位.)’ 무왕은 즉위하자마자 삼십여 년 동안 신라를 상대로 십여 차례 크게 공격했다.     

  무왕은 익산에 사찰을 세우고 천도를 계획했다.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여 새로운 백제 중흥을 열었듯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장소가 필요했다. 살기 좋은 땅이라 고조선의 준왕이 터를 잡았고, 마한의 중심이었던 익산 금마가 무왕의 눈에는 안성맞춤이었나 보다. 무왕은 도읍을 금마로 정하고 남쪽에 왕궁과 왕실 사찰인 제석사를 짓고 북쪽에는 국가 사찰인 미륵사를 창건했다. 아버지 법왕은 부처의 법을 숭상하는 사람이었으니 아들도 불교의 힘을 나라의 중심으로 삼았다. 무심한 세월 속에 미륵사는 사라지고 미륵사지 석탑만 남았다.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이다. 예로부터 질이 좋고 큰 돌이 많아 유명한 익산 황등의 황등석으로 세웠다.. 거대한 석탑 두 개 사이에 더 거대한 목탑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두 개의 탑 중에 서탑만 남아 그날의 영광을 보여준다. (30년 전에 동탑을 복원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발라진 시커먼 시멘트를 벗고 천오백 년의 세월을 견뎌내며 본모습을 드러낸 미륵탑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던 2009년에 사리함과 사리병뿐만 아니라 창건기록이 담긴 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다. ‘우리 백제의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 오랜 세월에 선인을 심으셨기에 현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태어나셨다… 이에 공손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 돌이 간직한 역사가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삼국유사의 선화공주는 이제 전설의 인물이 되었다. 이제 용의 아들 서동과 법왕의 아들 무왕 사이에서 법왕의 아들 무왕으로 역사의 추가 기운다. 맏이로 지어진 미륵탑을 보았으니 이제 동생 격인 왕궁탑을 보러 간다.     

  왕궁 오층석탑은 세계문화유산이다.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려던 기록은 『관세음응험기』에 있다. 관세음보살의 영험함을 다룬 일화인데, 중국 남북조 시대의 전량이 쓴 기록이다. 이 책은 1970년대에 일본의 사찰에서 발견되었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무왕의 익산 천도에 대한 기록이 없어 익산 천도는 서동 설화처럼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여겨졌다. 그런데도 이곳이 왕궁면이나 고도리라는 지명을 오랫동안 유지한 것은 신기하다. 관세음응험기에는 무왕의 기록이 있었다. 뜬구름을 잡는 이야기가 역사가 되었다. ‘백제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지에 천도하여 정사를 새로 지었다…’ 백제가 멸망하면서 완성되지 않은 왕궁은 사찰로 바뀌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탑이 왕궁리 오층석탑이다.

  두툼한 땅 위에 우뚝 서 있는 오층석탑은 미륵사지 석탑보다는 작지만 높이가 8.5m나 된다. 사방이 시원하게 뚫려 어떻게 보아도 아름답다. 하늘로 살짝 올라간 옥개석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도 있다. 다섯 겹으로 펄럭이는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귀부인의 귀에 옥구슬이 걸려있는 모습이 상상된다.      

  왕궁탑 건너에는 고도리 석불입상이 있다. 이백 미터 떨어져서 두 부처님은 마주 보며 웃고 있다. 4m가 넘는 하나의 화강암에 부처님을 새기고, 네모난 관을 머리에 씌웠다. 두 손을 모으고 살포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은 마치 부부의 모습 같기도 하다. 동쪽 석불의 얼굴에는 수염이 선명한데, 서쪽의 석불은 매끈한 얼굴이다. 웃는 입 모양도 더 여성스럽다. 고려시대의 누가 어떤 마음으로 다듬었을까. 두 석상의 모습에서 오작교를 건너지 못하고 애틋하게 바라보는 견우와 직녀가 보인다. 칠월칠석에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 고도리의 두 석상도 만나서 손 맞잡는 날이 있지 않을까 상상하니 즐겁다.     

소왕릉과 대왕릉

  무왕의 탄생부터 정치·종교를 보았으니 이제 무왕의 죽음으로 향한다. 오랫동안 이곳은 두 개의 릉이 있다고 하여 ‘쌍릉’이라고 불렸는데, 작년에 ‘익산 왕릉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사』「금마군조」에 ‘후조선 무강왕 및 비의 능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절요』에는 ‘도적이 마한의 능을 발굴하였다.’라고도 쓰여 있다. 2017-2019년 발굴 결과 대왕릉 무덤방의 유골은 7세기 전반에 사망한 50대 이상의 남성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무왕이 641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학계는 무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지금의 대왕릉은 서동이 금 다섯 덩어리를 얻어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오금산五金山을 뒷배 삼아 남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백여 미터 떨어진 서북쪽에 있는 소왕릉은 소나무에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다. 마치 두 릉의 위치와 모양이 사랑채와 안채 같다. 무왕이 익산에 사찰을 창건하고 왕궁을 만들고 이곳에 묻혔지만, 뒤를 이은 의자왕은 새 도성으로 옮겨올 마음이 없었나 보다. 백제의 역사는 부여에서 끝났다.     

  5월에는 익산에서 서동 축제가 열린다. 벌써 55년이나 되었다. 백제와 서동을 주제로 5월 3일부터 6일까지 낮과 밤이 화려하다. 낮에는 다양한 체험과 공연이 있고, 밤에는 갖가지 모양의 한지가 빛을 발한다. 익산의 서동과 경주의 선화공주가 만나 행진도 한다. 익산과 경주는 26년째 자매도시로 문화를 교류한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는 현대인의 삶에서 즐거운 축제로 남았다. 나도 몇 년 전에 아이들과 함께 서동 축제를 찾았었다. 화려한 빛 축제가 있어 밤이 더 유명한 서동 축제이지만, 한낮의 서동 축제도 재미있었다. 주차장에 주차하고 깡통으로 만든 성당면 바람개비 열차를 타고 금마저수지를 달리니 바람도 상쾌했다. 아이들은 무사가 되어 임무를 수행했고, 백제 옷을 입고 사진도 찍었다. 아이들이 볏짚으로 달걀 꾸러미를 꼼꼼하게 만드는 동안 나는 멀리서 들려오는 우리의 소리에 빠졌다. 소리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심장을 쿵쾅 뛰었고, 내 안의 신명이 장단을 맞췄다. 우리나라 5대 농악에 속하는 이리농악의 신명 나는 풍물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덧사진.

서동축제 구경하다가 뉴스 인터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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