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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미니 Jan 20. 2024

이혼일기(46)

파파데이

점심을 먹고 들어오니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와 있었다. 다급하게 다시 걸어보니 아이가 열이 난다고 했다.

 하필이면 오늘은 상사와 점심을 먹고 산책도 하고, 다른 과 사무실도 들러 수다를 한참 떨었다. 그러느라 점심시간을 두시간이나 넘치게 썼는데 그 동안 선생님이 전화를 두번이나 하셨다.

 잠시 외출하겠다고 이야기하고는 바로 뛰쳐나와 직장 앞의 어린이집으로 가니 축 쳐진 모습으로 아이가 보이고, 나를 보더니 입을 삐쭉거리면서 손을 뻗는다.

 우리 애기 많이 아파?
- 응....

 비록 아프고 놀라긴 했지만, 이렇게 바로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안을 수 있는 것은 정말 복이다. 아플 때, 엄마가 보고 싶을 때, 절실하게 엄마가 필요할 때. 이제 우리 아기는 언제라도 엄마를 볼 수가 있다.

 아이를 안고 주변 병원을 안내 받는데, 선생님이 한마디를 덧붙이신다.

어머님 근데 아버님 번호도 알려주시면, 이렇게 급할 때는 아버님께 알려드릴 수 있어요. 시간 나실 때 키즈노트에 적어주세요.
 
아.. 네에. 하고 빨리 빠져나왔다.

 하필이면 병원들 점심시간인 1시여서 1시간 내내 병원만 찾아돌아다녔다. 어른들 내과는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고, 애써 찾아 들어간 소아과는 키성장을 주로 보는 클리닉이란다. 어린이집에서 안내해준 곳은 이비인후과였는데.. 아무래도 감기는 아닌 것 같아 소아과를 찾아 땀에 흠뻑 젖도록 아기를 안고 건물을 들락날락 거렸다.

 아이와 나의 머리카락이 엉켜 붙어도, 다시 회사로 돌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어도, 그래도 아플 때 우리 아기를 살이 맞대도록 안고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 참 감사하고 기쁘다. 생각을 했다. 엄마와 심장박동을 맞추는 것이 몸이 불편한 인간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될까. 정말 잘했다. 그 짧은 시간에 직장 근처로 이사를 온 것도, 이혼을 시작한 것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다니다보니 어린이집에서 2키로미터는 족히 떨어진 곳까지 가서 간신히 진료를 보고, 체한 것 같다는 처방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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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 전화번호를... 어떻게 할까. 그냥 솔직히 이야기할까, 아니면 남편 전화번호를 등록할까. 사실 이제 그가 아이를 억지로 뺏어갈 가능성은 거의 없는데, 그렇더라도 왠지 아이의 사생활은 꼭 내 사생활같아서 평범한 부부들처럼 노출시키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 그냥 무시해야지. 몇번 무시하면 선생님도 뭐라고는 안하시겠지 하며 아이 어린이집 가방을 정리하는데 가방에서 무슨 종이가 떨어진다.

<파파데이> 의 안내장이었다.

 일년에 한번 정도 아빠가 와서 아이와 놀아주는 행사의 참여여부를 묻고 있다. 그날 아빠가 오는 아이들은 별도로 행사를 갖는다. 강사가 따로 오고, 놀잇감도 조금 특별하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아빠의 사랑이 아이에게 얼마나 특별한 의미인지에 대한 내용이 짧게 나와 있었다.

 공감한다. 엄마의 사랑이 무조건적이고, 당연한 의식주라면, 그 위에 얹어지는 아빠의 사랑은 기분전환을 위해 떠나는 여행이나 기분을 업시켜주는 선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아빠의 사랑은 없어도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어도, 아이의 행복감과 자존감을 하나 더 올려주는 대체불가의 것임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아이에게 남편에 대한 불만을 비치지 않고, 항상 아빠를 반겨드려야한다고 말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였다.

 중학생 정도의 사고를 가진 남편은 아이가 예쁘게 굴지 않으면 예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아이가 예쁘게 굴수록 크게 예뻐하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날 갉아먹는 한이 있더라도, 자존감 튼튼한 아이, 행복한 기억으로 무장한 아이로 키워야지. 하는 바람을 그는 아마도 모를테지.

 열이 떨어지고 낮잠에 곯아떨어진 아이를 뉘여두고, 차들이 줄지어 오가는 창밖을 바라본다.

우리는 이렇게 아늑한 집에 있는데, 다들 얼마나 피곤할까.

 ... 어딘가를 찾아가야 하는 길 위에서는 정말 너무도 지쳐서, 앞에 보이는 아파트들의 불빛을 볼 때마다 부러웠었다. 나도 지금 저런 곳에서 쉬고 있는 사람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늘 해왔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우리 아기의 여정이 지칠 때, 중간에 쉬어갈만한 집이 하나여서는 안되지.... 살다보면 나한테 사고가 생길 수도 있고... 아빠라는 집을 잘 마련해두어야해.

 무엇보다, 우리 아기만 그날 시무룩하게 앉아있는 모습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아이가 어느 어린이집을 다니는지, 내가 어떤 직장을 다니는지, 그가 알게 되는 것은 불쾌하고 불안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린이집에서 이런 행사를 해.
00일 00시야. 연가내고 온다면 아이가 좋아할거야. 알아서 해.

 진짬뽕 먹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그가 이걸 다른 사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좋겠지만, 행여나 그렇더라도 지금은 방법이 없다. 그 다음을 막아내는 건 내 몫이니까. 일단 저질러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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