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에 새로운 얼굴이 합류하고 두 번째 모임이 있는 날이다. 아직 서먹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인사를 나눈 우리 앞에는 같은 제목의 책 다섯 권이 이마를 마주하며 놓여있다. 2주간 책을 읽고 목요일 오전에 아이들을 등교시킨 후 만나는 다섯 여자들 중에는, 소싯적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서 웬만한 제목과 작가를 줄줄이 꿰고 있는 사람도 있고, 실천이 어려운 독서를 함께 하려고 모임에 들어온 사람도 있다.
내가 모임에 들어온 건 작년 여름이 끝날 무렵이었으니 일 년이 채 안되지만, 그간 구성원의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그중 원년 멤버에 속한다고 봐야겠다. 작년 1월, 남편의 직장 이동 때문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역으로 이주해 온 후, 낯선 곳으로 전학 온 두 딸아이의 학교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나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길을 걸어도 나를 알아볼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낯선 거리에는 새로운 지역에서의 호기심과 자유로움도 곳곳에 숨어있었지만, 일상을 터놓고 얘기할 친구 하나 없는 외로움 또한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혼자서 수목원이나 강변을 산책하기도 하고, 그간 관심 없던 책을 읽기도 해 봤지만, 가족을 챙길 여유는 있어도 내 마음을 챙길 방법을 몰라 갈수록 마음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동네 책방을 통해 알게 된 독서모임에 참여하게 된 것은 독서가 목적이었다기보다는 외로움의 탈출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독서모임이라는 세상으로 한 발을 내딛는 것은, 그것이 나와는 멀고 먼 외계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나에게 적잖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 말투나 억양이 달라서 어딜 가나 ‘다른 지역에서 오셨나 봐요?’라는 말을 들었기에 첫 모임 때 더 긴장하며 걸어 들어가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새로 들어오신 분이 첫 모임에 오실 때의 표정에서도 그때의 나를 떠올렸다. 우연인지 이 분도 올해 안으로 이사를 앞두고 있다고 하니, 작년의 내가 겹쳐 보이기도 했다.
2주간의 안부를 나누고 난 후에 본격적으로 책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우리 모임은 의무적인 발제나 형식을 두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형식을 두지 않고도 두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활발하게 자유토론이 이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발언 없이 청중으로서의 독서모임도 의미 있다고 의견을 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서모임이 회를 거듭할수록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발언을 어려워하거나 관객 역할만 하는 구성원은 아직까지 없었다.
이번에 같이 읽은 책은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새 책이었는데, 미국 콜로라도를 배경으로 복숭아 과수원을 일구는 가족을 보살피며 살던 소녀가 여자로서, 엄마로서 성장해 나가는 소설이었다. 여성으로서, 주부의 위치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공감하며 같이 읽기에 더없이 안성맞춤이었다. 주인공 소녀가 어머니를 여의고 집안의 살림을 도맡게 되는 현실적 상황에 공감하며, 아버지를 일찍 잃고 일찌감치 성숙한 나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나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꺼내놓는 것이 어렵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책을 읽으면서 느낀 동질감이 이미 한번 나를 위로한 데다가 그 느낌을 나누기에 이 자리가 안전하고 편안하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었다.
자연의 냉혹함이 드러나는 장면, 그럼에도 그 안에서 굳게 살아남아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가는 주인공의 삶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다섯 여자는 점점 동화되어 갔다. 아직까지 모임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던 분이 조심스레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복숭아나무들 사이에서 성장해 가는 주인공처럼, 사과 과수원을 하던 친정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 가부장적인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 진학을 위해 도시로 나와 겪었던 어려움들이 조심스럽지만 자부심에 찬 눈빛을 통해 모두에게 전해졌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으면서 그녀의 눈에 언뜻 어린 물기는, 이 순간의 본인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야기를 듣는 내내 뭉클했다.
“힘들었을 텐데도 잘 크고, 잘 살았네요!”
서로 격려하는 말들이 오가는 동안, 등을 토닥여주는 나머지 네 사람의 손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자유로운 대화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성장에 대한 이야기로 곧잘 이어진다. 그 무엇보다도 가족과 아이들의 성장과 발전을 우선시하는 탓에, 나 자신의 성장은 소외된다고 느끼는 것이 주부들 아니던가. 평일 낮 시간에 모여 앉은 다섯 여자는 예외 없이 모두 경력단절여성인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는데 주저함이 없어진 신입 멤버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야쿠르트 아줌마’로서의 경험을 펼쳐놓은 것이었다. 출산과 육아의 과정에서 나의 발전은 잠시 내려놓은 우리들, 그러나 엄마나 아내로서가 아니라 다시 사회에서 ‘나’의 자리를 찾고 싶은 우리들이다. 아직까지 ‘야쿠르트 아줌마’가 된 내 모습을 상상해 본 적 없는 네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기울였다. 야쿠르트 판매하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그 일을 하면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조잘조잘 신나게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눈은 쑥스러움도 잊은 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모여 앉은 널찍한 카페가 다 울리도록 우리 모두는 박수를 쳤다. 판매원의 일에 도전한 용기와, 그것을 이 자리에서 털어놓은 용기 모두를 응원하는 박수였다.
정해진 2시간이 넘어 3시간 만에 끝난 독서 모임의 여운은 헤어지고도 끝나지 않았다. 오늘 자신의 이야기를 실타래 풀어놓듯이 다 꺼내놓은 그녀는, 대화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아직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있다고 했다.
“야쿠르트 아줌마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는 왜 부끄럽지 않았을까요?”
라고 단체톡방에 글을 쓰며, 그녀는 오늘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느꼈을까. 아직 친근함을 느끼기엔 많이 부족한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늘어놓은 자신이 낯설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을 것이다. 오늘 자신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벅찬 기분을 느끼고 있는 듯한 신입 멤버를 격려하기 위해, 또 깊은 공감의 대화를 나눈 우리 모두가 너무 자랑스러워 나는 얼른 답했다.
“결이 비슷한 사람들의 공감의 힘이죠!”
독서모임을 통해 나는 낯선 도시에서 ‘나’의 자리를 찾았고, 그 안에서 사람들과 공감의 대화를 통해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다고 느낀다. 평일 낮에 모여 앉아있는 우리에게 지금 당장은 내밀 수 있는 사회적인 명함은 없지만, 우리는 한 권, 한 권 책이 늘어날 때마다 공감하고, 이어지며, 성장하는 중이다. 독서모임의 순기능으로 서로 책을 추천해주다 보니, 예전엔 1년에 책 한 권도 안 읽던 나에게 독서 욕심이라는 게 생겨나고 있다. 나와 같은 사람이 또 다가오고 있는 걸까. 다음 모임엔 또 새로운 얼굴이 합류할 예정이다. 이번에 오시는 분도 마음을 열고 우리의 대화에 잘 스며들 수 있기를 바라보면서, 나에게 찾아온 독서 욕심에 충실해볼까 한다. 읽고, 읽고, 또 읽은 나는 어떤 내가 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