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하게 안주하기보다는 가능성의 세계로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이 한마디가 의미하는 것!
배경은 일제 강점기. 친일파로 부를 쌓은 윤 자작이 외동딸 채령의 몸종을 사러 소작지 마을로 몸소 방문한다. 지주가 삐까뻔쩍한 자동차를 타고 나타나자 거지 떼 몰골의 소작농 아이들이 몰려든다. 몸종으로 따라나서기로 했던 아이가 가기 싫다고 울기 시작하던 그때, 구경꾼 중 하나였던 수남이 당돌하게 내뱉은 말이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앞뒤 상황 재지 않는 어린아이의 단순한 호기심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이 한마디에서 주인공 수남의 호기심 많고 주체적인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한마디로 인해 수남은 부잣집 외동딸의 몸종이 되지만, 소작인의 딸로서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나고 자란 마을을 벗어나 본 적 없는, 고개 너머에는 어떤 세상이 있는지 궁금했던 아이는, 경성 거리와 대갓집의 휘황함에 넋이 나간다. 수남은 소작인 마을에서 굶주리던 것에 비하면 배불리 먹었으나, 몸종으로서의 서러운 현실을 알게 된다. 주제를 알아야 된다고들 말하는 행랑 식구들 사이에서도 수남은 항상 갈망했다. 그리고 이후의 삶에서도 수남의 외침은 계속되었다.
나도 글 배우고 싶다.
표지판도 읽지 못해 경성 한복판에서 길을 잃을 뻔 한 수남은 조선글을 깨치고, 사랑채에 있는 일본인 준페이에게서 일본어도 배운다. 채령의 유학길에 동행해서는 이웃집 영국인 부인에게 영어도 배우면서 자신이 알던 것보다 훨씬 넓은 세상에 눈을 뜬다.
수남이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술이네가 한 말이었다. 술이네가 팔자 도망은 못하는 법이라고 했다. 수남은 새 언어를 알아가는 게 신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향에서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날이야기에서처럼 너무 큰 욕심을 부려 화를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가회동 저택을 떠나 다른 세상을 경험해 본 지금은 세상 어딘가에 운명을 바꾸는 길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헌 실을 새 실처럼 만드는 뜨거운 김 같은 게 사람 세상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 갈망과 의지를 알아보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인 걸까. 영어를 가르쳐주고 후견인이 되어주겠다고 하던 이웃집 영국인 부인이 그랬고, 하얼빈의 미국 영사관의 존스 서기관 부부가 그랬다. 채령 대신 황군여자위문대에서 쓰라린 경험을 했을 때도 운명처럼 도움의 손길이 있었고, 수남은 꿋꿋이 일어났다.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수남은 드디어 홀로서기의 결심을 한다.
막막하고 두려웠지만 수남은 뉴욕에 남기로 결정했다. 강휘가 바이칼 호숫가 마을에서 해 준 말이 용기를 주었다.
"난 여기까지 온 널 존경해. 네가 앞으로 어떻게 변하더라도 마찬가지야."
강휘는 여기까지 온 자신을 존경한다고 했다. 힘들 때마다 그 말은 큰 위안이 됐다. 그동안 하얼빈으로만 여겼던 '여기'가 어쩌면 단순히 지역을 뜻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해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일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영역들을 말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뉴욕에 남아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일도 '여기'에 해당됐다. 수남은 비로소 결심할 수 있었다.
아쉬울 것도, 부족한 것도 없이 자란 채령의 철없는 삶과, 주어진 조건에서 주체적으로 겪어내며 살아가는 수남의 삶은 함께 있을 때나 수남이 채령의 이름으로 떨어져 있을 때나 항상 대조적으로 비교되어 보인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감사할 줄 모르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줄 모르는 채령은 수남이 대신 살아온 세월을 도둑질해 가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수남의 아들을 자신이 거둔 고아로 둔갑시키면서까지 자신의 이익과 안위를 챙기는 채령은 역시나 친일파의 후손답다.
한 인간의 삶에서 어느 부분을 블록 조각이나 자동차 부품처럼 바꿔 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하는 순간 삶은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다 끝내 전체가 무너지고 만다. 남의 삶을 토대로 집을 짓는 순간부터 채령의 삶은 일그러지고 부패해 갔다. 그렇게 키워졌기 때문이라고 면죄부를 주는 건 어릴 때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책임은 결국 스스로 질 수밖에 없다. 남이 보기에 성공적인 삶을 살았을지 몰라도 채령은 순간순간, 다른 사람의 시간이 자신의 삶과 부대끼는 것을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나 또한 수남 할머니와의 시간을 없었던 일로 쳐 버린다면 평생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자신과 불화를 겪으며 살게 될 것이다.
저자가 굳이 두 사람 인생의 한 블록을 바꿔치기하는 플롯을 만들어낸 이유는 뭘까. 일본의 동원령에서 양반가 딸들을 빼내려고 신분과 권력을 이용해 다른 딸들을 희생양 삼는 행태를 꼬집고 싶었을 것이고, 시대적 배경에서 주어진 환경을 넘어 해외를 누비는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선 잠시나마 신분을 차용하는 방법이 필요했을 것이다.
내레이터로 등장하는 작가의 마지막 말에 집중해 본다. '남의 삶을 토대로' 집을 지은 채령의 일그러진 삶을 말했지만, 거친 세상을 스스로 헤치며 살아낸 수남도 사실은 마찬가지로 '윤채령'이라는 남의 이름을 토대로 살았던 것이다. 온전히 나로서 당당히 걸어간 시간들은 차곡차곡 꼭 맞게 맞물려 쌓은 벽돌처럼 단단한 삶을 완성하지만, 벽돌 한 장이 빠진 균열은 채령에게나 수남에게나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삶에서 다른 것은, 마지막 수남할머니가 편지에서 고백한 내용에서 드러난다. 윤채령으로 살았던 삶이 너무나 좋아서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솔직한 마음, 그렇게 남의 이름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 그 정직한 양심 때문에 왜곡된 사실을 차마 바로잡지 못했던 수남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위안부 피해자를 돌보며 살아갔다. 반면, 수남의 벽돌 하나를 가져간 채령은 과연 그 양심적인 생각을 해보긴 했을까?
남들이 가진 조건을 부러워하며 나의 환경을 탓하는 게 일상인 듯한 세상이다. 저자는 남의 이름을 차용하여 세상을 날아오른 수남의 주체적인 삶을 보여주되, 타인의 조건을 선망하여 욕심내는 허영심은 단속하고자 한 듯하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 혹은 학생 시절,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를 외치고 싶었던 적이 나에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또래 무리 사이에서 튀고 싶지 않은 마음, 또 내가 선택한 것의 결과의 불확실함이 두려워 입 안에서만 맴돌았던 것도 같다.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제가 하겠습니다!'는 여전히 어려운 현실이니, 저자는 입안에서만 맴돌기만 하고 내뱉지 못하는 이런 두려움을 떨쳐내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을까.
내가 가면 안 되냐고 물었던 '거기'는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만은 아니었다. 그곳은 위기도 절망도 있지만 가능성이 존재하는 세계다. 소심하게 현실에 안주하고 있기보다는 당돌하게 외쳐보자. 거기, 내가 가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