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더(Powder) 아래 묻히길 거부하는 진짜들의 외침
나성결 목사의 목양실, 마호가니 책상 위로 비서가 에스프레소 한 잔을 올려놓았다. 커피잔 위로 한줄기 김이 피어오르고 그 옆에는 화려한 금박으로 치장된 성경이 펼쳐져 있다. 아침 햇살이 금박에 튕겨져 나가듯 반사되어 어두운 대리석 바닥을 비스듬히 뒤덮었다. 영롱하고 매혹적인 빛이다. 하지만 어두운 대리석 바닥을 감추는 차가운 아름다움이었다. 신성한 파우더(Powder)는 이른 아침마다 그렇게 덧씌워졌다.
그는 창가로 다가섰다. 찌르레기 마을의 작고 노후한 집들이 산비탈을 따라 모여 있었다. 노후한 슬레이트 지붕, 뒤엉킨 전선, 금이 간 담장들. 정갈한 목양실 유리창에 비친 그 풍경은 마치 흰 셔츠에 튄 얼룩처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애초부터 사라졌어야 할 대상이었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여호수아서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뜨며 중얼거렸다.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
신이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그는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확신조차 몹시 흔들린 적이 있었다. 연예기획사에서 내쫓기듯 나와 고시원 바닥을 전전하던 시절, 그는 한때 신을 원망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무능과 가난뿐이라고 생각했던 사역초기의 전도사 시절, 굶주림과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한쪽 폐가 망가졌다. 피 섞인 기침과 기도소리가 섞이던 그날의 새벽과 밤들을 그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그 기억들이 때로 명치끝을 저릿하게 울리며 느껴질 때마다, 그는 성경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신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자를 선택한다. 그것은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지금 자신이 거머쥔 것들, 수천 명이 모이는 예배당, 지역의 유력한 인사라는 지위, '왕 같은 제사장'처럼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현실은 신이 선택한 자신에게 부여한 응답이었고 응분의 대가였다. 신이 자신을 선택했기에 그에겐 성결한 사명이 주어졌다. 허락받은 거룩한 것들을 위협하는 불결한 것들은 깡그리 모두 지워내는 냉혹한 순종이었다.
저 산비탈의 찌르레기 마을도, 그곳의 사람들도. 그 대상이다. 나성결은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목으로 서서히 사라진다. 사랑하는 딸 미리의 배신조차. 그런 사명을 위해 기꺼이 감당해야 할 쓰디쓴 시련의 잔이다. 나성결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음미하기로 했다.
설교하는 요나단 전도사의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좁은 가정집 거실이었다. 참석한 사람들은 어깨가 맞닿아 붙어 있고, 누군가 마트에서 가져온 종이 상자가 강단을 대신하고 있었다. 젊고 신실한 설교자는 무릎을 꿇은 채 성경을 읽었다.
내가 집이 없을 때 너희가 내게 잠자리를 내주지 않았고,
내가 떨고 있을 때 너희가 내게 옷을 주지 않았고...
-마태복음 25장 41~43절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에 열정이 실려 있었다. 사람들의 감정과 지갑을 착취하며 예수를 도구 삼아 유력자가 된 거짓된 설교자들을, 경고하는 예수님의 설교에 관한 내용이었다.
동구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듣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구약성경 속의 주인공 자리는 항상 왕과 부유한 지도자들이 차지했다. 부유한 아브라함, 용맹한 다윗 왕, 지혜로운 솔로몬 왕. 부유하고 똑똑한 영웅적인 존재들 틈에 찌르레기 마을사람들처럼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 끼어들 자리는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왜 신약성경 속의 예수님은 그들의 반대편인 마구간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을까. 배고프고 헐벗고 힘없이 방황하던 가난한 무리들의 열광적인 찬사와 박수를 받으시면서 말이다. 지금 이곳 찌르레기 마을에는 왜 가난한 이를 위한 예수는 안 보이고 화려하고 힘 있는 나 성결 같은 목사만이 침묵하는 신을 대신하고 있는 걸까.
너희가 한 일이라고는 나를 이용해 유력자가 된 것뿐이다. 너희에게는 나를 감동시키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여기서 나가거라.
-마태복음 7장 21~23절
동구는 요나단 전도사의 땀방울이 성경 위로 떨어지는 걸 바라보았다. 진짜는 파우더(Powder, 분칠)를 바르지 않는다. 진짜는 그냥 땀을 흘린다.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엄길용이 나성결 목사의 목양실 문을 나선 것은 오전 열 한시가 넘어서였다. 복도에는 비서진인 전도사들의 책상이 줄지어 배치되어 있었고, 그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대기업 회장님 집무실 같은 풍경이었다. 마을공동체 사업의 취지를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러 갔다가, 그는 오히려 서늘한 말만 듣고 나섰다.
"시장님은 잘 계시죠? 조만간 한번 만나자고 하시던데... 찌르레기 마을은 우리 시의 발전을 저해하는 곳입니다. 저와 교회는 늘 긍정적이고 활력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사무관님도 우리와 뜻을 함께 하셔야 본인에게도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요. 물론 잘 알아서 하시겠지만." 나성결 목사의 말투는 언제나 정중하고 온화했다. 그래서 더 서늘했다.
오후에 그는 찌르레기 마을로 올라갔다. 마을공동체사업의 가능성과 재개발사업 추진현황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재개발추진위 사무실은 살벌했다. 보상금을 두고 주민들이 고성을 질렀고, 종이컵과 서류들이 테이블 위에서 뒤집혔다.
추진위 대표가 엄길용의 옆으로 다가와 낮게 말했다. "사무관님, 솔직히 얘기합시다. 이 마을 사람들 진짜로 여기 살고 싶어서 사는 거 아닙니다. 돈 되면 다 나가요. 그게 사람 심리 아닙니까." 그들의 목소리와 표정에는 날이 서 있었다. 돈을 향한 결기 어린 살기들이 느껴진다.
마을회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할머니 한 분이 대파 한 단을 겨드랑이에 끼고 지나치다 정겹게 인사를 한다. "사무관 양반, 요즘도 바쁘시죠? 수고하세요." 할머니가 지나간 담장 아래로 봉선화가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금이 간 화분에서 쑥갓이 구부러지지 않고 꼿꼿하게 자라고 있었다. 뒷산 뽕나무 숲 어딘가에서 산새 소리가 흘러내렸다. 엄길용은 잠시 걸음을 멈춘 채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돈 앞에서 변하는 사람들의 살기 어린 얼굴, 서로 오가며 다정스레 안부를 건네는 찌르레기 마을사람들의 정겨운 얼굴. 과연 어느 쪽이 사람이 지닌 진짜 본성일까, 그의 질문이 작성하던 수첩의 빼곡한 글자들 위로 스물 거리며 맴돌다가 이내 뇌리 속 메아리가 되어버렸다.
아지트 창문으로 엄길용이 마을을 서성이는 뒷모습이 보였다. 동구는 핸드폰 스피커를 볼륨 낮게 틀어놓은 채 Louder 가사를 중얼거렸다. 흥얼거리다가 달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달봉의 얼굴이 어두웠다. "형. 왜 그래." 달봉은 대답 대신 창밖으로 시선을 밀어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동구는 더 묻지 않았다.
점심 무렵이었다. 대리점 사무실, 소장의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서류 한 장도, 커피 한 잔도 없는 그 텅 빈 책상이 오히려 달봉을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채워진 것보다 비워진 것이 더 무서울 때가 있다.
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달봉이. 아지트 계약서 있잖아. 건물주 설득해서 그거 그냥 나한테 넘겨."
"... 무슨 말씀이세요."
소장이 의자를 뒤로 젖히며 말을 이었다.
"본사에서 그 건물 매입하려고 해. 나성결 목사 쪽에서 요청이 들어왔나 봐."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마치 걱정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너도 계속 쥐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안 넘기면... 너 남은 집하물량 전부 빼고, 달봉이 너랑 동구, 둘 다 정리하라고 위에서 그러네.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달봉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 펼쳤다. 다시 쥐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소장의 얼굴엔 온기가 없었다. 파우더를 두껍게 바른 것처럼 차갑고 무심하게, 그는 그냥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날 저녁, 아지트에는 동구, 병만, 진구가 냄비를 가운데 두고 앉아 있었다. 달봉이 늦게 들어왔다. "형, 오늘 왜 이렇게 늦어. 배고파 죽겠다." 동구가 손을 뻗어 달봉의 어깨를 탁 쳤다. 달봉은 웃었다. 습관처럼 굳어진 미소였다. 라면을 먹었다. 모두의 젓가락이 분주했다.
달봉의 젓가락만 느렸다. 국물이 식어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동구가 불쑥 말을 꺼냈다. "있잖아, 다음 달 계약 갱신할 때 건물주한테 우리가 직접 얘기해 보는 거 어때? 장기 임대로. 중간 안 거치고."
달봉의 숟가락이 멈췄다. 병만이 슬쩍 눈을 돌렸다. 진구도 라면 그릇에 시선을 내렸다. 달봉은 아무 말 없이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뜨겁지 않았다. 이미 식어 있었다.
그날 밤, 혼자 밖으로 나온 달봉은 소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계약서, 내일 가져갈게요.'
다음 날 저녁, 동구는 아지트 문 앞에서 당황하며 서 있었다. 자물쇠가 바뀌었다. 손잡이를 다시 당겼다. 잠겨 있었다. 다시 당겼다. 이마를 문짝에 댔다. 차가운 철문의 냉기가 이마를 타고 내려왔다. 녹이 슨 문짝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진구가 골목을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동구야. 달봉이 형이... 어젯밤에 소장한테 계약서 넘긴 것 같아."
동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박자. 두 박자. 세 박자. 숨을 들이마셨다. 천천히. 마치 숨을 고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터져 나오는 것을 억누르고 있었다. 등에서 열이 올랐다. 주먹 쥔 손이 새하얗게 떨렸다. 입 안에서 혀가 윗니를 꽉 눌렀다. 이 공간이 우리에게 어떤 곳인데, 울분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잠겨진 문 앞에서 우리들의 모든 것이 잠겨버린 듯 절망감에 휩싸였다. 머릿속에서 가사가 흘렀다. 며칠 동안을 혼자 중얼거렸던 그 가사들이 목구멍 깊은 곳에서 다시 긁혀 올라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가 올라왔다. 동구는 입술을 열었다. 처음에는 낮게, 거의 속삭이듯. 그리고 점점 더 크게 외쳤다.
Yeah forgive me — 그게 뭐든 간에
보기 싫어 네가 찍어 바른 파우더
어찌 보면 내가 너의 다스베이더
아비라고 해도 이젠 못 믿겠어
골목이 울렸다. 슬레이트 지붕 위에서 비둘기 떼가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돈 앞에서 팔아버린 니 자존심
소모품처럼 날 대하면서 입으론 No
각설하고 말할게 — 넌 날 떠났어
그냥 꺼져버려 저 뒤로 — Louder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달봉이었다. 동구는 천천히 돌아봤다. 달봉이 골목 모퉁이 끝에 서 있었다. 더 들어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 박혀 있었다. 양손이 옆구리에 붙어 있었다. 눈이 젖어 있었다. 둘 사이의 골목이 길었다.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병만과 진구는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시선을 바닥에 깔았다.
찌르레기마을 비탈길 가에 낡은 택배차 두 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 옆에 요나단 전도사의 오래된 오토바이가 기울어진 채 세워져 있고, 골판지 위에 매직으로 쓰다 만 문구들이 흩어진 채 뒹굴었다. '재개발 반대'. '우리 동네 우리가 지킨다'. 비가 한 번 맞은 글씨들은 번졌지만, 지워지지는 않았다.
동구는 아지트 문 앞 계단에 앉았다. 폰에서 Louder가 흘러나왔다. 이어폰을 꽂지 않았다. 그냥 흘렸다.
소리가 골목을 타고 산비탈 끝까지 내려갔다. 바람이 실어가는 것처럼.
파우더는 결국 씻긴다.
비가 오면, 땀이 나면, 눈물이 흐르면.
그래도 진짜는 남는다. 그것이 진실임을 동구는 믿고 있었다.
Yeah forgive me.
그게 뭐든 간에.
보기 싫어 네가 찍어 바른 파우더.
어딘가에서 전화가 울렸다.
동구의 폰 화면에 이름이 떴다.
나미리.
<07화 주제곡 Louder>
https://youtu.be/q7pWnwVs7iE?si=2wwLqvhAs93kseUP
<작가의 한마디>
파우더가 씻기는 순간, 무엇이 남아 있을지.
동구와 나미리가 마주하게 될 진실이 궁금하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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