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본존불
부처님 오신 날. 부처님을 뵈려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오늘 일 년에 딱 한 번 석굴암 본존불의 유리문이 열린다. 탑돌이 하듯이 본존불을 한 바퀴 돌면서 자세하게 볼 수 있다. 서둘러 도착한 석굴암 주차장은 이미 가득 차 있었다. 몇 바퀴를 돈 끝에 자리 하나를 얻어 주차를 할 수 있었다.
숨을 크게 한번 쉬고 일주문에 들어간다. 굽이굽이 토함산 평지 길을 지난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정신을 차린다. 석굴암 경내에 도착하여 가볍게 합장으로 부처님께 인사하고 석굴암에 들어가는 줄에 나란히 섰다. 다행히 이십여 분 정도 기다린 후에 석굴암에 들어갈 수 있었다. 개미가 줄지어가듯, 우리도 줄을 지어 본존불을 한 바퀴 돌았다. 유리문 밖에서 보던 부처님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뵙다니. 본존불인 석가모니상의 크기와 아름다운 조각에 넋을 잃었다. 마음은 한 걸음씩 천천히 떼며 감상하고 싶었지만, 개미 줄은 자동으로 나를 밖에 내보낸다. 이렇게 돌아갈 수 없다는 마음에 다시 줄을 선다. 두 번째 만남은 또 다른 점을 보여준다. 부처님의 미소가 이렇게 아름다울 줄이야. 옆에서 뵈니 근엄한 얼굴이 아니고 미소 띤 은은한 얼굴이다. 또 개미 줄의 개미가 되어 멈추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절도 삼배를 올리는데, 부처님을 세 번은 뵈어야지 하는 마음에 또 줄을 서서 세 번째 들어갔다. 그쯤에서야 사람들의 줄이 많이 줄고 사람들의 발걸음도 느슨해졌다. 잠시 줄을 이탈하여도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인파가 줄어 뒷벽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경이로움. 한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절을 올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 삼배를 올리고 나왔다.
우리 집에는 석굴암 본존불을 본뜬 조각상이 있다. 중학교 수학여행에서 사왔다. 할머니를 따라 절에 다녔다고 마음에 작은 불심이 있었나 보다. 본존불 조각상은 그렇게 수십 년을 나와 함께 다녔다. 그 본존불을 이번에 실제로 만난 것은 설렘 그 자체였다. 글로만 보거나 사진으로만 보던 석굴암 내부의 조각들도 보였다. 팔부중상, 금강역사상, 사천왕상, 십대제자상,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은 물론이고 석굴암의 천장의 돔은 무엇으로 설명하랴. 그 시대에 이렇게 돔으로 건물을 만든 기술이 있었을까. 그것도 다루기 힘든 화강암으로. 살포시 기둥에 손을 대보았다. 천삼백 년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 사이에 여러 나라가 흥하고 망하고 남의 나라 지배도 받고 전쟁도 겪은 후에 지금에 왔다. 그 오랜 시간 석굴암 본존불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석굴암을 처음 찾았을 때는 수학여행이고, 두 번째 찾았을 때는 십오 년 전에 시어른들과 함께 왔을 때다. 그렇게 두 번 스쳐 지나가고 세 번째는 부산으로 이사하여 아이들과 한해에만 봄여름가을 세 번을 왔다. 아이들 교육 삼아 왔는데, 그때서야 불국사와 석굴암에 감동했다. 나이가 들어서야 그 가치를 알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아이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나름 공부했던 것이 또 다른 날개짓이 되었다. 이것저것 설명을 많이 했지만, 아이들이 기억하는 것은 신라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불사(석굴암)을 지었다는 것뿐이다. 그 유래라도 아니까 다행이라 생각한다.
돌은 숨을 쉰다.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황룡사 9층 목탑은 현재 아파트 20층의 높이란다. 상상으로도 전혀 가늠할 수 없는 탑의 높이이다. 하지만 목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황룡사의 치미만 남아서 우리에게 지나간 황룡사의 영화를 알려준다. 우리나라 최대의 치미라는 명성과 함께. 목탑에서 석탑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으로 기록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도 천오백여 년의 풍파를 견디며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준다. 돌은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아 화려하고 아름답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말한다. 김해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왕릉의 파사석탑은 인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경주 나정은 박혁거세의 탄생을 이야기한다. 동궁과 월지에서 발견된 공작무늬돌은 신라와 서역의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전한다. 그렇게 끝내 살아남은 돌은 돌 이상의 가치가 있다. 애틋한 연인인 아사달과 아사녀 이야기는 불국사 석가탑이 품고 있다. 석굴암은 재미난 이야기보다 찬란했던 과학기술을 보여준다. 돌에 손을 대면 돌이 품고 있던 이야기들이 품 안에 쏙 들어온다.
이제 석굴암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미련이 남는다. 한 바퀴만 더 돌았으면 하는 마음에 자꾸 뒤를 돌아본다. 다시 본존불을 만나려면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 내년에도 꼭 와야지 다짐을 한다. 미련으로 생긴 욕심을 비운다. 비움과 채움 사이. 그 가운데 마음을 둔다. 높이 뜬 해의 빛에서 석굴암 본존불 이마에 박힌 백호의 반짝임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