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 위에 단단히 뿌리내린 나무
찌르레기는 본래 남의 둥지를 빌리기보다
제 몸 하나 뉘일 둥지를 집요하게 찾고 집착하는 새다.
산동네 ‘찌르레기’ 마을도 그랬다. 갈 곳 없는 이들이 하나둘 가파른 비탈에 몸을 기대어 쌓아 올린 판자벽과 슬레이트 지붕들은, 마치 거대한 새가 벼랑 끝에 틀어쥔 둥지처럼 보였다.
비록 비바람에 낡고 퇴색되었을지언정, 이곳은 한 번 뿌리내리면 결코 터전을 포기하지 않는 찌르레기의 생존 본능이 깃든 곳이었다.
지는 해가 마을 꼭대기 전신주에 걸리면, 낡은 시멘트 담벼락은 잠시 금빛으로 일렁였다. 골목마다 배어 나오는 된장찌개 냄새와 누군가의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 가락이 공기 중에 부유했다. 평온했다.
적어도 그 '붉은 글씨'를 보기 전까지는. 골목 구석구석, 주인 떠난 빈집 대문마다 붉은 페인트로 휘갈겨진 ‘빈집’ 혹은 커다란 'X' 표시가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그것은 곧 닥쳐올 거대한 포클레인의 발톱을 예고하는 비명이었고, 재개발 추진 안내문은 죽은 자의 몸 위에 덮인 수의처럼 벽마다 덕지덕지 붙어 바람에 파르르 떨었다.
이 위태로운 평화 속으로 동구와 달봉이 걸음을 옮겼다. 마을회관 뒤편, 약 60평 남짓한 허름한 컨테이너 창고. 달봉이 상품 보관용으로 쓰던 이 낡은 껍데기가 이제 그들의 새로운 심장이 될 터였다.
동구가 먼지 쌓인 창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괜찮겠어?" 달봉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동구는 짧게 답했다.
"이 정도면 과분하지. 몇 군데만 손보면 우리 아지트로 최고야."
그는 창고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마지막 햇살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우리 같은 인생은 껍데기는 아무래도 괜찮아.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렸으니까. 여기서 진짜를 시작해 보자고."
강진구의 1.5평 고시원 방은 죽은 공기들로 가득했다. 창문 하나 없는 그곳에는 찌든 땀 냄새와 채 마르지 않은 빨래의 눅눅한 습기, 그리고 스스로를 가둔 침묵만이 부유했다.
그에게 고립된 좁은 사각의 고시원 방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진구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손등을 문질렀다. 식당 주방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며 얻은 씻기지 않는 기름때의 감각이 여전했다. 아무리 세제로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던 식탁 위의 갈색 소스 자국. 그는 그 얼룩을 닦아낼 때마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영혼에 새겨진 가난과 소심함의 흔적 같다고 느꼈다.
내 주변을 정리하고
이제는 깨끗이 입어 내 옷.
동구가 만든 곡 ‘Clean’의 가사를 읊조리자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진구에게 ‘Clean’은 단순히 옷을 세탁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타인의 무시와 노동의 비루함이 묻은 영혼을 박박 문질러 닦아내는, 일종의 영혼의 정화였다.
진구는 고시원 복도를 지나 찌르레기 마을의 창고 아지트로 향했다. 무거운 철문을 열자, 고시원의 죽은 공기와는 전혀 다른 것이 그를 맞이했다.
수십 년의 세월이 겹겹이 쌓인 퀴퀴한 먼지 냄새였으나 폐쇄된 방의 악취와는 달랐다. 넓은 공간을 가로질러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과 섞인 그 냄새에는 기묘한 개방감이 서려 있었다. 진구는 처음으로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는 식당, 편의점, 마트 계산원까지 세 탕의 아르바이트를 뛴다. 누군가는 그 과잉된 노동을 가엽게 여겼지만, 진구에게 그것은 몸부림이었다. 몸을 극한으로 몰아붙여야만 사람들의 시선에서 오는 공포를 잊을 수 있었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가면 뒤에 자신의 소심한 자아를 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져온 장비를 세팅하고 비트가 흘러나오는 순간, 진구의 안에서 무언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굽어있던 어깨가 천천히 펴졌고, 주방 보조의 기름때 묻은 손은 마이크를 움켜쥔 채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보던 그의 시선이 허공을 뚫고 정면을 향했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고립된 섬이 아니었다. 창고 바닥을 뚫고 올라온 단단한 나무 기둥처럼, 그는 자신의 고통을 한 마디의 가사로 뱉어내며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나성결 목사의 서재는 깊은 침묵 속에 빠져 있었다. 그는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22년 전, 미리가 태어난 지 백일도 되지 않아 원인 모를 고열로 사경을 헤매던 밤. 가난한 전도사였던 그는 차가운 예배당 바닥에 엎드려 사흘 밤낮을 금식하며 울부짖었다.
'주님, 이 아이만 살려주신다면... 이 아이를 당신의 가장 정결한 그릇으로 키우겠습니다.'
기적처럼 살아난 미리는 그에게 단순한 딸이 아니라 신이 맡긴 '거룩한 유산'이었다. 하지만 그 지독한 사랑은 딸의 주변에 너무나 높고 단단한 '성결의 성벽'을 쌓고 말았다.
그런 딸과 나성결은 요즘 점점 멀어지는 지금 상황에 좌절감을 느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의 서재를 지나치다 들려온 깊은 아빠의 한숨을 들은 나미리는 한동안 고개를 떨군 채 가만히 서있었다.
나미리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 밑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 완벽한 방 안은 언젠가부터 숨이 막힐 듯한 유리감옥처럼 변해버렸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당신의 뜻이 있는 진정한 곳은 어디인가요?
그녀는 며칠 전 동구의 산비탈 낡은 집에서 드린 가정예배를 떠올렸다. 곰팡이 냄새가 나고 비좁았지만, 그곳에는 살아있는 '생명'의 고동이 있었다. 간절히 기도하는 엄마 임명자의 눈물, 해맑게 "아멘'이라고 말하곤 환하게 웃던 동구 오빠의 모습.
미리는 떨리는 손으로 성경을 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이제 너에게 진실을 알려주겠다.
어부로 살아가는 갈릴리 바닷가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믿었던 베드로였다.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그에게 물은 첫마디였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진짜 나의 뜻을 아느냐. 그리고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이냐.
..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너를 데려갈 것이다.
나를 따라오너라.
(요한복음 21장 17~19)
순간 미리는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가 쌓아 올린 성결한 성벽 안에서 보호받는 지금의 삶은 진짜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발에 흙을 묻히고, 아버지가 '얼룩'이라 부르는 이들의 눈물을 닦으며, 내가 원하지 않는 비천한 곳으로 기꺼이 끌려가는 삶임을 깨달았다.
미리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그녀는 온실 속 화초로 남기를 거부했다. 대신, 아버지가 물려준 그 치밀한 논리와 철저한 분석력을 거룩한 성전이 아닌 버려진 이들을 위해 쓰기로 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가르쳐준 '은사'를 하나님의 뜻이 있는 진짜를 위해 온전히 다시 되돌려 드리는, 가장 아프고 도발적인 순종이었다.
미리는 깊은 감동과 고통을 동시에 느끼며 침대에 얼굴을 깊이 파묻고 흐느꼈다.
힙합 공동체 '더트리'의 새로운 아지트가 활기로 가득 찼다. 멤버들이 장비를 세팅하고 리듬을 타는 가운데, 동구가 먼저 랩을 시작하고 오병만과 달봉이 흥을 돋웠다. 드디어 동구가 진구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주춤하던 진구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가사지 'Working'을 꺼냈다. 처음엔 가늘던 그의 목소리는 점점 단단해졌고, 아지트 안의 모두가 일어나 후렴구를 따라 부르며 열광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 뼈 빠지게 일한 뒤
토요일 일요일은 다시 / 마트 가서 일해.
이게 내 삶이네, 씻기지 않는 때.
내게 중요한 건 오직 / 내 오늘치의 벌이.
관심 없는 헛소리는 / 머리에서 버림.
I'm for real / 살아온 대로 다 적어내.
진구의 눈에 생기가 돌며, 그의 모습은 비트 위에서 한그루 아름드리 풍성한 나무로 서서히 변해갔다.
환호성이 가득한 창고 안 광경을, 말없이 묵묵히 지켜보던 나미리가 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가 마이크 앞에 서자 창고 안의 분위기가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순수한 신학생의 눈망울 너머로, 수천 명의 성도를 휘어잡던 나성결 목사의 날카로운 카리스마와 총명한 눈빛이 겹쳐 보였다.
"이제부터 제가 힙합공동체 '더트리 The Tree'의 매니저예요."
미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박또박 명확하게 울려 퍼졌다. 달봉이 "응? 네가?"라며 입을 벌렸고, 동구는 흥미롭다는 듯 비트를 낮추고 그녀를 응시했다. 미리는 들고 온 빼곡하게 정리된 노트 한 권을 펼쳤다.
"먼저 활동 스케줄부터 잡을게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각자 생업에 집중하되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는 공동 연습 및 비트 메이킹 시간이에요. 금요일은 우리만의 '리얼 라이브' 영상을 제작할 거고, 주말은 오디션 준비와 거리 공연에 올인합니다."
그녀는 이어 창고 벽면에 붙은, 이제는 익숙해진 재개발 안내문을 단호하게 가리켰다.
"이 아지트, 함부로 못 건드리게 할 거예요. 구청 협의회 일정과 재개발 조합의 법적 틈새를 제가 이미 파악해 뒀거든요. 우리가 여기서 '문화적 가치'를 생산하고 있다는 근거만 확실히 만들면, 행정 대집행도 쉽게 못 합니다. 제가 아빠 곁에서 배운 게 있다면, 명분을 세워 성결한 성벽을 지키는 법이죠."
멤버들은 압도당한 듯 숨을 죽였다. 미리는 쉴 틈 없이 역할을 배정했다.
"진구 오빠, 오빠의 그 예민한 청각을 시각으로 옮겨요. 모든 영상 촬영과 편집은 오빠 담당이에요. 병만 오빠, 오빠의 에너지는 SNS 홍보에 쏟으세요. 우리를 세상에 퍼뜨릴 바이럴의 핵심이니까요. 달봉 오빠는 아지트 관리와 행사 진행, 외부 보급을 책임져 주세요."
마지막으로 미리는 동구를 바라보았다. 동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구 오빠는 이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음악의 방향을 잡아줘요. 저는 오빠 곁에서 이 모든 계획이 차질 없이 돌아가도록 지원할게요. 오빠들은 음악만 해요. 세상과의 험난한 싸움은 제가 설계하고 대비할 테니까."
동구가 짧게 답했다. "좋아. 미리가 설계하면, 우린 달리기, Go up 만 한다."
"와아~" 멤버들의 함성이 커다란 비트와 함께 터져 나왔다.
정리가 끝난 창고 밖으로 다섯 명의 청춘이 나란히 서서 가파른 언덕배기 '찌르레기' 마을의 불빛을 내려다본다. 이제 시작이라는 다짐과 함께 동구의 'Clean' 아웃트로가 흐른다.
내 작품들은 여기 모여 유산이 돼.
불확실성이란 고민은 다 뒤로 미룬 채,
이젠 다 내려놓은 채 난 앞으로만 갈래.
https://youtu.be/-TOuiSUeDnQ?si=kchF3CKEgDYtfPF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