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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진복 Mar 15. 2023

배움의 열정은 계속된다

35년차 소방관 아빠

때는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시기인 1982년도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강산이 네 번 바뀌었다. 당시 대학 진학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1982년 이전에는 대학 입학 예비고사가 있었고 1982년부터 1993년까지는 대학입학 학력고사 제도가 시행되었다. 지금의 수능 정시모집 제도와 유사한 제도다.      


나는 당시 아이들을 가르치는 훌륭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입학 학력고사 점수가 썩 좋지 않아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에 지원하기에는 무리수가 따랐다. 그래도 내가 목표하고 원하던 선생님 되는 것이 그 길뿐인 지 알고 전기 모집 군(群)인 ○○교육대학에 지원을 하게 된다. 역시 내 성적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낙방의 쓴맛을 보았다.     


아직 길은 있었다. 후기 대학 지원이 남아 있지 않은가. 많은 고민을 하다가 “안되면 말고”라는 심정으로 그냥 지나가듯이 후기 모집 군(群)인 ○○대학 영문학과에 지원하게 된다. “내가 미쳤었나 봐요, 그 어려운 영어를...”  그리하여 최종 면접시험까지 치르게 되었다.     

 

면접시험 위원은 5~6명 정도로 기억이 되며, 평이하고 상식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모두 답변을 하였다. 그런데 커다란 문제 하나가 다가왔다. 마지막 면접위원께서 영어로 질문을 하는 게 아닌가. 머리가 하얘지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I don’t know”라고 답변했다. 답변을 들은 면접위원께서는 웃음을 머금으며 “네. 알겠습니다. 나가셔도 좋습니다.”라고 해서 일단 면접시험을 무사히 마쳤다. 

    

이후 영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잘 못해 당연히 떨어지겠지 하면서 “나는 대학에 다닐 운명이 아닌가 보다”라며 지레 포기하고 마음 편히 지내고 있었다. 얼마 후 합격자 공고가 났다. 아니! 합격자 명단에 내 수험번호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헉! 합격이라고. ○○대학 영문학과에 당당히 합격을 한 것이다.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어느 한 면접위원의 영어 질문에 정확한 답변은 못했지만 “I don’t know”라는 “영어로 답변했기 때문에 합격한 것인가”라고 자문해 보며, 당시 영어 질문이 뭐였는지 기억을 더듬어 봤다. 대략 예측해 보니 질문은 “What is the longest river in the world?(세계에서 가장 긴 강은 무엇입니까)”였던 것 같다. 그럼 답변은 어떻게 했었으면 정답이었을까요? 네. “It’s the Nile(나일강입니다)”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답변이었다.      



이제 어려운 과정을 통해 대학을 합격하긴 했는데 또 하나 문제가 생겼다. 합격의 기쁨은 잠시일 뿐 등록금 걱정이 되었다. 내가 합격한 대학은 4년제 사립이어서 1학기 등록금이 50만 원(40년 전)으로 상당히 비쌌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부모님께서는 아들 대학 등록금 마련 때문에 엄청 고심하고 계셨다. 그런 부모님의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가슴이 매우 아팠다. 아버지의 직업은 광부(鑛夫)로서 그리 넉넉한 생활 형편이 아니었다. 이전에는 밭(田) 농사로 세 자식을 키워 오셨다. 


나는 결심했다. “우리 집 형편에... 내 주제에... 무슨 대학이야” 자책(自責) 하며 그냥 무슨 일을 하든 돈 벌어서 부모님 살림에 보태고자 과감히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생활전선으로 뛰어든다.      


그때 내 나이 20세,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조기에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쯤에서 병역문제가 궁금해질 것이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다 군대 갔다 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당시는 먹고사는 문제가 우선이었기에 넉넉하지 못한 가정 형편이 반영되었고 또 두 살 위 형님이 현역 입영 중인 상태였기 때문에 면제 판정을 받았다.     


철부지 20대 청년이 사회에 첫발을 내 디딘 직업이 소규모 가게에서 운영하는 막걸리 배달 일이었다. 그냥 닥치는 대로 일했다.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두 번째 직업은 철물 가게 점원이었고 이어서 전라남도 여수 LNG(Liquefied Natural Gas. 액화천연가스) 저장소 시추(試錐) 현장 인부, 건축현장 차량 운전기사, 잡화용품 판매차량 운전기사 등을 하며 배움에 목말라 다시 대학 도전을 위해 틈틈이 학업을 이어갔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매일 막노동이나 다름없는 현장일을 끝내고 피곤한 몸으로 책장을 넘기니까 공부한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하루 지나면 다 잊어 먹는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표현이 좀 그런가.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에는 선조 임금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왕이 피난을 가다 ‘묵’이라는 생선을 먹어 보고는 맛이 좋다며 ‘은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궁궐에 돌아온 뒤에 다시 먹어 봤더니 맛이 너무 없어서 “도로 묵이라고 해라”라고 했다. 이 ‘도루묵’이 도루 묵‘이 되고 앞에 말짱이라는 말이 붙었다는 거다.     


이제 뭐 하지! 제대로 된 직장을 찾아야 하는데 고등학교만 졸업해서 가능할까? 맨날 막노동(막勞動)만 하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친구들은 벚꽃이 만발하는 대학 캠퍼스를 누비며 졸면서 수업을 듣다가도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며, 때로는 친구들과 포장마차에서 술도 한잔하고 또 바리바리 먹거리 짐 싸 들고 MT 가서 통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젊음의 낭만을 즐기겠지. 마냥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슬퍼졌다. 나는 왜? 왜! 왜! 왜!     


또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막노동해서 번 돈을 부모님께 드리지 않고 학원비로 쓰기로 했다. 부모님께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다. 일 그만두고 학원 다니며 공부해서 공무원 시험을 보겠다고 말이다.    

  

부모님께서는 “생활 걱정하지 말고, 우리 아들 하고 싶은 데로 하려무나. 설마 입에 풀칠하겠나”라고 말씀하셨다. “네. 알았어요. 엄마·아버지!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 한번  돼 볼게요”라고 말씀드렸다.


내 나이 24살, ○○시 소재 ○○종합학원(공무원반, 대입 검정고시반, 소방직반, 경찰직반)에 수강 등록을 하였다. 개설된 모든 반을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강의를 들었다. 그러는 와중에 이미 소방관으로 근무하시던 외삼촌의 권유로 소방직 시험에 응시를 하게 된다.      


에피소드 하나 이야기하면, 소방직 필기시험을 합격하고 면접시험을 보러 가기 위해서는 강원도 태백(태어나서 학창 시절을 보낸 곳)에서 기차를 타고 원주역에 내려 시외버스로 춘천 면접시험장(강원 도청)으로 가야 하는데... 새벽 시간대다 보니까 기차 안에서 선잠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서울 한강이 보이는 게 아닌가. 헉! 큰일 났다.      


다행히 당시 서울에서 춘천 가는 기차가 있었다. 면접 시간이 10시쯤으로 기억을 하는데 시간 안에 도착을 해서 무사히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면접시험 보러 가던 과정을 돌이켜 보면 “내가 소방관이 될 운명이었구나”라고 생각을 해 본다.      

   

드디어 내 나이 25살, 1988년 9월 1일 대한민국 국민들의 부름을 받고 소방관의 길을 걷게 된다. 선생님의 꿈이 소방관으로 바뀌는 찰나다. 당시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88 올림픽이소방관끼리88 올림픽 개최되던 시기였다. 입사 동기 동료 소방관 끼리 “우리는 88올림픽 공식 지정 소방관이야”라고 농담을 주고받곤 했던 기억이 난다.        

   

드디어 “나는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소방관이다”라는 소명의식과 자부심을 갖고 나름 열심히 근무하며, 일반대학에 못 간 설움(누구를 탓해! 네 탓이야!)과 배움의 열정으로 방송통신대학에 문을 두드리게 된다. 1989년 방송통신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하면서 일반대학 캠퍼스에서의 낭만 수준은 아니지만 나름 방송통신대학만의 낭만이 있었고 배움의 열정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어 과목을 혼자 공부하기에는 나에게는 너무 힘겨웠다. 또다시 포기! 1학년 2학기부터 등록하지 않고 있다가 연속 3학기 미등록으로 제적이 되었다. 2년 후 배움의 DNA가 남아 있었는지 다시 방송통신대학 법학과에 문을 두드리게 된다. 그때가 1991년도다.     


그로부터 안전의 파수꾼인 막중한 소방관의 임무와 학업을 병행하다 보니 입학 당시의 열정은 어디로 갔는지 시험만 보면 권총(F학점) 차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래도 끈을 놓지 않고 제적-재입학-제적-재입학 과정을 반복하며 드디어 2008년 2월 방송통신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게 된다.      


남들은 4~5년 만에 졸업하는 방송통신대학을, 나는 17년 만에 졸업하는 역사에 길이 남을 진기록을 만들었다. 공부 머리가 없어서인지 창피스럽기도 하고 아니면 의지의 학구파인가도 자문해 본다. 늦깎이 깨달음이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배움의 열정이 지금 이 순간 글을 쓰고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전 세계 80억 사람들에게 외쳐 본다. 소방관 아빠의 성장하는 삶은 계속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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