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밖에서 빛나는 삶의 의미.
로드킬 당한 고양이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아스팔트 바닥 위로 하늘만큼 튀어 올랐다. 이른 아침 택배하러 나서다 건너편 도로에서 목격한 참혹한 광경에 가슴이 떨렸다.
신호를 받아 멈춘 삼거리 교차로에서 잠시 진정하던 나의 시야 속으로 줄지어 늘어선 높고 푸르른 가로수들이 들어왔다. 무성한 나뭇가지들이 바람결을 한껏 품은 채 서서히 일렁였다.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연한 청록빛 나뭇잎들이 눈부시게 물결치며 끔찍했던 삶의 한순간을 서서히 지우고 있었다. 삶의 일상은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쳐갔다.
배송하려 탑차 뒷문으로 다가서는데 배추흰나비 한 마리가 땅바닥에서 파닥인다. 작지만 우아함을 지닌 흰나비는 자유로운 날갯짓 대신 가녀린 경련을 일으키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는 자유로운 영혼도, 우아한 날갯짓으로도 결코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잔혹하고도 선명하게 존재했다.
"참 많이 외롭고 힘드네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배송하던 아내에게 70대 노인이 말을 건넸다. 남편과 함께 택배를 한다는 아내의 말에 5년 전에 부인과 사별한 후 홀로 지내는 외로움과 아픔을 하소연했다. 혼자 남겨진 이가 겪어야 하는 상실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가슴에 차고 넘쳐 시간 짧은 엘리베이터 안이지만 낯선 이방인 같은 택배기사에게 하염없이 흘려보내고 있었다.
배우자와 사별한 후 첫해 동안에 남겨진 이들의 사망률이 유의미하게 높다고 한다. 죽은 사람과 남겨진 이가 서로 특별하게 의존적인 관계였을 경우 특히 '비애'는 파도처럼 밀려든다. 남편을 잃고 그 아픔을 <상실>이라는 작품을 통해 오롯하게 표현했던 작가 조앤 디디온은 그런 비애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비애는 다르다. 비애는 거리가 없다. 비애는 파도처럼, 발작처럼 닥쳐오고 급작스러운 불안을 일으켜, 무릎에 힘을 빼고 눈앞을 보이지 않게 하며 일상을 까맣게 지워버린다.
가까운 사람을 잃고 비애를 겪는 사람들은 목이 조이고, 숨이 막히고, 한숨이 나오는 강렬한 주관적인 고통을 한 시간을 주기로 한차례 씩 파상적으로 경험해야 했다. 비애가 지닌 '파도효과' 다. 프로이트는 "비애가 정신적 혼란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으로 어떤 형태의 의학적 치료나 개입도 무의미하며 심지어 해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극복된다"라고 설명한다.
파도처럼 덮쳐오는 '비애'라는 감정이 우리 곁에 고통스레 머물러 있다는 사실에서 나는 우리의 삶이란 상실과 결핍이 무성한 들꽃정원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비애가 오직 시간만이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사람이 겪는 고통의 원인은 대부분 우리의 내면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를 선택하면 필연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의 실체를 수용하지 못한 대가로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학하듯 힘겹게 사는지도 모른다.
소중한 것들이 영원히 간직되기를 바랄수록 삶은 빠르게, 순식간에 변했다. 내가 알고 원하던 삶은 끝나버리고, 원하지 않던 삶이 우리 곁으로 성큼 소름 돋게 다가선다. 우리 인생 위로 세월이 내려앉을 때면, 영원히 함께할 것 같던 두 사람은 하나가 되고, 남겨진 이는 상실이 밀려드는 비애의 파도 속에 내쳐진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알면서도 피할 수 없이 강제된 삶의 모습이다.
강제된 삶의 무의미성 앞에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회의가 심장을 아프게 할 때면 '인간들은 고통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없는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는 니체의 말처럼 원하지 않는 삶 앞에서 우리는 살아야 할 의미가 못 견디게 궁금해진다.
폭우 속에 배송하던 40대 여성 택배기사가 급류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밤을 낮 삼아 개처럼 뛰어다니며 배송하던 젊은 삼십 대 택배기사가 가족을 남겨두고 쓰러졌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산비탈 바위 곁에서 피어났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들꽃과도 같은 인생들은 과연 어떤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까.
삶은 늘 제멋대로다. 일주일에 단 하루 쉬는 일요일조차 이젠 휴일배송을 해야 한다. 마음을 추스르고 얼마 되지도 않은 수량의 상품을 배송한 뒤 귀가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택배차 핸들을 돌려 집 주변의 커다란 저수지로 향했다. 저수지 변에는 뒤늦게 알게 된 아름답고 유명한 정원이 있었다. 여든 중반인 노부부가 40여 년간 정성껏 가꾸어온 들꽃정원이다. 도착해 보니 아쉽게도 최근 다시 기승부리는 코로나로 인해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들꽃정원은 수없이 변했다. 노란 정원이 되었다가 하얀 정원이, 그리고 파란 정원이 되었다. 삶의 드라마틱한 변화가 강변에 길게 늘어선 이곳에서도 일어났다. 풀협죽도, 보라색 도라지꽃, 산수국, 꼬리조팝나무, 참나리꽃, 바늘꽃 등. 여름에 피는 들꽃들이 한껏 피어나다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면 이 꽃들은 시들어 사라지고 마타리, 공작초, 산부추, 영국장미, 술패랭이가 다시 그 자리를 메꾸며 피어났다.
인생을 닮았다. 들꽃정원에도 상실과 결핍은 어김없이 존재했다. 한 계절의 들꽃들이 아름다움을 '상실'한 채 꽃잎을 떨구고 시간의 '결핍' 속에 시들어갔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새로운 계절을 향한 설렘이 존재했다. 시들어가는 꽃들은, 자신들의 줄기아래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또 다른 들꽃들 너머로 자신의 씨앗을 떨구어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실과 결핍이란 이곳 정원에서는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영속적인 움직임의 일부였다.
여든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낫질을 하며 들꽃정원을 가꾸며 이 모든 과정을 곁에서 고스란히 지켜본 안홍선 여사는 말한다. "꽃은 피는 것도 아름답지만 지는 것, 나이 드는 것도 참 아름답다"라고.
살면서 다양한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유아적인 욕구와 자기애적인 습관을 자연스레 포기할 줄 모르면 들꽃이나 사람이나 성숙한 존재가 될 수 없다. <대상상실>이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현실 속에서 상실되고 결핍되는 상황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뭇가지가 나무 전체를 이해할 수 없듯이, 사람은 인생 속에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 대한 의미를 모두 다 파악해 낼 수는 없다. 인생 전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람은 자신이 지닌 지적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야 가능했다.
자신의 한계 밖을 늘 상상하는 삶.
그래서 우리는 "인생이란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산다고 상상하는 것"이라며 푸념하듯 말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걸까.
움직이는 기차 안에서처럼, 내 안에 사는 나.
내가 원해서 탄 기차가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목적지조차 모른다. 내가 기차의 궤도와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것, 속도도 정할 수 없다는 것, 나는 그 기차를 볼 수도 없고, 누가 기차를 운전하는지, 기관사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도 전혀 알 수가 없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에서 >
장편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스위스 베른에서 평생 고전학을 가르쳐온 고지식한 인물이다. 자신이 탄 인생열차의 궤도를 단 한 번도 이탈한 적도 없고 그럴 생각조차 없이 살아왔지만 포르투갈어로 된 한 권의 책을 통해서 프라두라는 운명적인 작가를 알게 된다.
예순을 앞둔 그레고리우스는 다른 인생을 향해 다가서고 싶은 강렬한 열망에 자신의 인생궤도에서 탈선하기로 결심한다. 익숙했던 자신의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무작정 몸을 실었다.
삶 속에 얼룩진 결핍과 상실은 우리를 삶의 한계선까지 늘 내몰아간다.
사람들은 그제야 자신의 영역 너머에서 선명하게 빛을 내며 존재하는 또 다른 삶의 의미를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그레고리우스가 그런 것처럼, 진정한 삶의 의미에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서는 익숙한 자신의 영역을 버려야 하는 상실의 대가를 치러내야 했다.
자신의 한계 밖에 존재하는 삶의 의미를 빅터 플랭클은 <초의미>라고 정의했다. 초의미란 자신을 초월하고 탈피하는 행위 속에서 발견하는 진정한 삶의 의미인 셈이다.
그가 설명하는 <초의미>란 궁극적으로 나 자신의 한계치인 영역 밖으로 나가 '너와 나'의 또 다른 관계차원으로 들어간다는 사실 위에서 성립가능했다.
"힘들어도 겨울은 가고, 추워도 봄은 오네요."
배송하는 오래된 아파트단지 주변에 노부부가 하는 뻥튀기 차량이 있는데 아내가 즐겨 들리곤 했다. 우연히 사서 먹어보니 뻥튀기가 참 맛있었다. 그 후로 단골이 되었는데 오늘도 나와 계셔서 아내가 배송 중에 방문을 했는데 할머니가 반기시며 시적인 표현이 담긴 인사말을 거네 신다.
봄을 반기는 노부부의 사이가 여간 다정해 보이지 않는다. 할머니를 대하는 할아버지의 태도와 말투가 공손하고 친근함이 가득 묻어난다. 허름한 뻥튀기 차량가게 안이지만 부부사이의 친밀함은 지켜보는 이의 마음마저 평온하게 만들었다. 뻥튀기 노부부는 서로 참 많이 닮았다. 세월이 내려앉는 가운데 노부부는 점점 더 서로에게 향하고 있었다.
나이 들면서 거울 속에 비치는 내 모습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만 엿보인다. 아내는 자신이나 남편의 모습 속에서 아버지들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싫다고 하지만 우리 몸속 깊이 DNA로 새겨진 질긴 인연들은 세월이 내려앉으면서 점점 되살아났다.
싫든 좋든 우리는 인생 속 또 다른 누군가를 닮아가고 있었다.
아직도 상실의 아픔에 힘겨워하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누일 자신만의 작은 세상을 노래하는 <어른>의 가삿말이 30대인 아이유도 너무 좋지만, 세월이 내려앉은 70대인 정미조의 목소리에 더 깊이 와닿는 이유는 뭘까.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인생의 경계 끝, 언더그라운드에 내려선다는 의미다. 나의 한계 밖에 존재하는 의미가 의식이 될 때면 세월이 내려앉은 것들은 무엇이든 편안하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삶을 향해 들끓던 우리의 기대감은 사그라들고,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더 이상은 우리의 갈증을 해소시켜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저 온몸에 힘을 뺀 채 바라볼 때면 생겨나는 솜털 같은 편안한 이 느낌이 그 무엇보다 좋아진다.
시간이 내려앉아 빛바랜 카페에서 백발의 마스터가 오랜 정성으로 내려준 수망 로스팅한 커피를 아내와 함께 마시면서 세월이 흠씬 묻어난 '니나 시몬'의 목소리가 들려주는 삶의 편안함을 함께 음미하고 싶다.
강제된 삶의 무의미성이, 죽음 같은 권태로움이, 삶의 불합리함에 대한 허망함이 내 삶 속 여기저기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를 때면 나는 가만히 내 삶의 실체이자,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의미인 나의 아내를, 나의 아들을 향해 손을 뻗어 느끼곤 한다.
굳게 닫힌 들꽃정원의 철문사이로 세월이 내려앉은 하얀 백발의 그녀가 이른 아침 햇살 속에서 넘실거리는 정원의 들꽃들에게 맨발로 다가가 가슴에 품은 채 한없이 앉아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상실과 결핍 속에 곧 사라질 들꽃들임을 알기에 그녀는 이 생명들이 한없이 시리게 사랑스러웠던 거다. 들꽃이 시드는 의미를 잘 알기에, 그래서 활짝 핀 들꽃들의 이 순간이 그녀에게는 너무나 황홀하게 아름다운 것이다.
인생이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상상하는 것이다. 가만히 내려앉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한계 밖 또 다른 존재를 향해서,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리스본 야간열차에 몸을 실은 그레고리우스처럼 상상하고 꿈꾸며 나아가고 싶다. 비록 현실 속 나의 삶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요동쳐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