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글인 May 27. 2024

<알로하, 나의 엄마들> 이금이 장편소설

나는 인생의 파도를 즐길 준비가 되어 있나

소설에 흠뻑 빠졌다.

자기 계발서의 단호한 문장들에서 왠지 내 삶의 방향을 이끌어 줄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때도 있었다. 글쓰기를 즐길 줄 알게 되면서는 편안한 에세이가 유독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누구나 겪을 것만 같은(?) 장르 섭렵의 절차를 거치고 소설에 들어온 건 올해 초부 터인 것 같다.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삶들이 소설 속에 존재하지만, 젊었던 시절에는 소설이 이야기로만 다가왔었다. 그러나 이제는 소설 속의 삶이 보여주는 다양성, 그리고 그런 삶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가치가 보인다. 그런 가치를 이야기 속에서 표현해 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와, 그것을 유려하게 묘사하고 이끌어내는 문장들에 감탄하고, 감동할 줄 아는 내가 보인다.




'알로하'라는 인사를 제목에 넣은 의도는 짐작도 못한 채, 제목만으로 왠지 가벼운 주제일 것 같다는 착각을 했더랬다. 그러나 이런 소재라니!


"맞습니더. 미국 땅인데 섬이라 카데예. 거 가면 돈을 쓰레받기로 쓸어 담는다 캅니더. 그뿐 아이라 옷이고 신발이고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 있어가 맘에 드는 기를 따서 입고 신으면 된다 캅니더. 날씨는 또 우떻고예. 사시사철 늦봄맨키로 따시니 겨울옷이 필요 없다 아입니꺼."


의병에 나섰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와 삯바느질하던 버들은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말에 포와로 시집가기로 결정한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일꾼으로 이민 간 한국 남성 노동자들의 사진 신부로 가는 것이다. 가족과 영영 떨어져 포와로 가는 버들의 속내는 복잡하다. 사진 속 남편과의 삶에 설레면서도 그런 스스로를 자책하는 양가감정을 느끼는 버들, 사진 속 남편의 모습과 조건을 친구의 남편과 비교하며 실망하고 기대하는 버들의 의식의 흐름이, 글을 읽고 있는 내 의식의 흐름과 똑같이 전개되고 있었다.

​일본을 거쳐 하와이에 도착한 사진 신부들이 맞닥뜨린 실상은, 설레었던 마음을 몽땅 도둑맞고도 모자라 척박한 땅의 이민노동자로 살아남기 위해 외로움, 절망과 싸워야 하는 현실이다. 사진과는 너무나 다른 할배뻘(!) 남편들을 만난 충격적인 상황과, 의지가 되는 친구 사이에서도 서로의 남편을 시샘하는 심리 등, 너무나 솔직한 문장들로 표현되는 전개가 손에서 책을 내려놓을 수 없게 만든다.


하와이로 오는 동안 많은 경험을 하고 여러 사람을 만날수록 버들은 자신감이 줄어들었다. 한글도 모르는 송화 앞에서나 우쭐할 뿐 자기보다 못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명옥과 막선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여학교까지 다녔다. 명옥은 간단한 영어도 할 줄 알았다. 버들의 유일한 배경이었던 양반이라는 신분도 조선 밖에서는 끈 떨어진 갓만큼이나 쓸모없었다. 조선에서의 신분이 어떠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 자체가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학식이나 신분보다 용모나 나이가 우선이었다. 따지고 보면 친구들이 낙담하고 절망하는 것도 결국 그 때문이다. 사진과 다르더라도 더 젊고 잘생겼다면 속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신랑의 됨됨이를 아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버들을 비롯해 모두 사람의 거죽만 보고 행운이다, 망했다 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들도 다를 리 없다.​


지금까지 알던 세상에 대한 허탈감, 넓은 세상에 나와서 느끼는 나의 초라함, 그럼에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 거창한 포부를 가지고 넓은 세상으로 나간 것도 아니었다. 단지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새 세상에 여린 발을 내디딘 사진 신부들이 거친 땅에서 굳은살 박혀가며 적응해 살아내는 모습은 애처롭고, 눈물겹다. 그러나 버들은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옳고 그름에 대한 확고한 생각이 있다. 그렇게 걸어가는 길에서 만나는 이들은 온정을 주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좁은 이민자 사회에서도 편 가르기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 독립단 활동을 위해 훌쩍 떠나버린 남편, 혼자 두 아이를 키우면서 이주노동자로서 받는 차별 대우 등등 버들과 사진 신부들에게 삶의 파도는 계속 몰아친다.


“저 아들이 꼭 우리 같다. 우리 인생도 파도타기 아이가.”

아이들과 송화를 좇고 있던 버들은 홍주가 하는 말을 단박에 이해했다. 홍주 말대로 자신의 인생에도 파도 같은 삶의 고비가 수없이 밀어닥쳤다. 아버지와 오빠의 죽음, 그 뒤의 삶, 사진 신부로 온 하와이 생활… 어느 한 가지도 쉬운 게 없었다. 홍주와 송화가 넘긴 파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버들은 홍주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저쪽에서 아이들을 따라다니는 송화를 바라보았다. 함께 조선을 떠나온 자신들은 아프게, 기쁘게, 뜨겁게 파도를 넘어서며 살아갈 것이다. 파도가 일으키는 물보라마다 무지개가 섰다.​


지금 넘고 있는 파도, 그 뒤로 계속 밀려오고 있는 파도. 우리 모두는 끝없이 이어질 인생의 파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떨어질 때도 있고, 신나게 즐기며 파도를 탈 때도 있지만, 그 변화무쌍함과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점은 누구에게나 같다는 사실.


​​

"바다가 있는 한 없어지지 않을 파도처럼,
살아있는 한 인생의 파도 역시
끊임없이 밀어닥칠 것이다."


​​

독서모임에서 이야기 나누다 보니, 모두가 이 부분을 메모해 두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때의 유대감 또한 기꺼워 다 함께 웃었다. 우리는 각자의 파도를 넘으며 살고 있지만, 같은 책을 읽고 나누면서 잠시 같은 파도 위에 올랐다 내려온 것이 아닐까. 파도를 즐기는 젊은이들에 동화되어 버들과 홍주, 송화를 마주 바라본다. 나는 파도를 즐길 준비가 되어 있나. 아! 책을 함께 읽고 나누는 이 모습들이 바로 파도를 즐기기 위한 워밍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소재의 참신함,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의 선을 따라 읽어 내려가는 즐거움이 이렇게 클 수가! 이야기의 다음 전개가 궁금해서 책장을 넘기기 바빴고, 마지막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서 다시 현재로 되돌아와 내 삶을 바라보았다.

여자, 여성, 여, women, female, 女性.

여성이라는 존재는, 이 세상의 반을 차지하는 넓은 카테고리이기도 하면서도, 동시에 내밀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친밀함과 돈독함을 내포하는 아주 아이러니한 존재인 것 같다. 이런 내밀한 공감 안에서 나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에, 여성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값진 기회인가 생각해 본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세상의 모든 딸들>, <세 여자>, <알로하, 나의 엄마들>로 이어지는 독서를 하고 나니, 어느 지역이던, 어느 시대던 간에 여성들의 공통적인 아픔과 굴레와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삶의 모순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외부적인 환경이 바뀌었을 뿐,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 다음 세대, 우리 딸들의 삶은 어떠할 것인가. 언젠가는 미래의 여성들이 이런 소설들을 읽고, 절대로 공감 못하는 그런 때가 올까?



매거진의 이전글 <세 여자> 조선희 장편 소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