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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수미 Jun 22. 2024

문화왕국 백제를 만나는 길

익산, 부여, 공주

  

  산봉우리 사이에서 사슴과 사자는 뛰어놀고 악사는 비파를 연주하고 신선은 낚시하고 새는 지저귄다. 시냇물은 잔잔히 흐르고, 폭포는 힘차게 쏟아진다. 용은 세상을 안전하게 받치고, 봉황은 맨 위에서 가슴을 펴고 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전쟁이 일상인 세상에서 사람들은 꿈꾸는 세상을 백제금동 대향로에 담았나보다.

  사리함에 작은 넝쿨무늬가 물결을 이룬다. 진주 모양도 빙 둘러져 화려함을 뽐낸다. 황금병은 조명을 받아 더 반짝이며 제 몸에 두른 무늬를 뽐낸다. 부처님 사리를 모시는 사리함이니 이 정도 아름다움은 갖춰야 했나 보다. 부처님 사리를 유리병에 담고 유리병을 금제 사리내호에 담고 다시 사리내호는 금동 사리외호에 담았다. 백제인들은 왕실의 안녕을 비는 마음을 새긴 봉안기와 함께 사리장엄구를 탑의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두었다.

  앙증맞은 작은 다리와 통통한 몸매. 뿔도 있고 작은 날개도 있다. 죽은 자를 수호하는 이 귀여운 진묘수가 지키는 이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백제 25대 무령왕이다. 왕의 무덤은 연꽃이 새겨진 벽돌로 아치형으로 만들어졌고, 빨간 등잔은 어둠에서 빛을 뿜는다. 왕과 왕비는 일본 금송으로 만든 관에 누워 금장신구로 장식하고 더 좋은 세상으로 떠났다. 진묘수가 왕을 잘 지켜준 덕에 무령왕이 1500년을 보내고 우리에게 다시 왔다.


  나들이하기 좋은 계절이다. 아이들과 함께 국사 공부를 핑계 삼아 백제 여행을 떠난다. 백제는 광활한 땅을 차지했던 고구려와 천 년 역사를 가졌던 신라에 비해 그 위세가 많이 가려져 있다. 찬란한 햇빛을 맞으며 황금처럼 빛났던 백제의 문화를 만나러 간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은 공주‧부여‧익산의 여덟 개 유적을 엮어 <백제 역사 유적지구>로 정하였다.     

  한강에서 시작한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강을 빼앗기면서 공주로, 신라 진흥왕이 계약을 파기하면서 부여로, 그렇게 두 번 천도가 이루어졌다. 무왕은 부여라는 지역의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익산으로 천도를 준비했다. 『삼국유사』에는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라고 하고, 금마(익산)에서 마를 팔던 청년이었다고도 한다. 최근에 미륵사지 석탑이 해체되면서 발견된 「금제 사리 봉안기」를 보면 무왕의 왕비가 귀족인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역사는 법왕의 아들로 저울의 추가 기운다.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으로 모양과 제작 과정이 목탑 양식이라고 한다. 목탑은 가운데 큰 기둥(심주석)을 두었는데 미륵탑도 심주석이 석탑 옥개석을 받치고 있다. 언제인지 허물어져서 흔적도 없는 동탑을 삼십여 년 전에 새로 만들었는데, 그 안에 들어가 심주석을 만져볼 수 있다. 동탑 안에서 바라본 서탑은 액자에 들어간 사진처럼 멋지다. 흉측하게 때 묻은 미륵사지 석탑은 이십여 년이라는 해체‧복원을 거치며 깨끗하게 옷을 갈아입은 귀부인으로 변신했다. 더구나 이번 발굴에서 사리봉안기와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백제는 무엇을 하든 기록을 꼼꼼하게 남기는가 보다. 사리봉안기에는 무왕이 (백제에 불교의 법을 퍼뜨린) 법왕의 아들이며 부처님 사리를 미륵사 석탑에 모시는 과정이 자세하게 쓰여 있다. 사리장엄구는 유리사리함(병은 깨지고 뚜껑남 남아 있었다), 사리내호, 사리외호와 유리구슬들이다. 세밀한 무늬가 새겨진 작은 금항아리들을 보고 있노라면 백제의 문화가 얼마나 화려했을까 싶다.

  내 눈길을 끄는 것은 사리함 근처에 있는 금동 향로인데 마치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보았던 사자의 분수 같았다. 유리병과 사자다리를 연결하니 페르시아의 문화가 백제에도 들어왔다는 주장에 마음이 기운다. 우석대 전형철 교수는 실크로드를 연구하면서 페르시아와 백제의 교류를 주장했다. 미륵사지 사리함의 당초문, 어자문, 연주문 등이 모두 페르시아에서 시작했던 무늬들이란다. 중국왕조는 물론 페르시아와 교류하고 얻은 것들을 일본에 전해주었던 백제이다. 이러한 동아시아 문화 뱃길이 백제가 오랫동안 강성했던 이유이지 않나 싶다. 파란 하늘 아래 시원하게 서 있는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의 오 층 석탑을 한눈에 담고 이제 부여로 향한다.     

  ‘진흙 속의 진주’라는 말은 백제 금동대향로를 두고 하는 말 같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삼십여 년 전에 진흙 속에서 발견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 옛날에 이런 세공 기술이 있었다니, 향로 아래를 용이 받치고 온갖 동물들과 신선들은 산속에서 뛰어놀며 봉황은 위풍당당하게 가슴을 내밀고 꼭대기에 서 있다. 얇은 금동 판에 새겨진 것들이지만, 마치 살아 움직일 것만 같다. 위다의 소설 『뉘른베르크의 난로』처럼 깜깜한 밤이 되면 금동대향로의 신선들이 결계를 뚫고 나와 비파를 치며 놀지 않을까. 모든 유물이 그렇겠지만, 금동대향로는 반드시 실물을 봐야 한다. 눈을 깜빡일 수도 없고, 발길을 뗄 수도 없고, 작은 숨결도 입안에서 멎는다. 금동대향로를 몇 바퀴 돈 후에야 전시실을 나올 수 있었다. 금동대향로 제작 과정 영상을 보니 수은아말감기법이라고 은을 수은에 녹여 아말감을 만든 후에 대향로에 바르고 불로 수은을 날리는 기법이란다. 아말감은 오래전에 치아 때울 때나 들어본 말인데, 백제는 공예는 물론 화학 기술도 대단했나 보다.      

  국립부여박물관 건너에는 정림사지 오 층 석탑이 있다. 한 번도 해체하지 않은 유일한 고대의 석탑이다. 단단하게 잘 세워졌기에 수천 년을 견디고도 현재까지도 굳건하게 서 있다. 책으로만 볼 때는 보통의 탑처럼 작아 보였는데, 막상 그 앞에 서니 꽤 키가 컸다. 백제가 멸망하고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네 개의 탑신 면에 빼곡하게 전승 기록을 새겼다. 깨알같이 새겨진 기록에는 백제 인구가 620만 명이나 된다고 쓰여 있다. 그래서 한때는 ‘평제탑(백제를 평정)’이라고 불리는 수모를 겪은 정림사지 오 층 석탑에는 오래된 문신이 지워지지 않듯 여전히 아픈 역사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무령왕릉은 1971년에 발견되었다. 무령왕은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인 동성왕이 시해되자 왕으로 추대되어 백제로 돌아왔다. 제2의 부흥기를 꿈꾸며 지방 관제를 개편하고 문화를 정리하던 무령왕이다. 벽돌 하나하나에 찍힌 연꽃무늬를 보며 백제의 기술에 다시 탄복한다.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전시되어 있다. 세월의 때를 벗고 배시시 웃으며 왕과 왕비를 지키는 진묘수가 너무 귀여웠다. 국립익산박물관의 마스코트가 석수장이 할아버지 ‘와박사’라면 국립공주박물관의 마스코트는 ‘진묘수’이다.    

  

  백제는 하나의 왕국이지만, 세 도시의 세 가지 색깔을 만났다. 백제는 멸망하고 없지만, 역사는 금강과 같이 흘러 현재에 와 있다. 한때 비단 자락처럼 아름다운 문화로 천하를 호령했던 백제와 만난 오늘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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