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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u Apr 02. 2023

19800518

그들에게 진 빚

우리 아버지는 광주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에게는 광주 말씨가 남아있지 않다. 출신을 말하기 전까지, 우리 아버지가 광주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기는 쉽지 않다.


아버지가 스물한 살 적의 일이다. 서울에 올라와 할머니와 따로 살던 아버지는, 할머니를 뵈러 광주에 내려갔더랬다.


늦은 저녁 터미널에 버스가 도착했는데, 도시 분위기며 안내양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안내양은 무언가를 숨기고 빨리 도망치려는 사람처럼 안절부절하며, 광주는 통금이 여덟 시에 끝나니 일찍 귀가하라는 말만 남긴 채 사라졌다.


그날 광주에는 스물한 살의 대학생을 태워주려는 택시가 한 대도 없었다. 조급해진 아버지는 지나가던 트럭을 잡고 내 집이 지산동인데 태워주실 수 없느냐고 물었고, 트럭 운전사는 한참을 고민하다 그날의 아버지를 조수석에 태우고는 10분 거리인 지산동을 바로 안 가고 구석진 곳으로 돌고 돌아 할머니 집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그 트럭 운전사가 생명의 은인임을 몰랐다.


할머니는 전혀 아들이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되려 뭣 하러 이 난리 통에 광주를 내려왔냐는 타박만 한 채, 할머니는 아버지를 장롱 속에 꽁꽁 숨겨두셨다.


그 며칠 새 아버지가 집에서 올려다본 광주의 저녁 하늘에는, 총성과 함께 여러 발의 예광탄이 솟아올랐다가 이내 반짝이는 예광탄이 사라지고, 처절한 총성만 울렸더랬다. 군대를 다녀온 나는 첫 총성이 하늘을 향한 경고사격이었고, 이후의 총성은 시민을 향했음을 짐작했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께 들은 5월의 광주 이야기다.


광주 시민의 전쟁은 그날로 끝나지 않았다. 흔히들 한국의 3대 모임을 고려대 교우회, 해병대 전우회, 호남 향우회라고 하는데, 호남 향우회는 앞의 두 모임과 성격이 약간 다르다. 고려대 교우회와 해병대 전우회는 그 모임에 대한 자부심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생긴 모임이라면, 호남 향우회는 타 지역 사람들이 전라도 사람을 배척하고 말을 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모임이었다.


아버지 군대 앨범의 표지에는 ‘호남 향우회 증’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나는 어릴 때 아버지가 고향에 대한 애착이 강하구나 생각하다 나중에야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라도 사람들끼리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뒤통수 잘 치는 전라도”, “사기꾼 많은 전라도”.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전라도 사람들에게는 어떤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광주 말씨는 일종의 낙인 같은 것이었다.


2018년 겨울, 그날로부터 40여 년이 지나 할머니의 상을 치르러 나는 아버지와 함께 광주에 내려갔다. 오랜만에 만난 광주의 친척들과 얘기하는데, 한 번은 친척 형이 해병대 나온 내게 “해병대 즈그들은 광주 사람들 싫어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런 것이 전혀 없다고 항변하는 와중에, 머릿속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광주에는 예광탄이 솟아오르던 그날의 저녁이 아직이구나.’


그날, 예광탄이 사라진 저녁의 하늘이 더 무서웠던 것처럼, 광주 시민에게는 총성이 사라진 이후의 조용한 40여 년이 더욱 무서웠을 것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수도권에서 쭉 살아온 나는, 광주 사람들에게 항상 빚을 진 기분이다. 어릴 때 말의 절반은 아버지에게 배웠을 텐데도, 우리 아버지와 나에게는 광주 말씨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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