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en Tree

설계된 반격, 찌르레기의 합창

by 코나페소아

방송국 무대 조명 아래서 폭풍처럼 뱉어냈던 랩의 전율이 아직도 손끝에 잔떨림으로 남아 있었다. "니 존재 자체가 내게는 민폐"라고 쏘아붙이며 가짜들의 서사를 찢었던 동구의 외침이 아직도 생생했다.


하지만, 오늘 새벽의 인천공항의 드넓은 공간은 그 뜨거운 열기를 단숨에 얼려버릴 만큼 차갑고 냉혹하기만 다.


나성결 목사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딸 미리를 강제 유학길로 떠나보내고 있었다. 공항 검색대 앞에서 뒤돌아보는 미리를 향해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바라보고 있었고 아빠 나 목사는 특유의 온화한 미소로 배웅하고 있었다.


이륙한 비행기 창가에서 구름에 싸여 멀어지는 공항 풍경을 바라보던 미리는 깊은 상념에 빠졌다. 아빠가 유학을 가라고 단호하게 명령하듯 말했지만, 미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오빠의 부모님들과 얽힌 아빠와의 악연을 우연히 알게 된 순간, 미리는 큰 충격을 받고 흔들렸다. 아빠가 동구 오빠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이유가 있었다. 사실을 알게 된 미리는 모두에게서 멀어지고만 싶었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질게.
내가 귀챦다는 말이.
상처가 될 줄은 몰랐네.
이젠 심어 Green Tree.

공항입구 가로변에 택배차를 잠시 멈춘 동구는 운전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상실로 인한 깊은 아픔이 밀려왔다. 여전히 아른거리는 미리의 미소와 거리를 거닐면서 나누었던 대화들이 이제는 모두 의미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동구는 가슴이 저리게 아팠다. 동구는 옆좌석에 놓인 두툼한 검정바인더를 바라봤다. 미리의 선배인 요나단 전도사가 미리가 떠나며 부탁했다며 건네준 자료집이었다.

돈과 너는 참 닮았어.
잡고 싶어도 잡지 못하니.
너와 내가 다른 삶을 살았기에.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겠니?


​아지트로 돌아온 동구는 책상 위에 놓인 검은 바인더를 한동안 응시했다. 차갑게 식은 공항의 공기를 머금은 듯, 손끝에 닿는 바인더의 플라스틱 표지는 소름 끼치도록 매끄럽고 차가웠다. 하지만 조심스레 첫 장을 넘기자마자 쏟아져 나온 미리의 열정적 흔적들은 동구의 가슴에 다시금 뜨거운 불을 지폈다.

그 안에는 나미리가 아버지가 잠든 밤, 서재의 서랍을 몰래 뒤져가며 목숨처럼 빼내 온 비밀서류가 '더 트리 활동 및 재개발 저지를 위한 전략'과 함께 꼼꼼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쫓겨나지 않기 위한 저항의 기록이 아니었다. 찌르레기 마을을 '청년 힙합 문화의 성지'로 브랜딩 하여 철거의 명분을 합법적, 도덕적으로 무력화하려는 미리의 철저하고도 치밀한 설계도였다.

• ​실행 방안 1: 아지트를 '청년 문화 예술 공유 공간'으로 등록해 법적 보호망을 구축할 것.
• ​실행 방안 2: 마을 어르신들의 삶과 마을 자원을 조사하여 청년 예술가들과 협력해 성공적인 마을공동체사업을 추진하고 있음을 부각해 각계각층의 지원을 유도할 것.
• ​실행방안 3: 이 모든 과정을 힙합 가사와 영상으로 옮겨, 온라인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찌르레기 마을의 가치를 세상에 알릴 것.

천천히 바인더를 넘기던 동구는 미리가 남긴 손 편지를 발견했다. 차마 오빠의 눈을 바라보며 말할 수 없어 글을 남긴다며, 아빠를 대신해 용서를 빈다는 미리의 글에 동구의 시야가 흐려졌다. 그리고 바인더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나성결이 철저히 숨겨온 악행의 비밀이 드러났다.


바인더 뒤부분에는 나성결 목사가 과거 대형 연예기획사의 실장으로 일하던 시절, 작곡가였던 아버지 '진수'의 저작권을 가로챈 불법계약서와 아버지가 미처 내놓지 못한 미발매 곡 원고들이 들어있었다. 나성결이 쌓아 올린 '거룩한 성전'이 사실은 아버지의 영혼을 갈아 만든 약탈물이었다는 사실에 동구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엄마 임명자는 유난히 마음이 심란했다.

방 안에서 동구가 온라인에 올릴 곡이라며 샘플링한 곡을 반복해서 듣는데 30년도 넘은 희미한 추억들이 자꾸만 되살아났다. 남편 진수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과 함께 자신 앞으로 청구된 거금의 계약파기에 따른 배상청구서 앞에서 그녀의 삶은 모든 것이 멈추어 버렸다.


당시 신인가수로 각광을 받기 직전에 갑자기 대중무대에서 사라진 인기가수 '명아'. 그녀가 바로 동구의 엄마였다. 그저 살갑고 의리 있게 자신을 보살펴준 기획실장인 나성결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자신과 아들은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자꾸만 잊힌 듯 감춰야 했던 아픔과 슬픔이 되살아나 임명자는 부엌에서 떨리는 두 손을 꼭 부여쥔 채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동구는 문득 주방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낮은 허밍소리가 자신의 비트와 완벽하게 어우러짐을 직감했다. 유난히 찬송을 잘 부르던 엄마였지만 오늘은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가만히 엄마가 들어와 옆에 앉으며 말했다.


​"동구야, 이 부분은 단순히 입으로 내뱉듯 해선 안 돼. 네 아빠처럼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그 감정을 끌어올리듯 서서히..."

그것은 단순한 보컬 코칭이 아니었다. 나성결이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혀 흩어졌던 가족의 영혼을 되찾는 성스러운 의식 같았다.


30년간 잃었던 자신의 노래를 자신의 목소리로 아들의 비트 위에서 다시금 숨 쉬듯 내뱉기 시작했다. 엄마의 보컬이 더해지며 동구의 랩은 단순한 외침을 넘어서 오래전 약탈당했던 아버지의 영혼과 엄마의 슬픔을 현대적인 힙합 비트 위에서 다시 되살리고 있었다. 빼앗겼던 목소리가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아가는 동안, 동구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카타르시스에 온몸을 떨었다.


​백발인 마을이장은 마을노인들과 대화를 하며 목소리를 채집하고, 청년회장과 뽕나무 숲에서 나는 오디열매를 공동으로 생산하는 과정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동구와 그의 친구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는 평소 동구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낡은 평상에 앉아 "나성결 그 악마 같은 인간만 아니었어도, 진수 그놈이 살아있었다면 마을이 이 꼴은 안 됐을 텐데..."라며 마른침을 삼키며 자책하곤 했다. 30년 전 진수의 죽음 앞에 비겁하게 침묵했던 기억은 노인의 심장을 갉아먹는 오랜 회한이었다.

하지만, 늙은 이장은 동구가 마을청년들에게 들려주던 거친 랩 멜로디 속에서 알 수 없는 익숙함에 황급히 시선을 고정했다. 그 선율 속에서 스러져간 마을 후배 진수의 고집스러운 영혼이 폭발하듯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래, 닮았구나. 참 많이 닮았어."

노인의 가슴속에서 평생을 짓눌러온 죄책감이 뜨거운 분노와 결의로 터져 나왔다.

이장은 마을 청년회장에게 동구와 적극 협력해서 재개발 추진세력에 맞서는 '방패'가 되어주라고 조언했다. 또한, 시청의 마을공동체사업 담당인 엄길용 사무관에게 동구를 소개하며 미리의 전략이 현실의 법망 안에서 뿌리내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유학지에 도착한 미리가 보내온 짧은 메시지 하나가 동구의 휴대폰 화면을 밝힌다.

"아무것도 변한 건 없어. 당초 우리 계획대로 시작해.

잠시 떨어진 것뿐이야. 우린 곧 만나게 될 거야."

동구는 낡은 택배차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이제 찌르레기 마을의 가파른 오르막은 도망쳐야 할 길이 아니라, 빼앗긴 역사를 되찾기 위해 반드시 올라야 할 전장이었다. 아지트에서 시작된 묵직한 베이스음과 나지막이 읊조리는 동구의 랩이 온 마을을 덮은 어둠을 서서히 밀어내고 있었다.


I'm a back to the future.

I'm a back to the future.

자꾸만 나를 가엽게

쳐다보지는 말아 줄래

이제는 Can non stop.


https://youtu.be/j7pjthJkj7U?si=XB92D36UUq5lzl4E


이전 05화Living my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