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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규관 Feb 27. 2023

새로운 목표

―김수영 시가 어렵다고?(8)

「영롱한 목표」를 쓸 즈음, 그러니까 1955년 어름에는 김수영이 안정을 취해가고 있던 시기입니다. 헤어져 있던 아내 김현경이 부산에서 올라와 두 사람은 새 출발을 합니다. 1955년 6월에 지금의 서울시 마포구 구수동, 서강으로 이사를 합니다. 다음 시간이 이 서강 시절에 쓴 작품을 읽어볼 차례인데요, 서강의 환경이 김수영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살펴볼 겁니다. 

    

이런 생활의 안정을 노래한 시가 「나의 가족」입니다. 이 작품에 대해서 그간에 얼마나 평가가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수영이 퇴행적인 가족주의로 휩쓸려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김수영이 구체적인 사랑의 얼굴을 마주한 시적 기록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내 김현경에게 얻은 상처를 스스로 어루만져 주고 있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전쟁을 어떻게든 통과해온 자기 가족에 대한 고마움도 느껴집니다. 3연에서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흘렀던가”라는 영탄에는 이런저런 사건과 상처가 배어 있기도 하죠.  

    

「나의 가족」 이후에 쓴 시 「국립도서관」이나 「거리 2」에는 활기에 찬 목소리가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현실이 변한 것은 아니지요. 김수영 자신의 생활은 조금 안정됐지만, 이제 됐다 하고 나태해질 김수영이 아닙니다. 「거리 2」 마지막 연에서 뭐라고 하나요? “바람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웁건만/ 어디까지 명랑한 나의 마음이냐”고 자문합니다. 그래도 “영광의 집들이여 점포여 역사여”에서 “구두여 양복이여 노점상이여/ 인쇄소여 입장권이여”로 현실을 파악하는 자리가 약간 바뀌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무겁기만 한 큰 현실만 고민하다가 좀 더 가벼워진 생활로 자리를 옮겨 앉아보면 “우울 대신에 수많은 기폭을 흔드는 쾌활”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거리 2」의 이런 “쾌활”과 “명랑”이 「영롱한 목표」로 이어진 듯합니다. 읽어보시니까 그런 느낌이 오죠? 「영롱한 목표」에서는 “영롱한 목표”가 무엇인지 암시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다만 “영롱한 목표”가 생긴 기쁨의 정서만 보입니다. 특히 유심히 봐야 할 지점은 다음입니다.

      

모든 관념의 말단에 서서 생활하는 사람만이 이기는 법이다

새로운 목표는 이미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영롱한 목표」에는 생활을 살면서 “새로운 목표”를 찾을 수 있다는 “희열”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유들도 생활적이고 감각적인데 그것이 하찮은 것은 아닙니다. “죽음보다도” 삶은 엄숙하니까요.       


죽음보다도 엄숙하게

귀고리보다도 더 가까운 곳에 

종소리보다도 더 영롱하게    

 

이렇게 생활 속에서 “새로운 목표”가 나타나자 “극장 의회 기계의 치차(齒車)/ 선박의 삭구(索具) 등을 주저(呪詛)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지나간 자국 위에 서서 부르짖”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존재들은 고작 “개와 도회의 사기사(詐欺師)뿐”입니다. 어떻습니까? 작품의 정조는 다르지만 자신의 가까이에 있는 존재들에 대한 긍정의 기운이 분명히 있지 않습니까?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폭풍을 일으키는 것, 그것은 더없이 잔잔한 말이다. 비둘기처럼 조용히 찾아오는 사상, 그것이 세계를 이끌고 가지 않는가”라고 했습니다. 과연 김수영이 이러한 경지에까지 도달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후 자신이 살아가야 할 생활 속에서 무언가를 탐색하고 길을 찾으려는 고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관념”을 버린 상태는 아닙니다. 이 작품에서도 분명히 말하고 있죠. “관념의 말단에 서서 생활하는 사람”이라고요. 아직 관념을 버리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죠. 그러니까 “새로운 목표”가 “죽음보다도 엄숙”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변화와 성숙을 위해 예전의 것을 쉽사리 청산하려는 태도를 가지며 그것이 아주 현명한 것이라 생각하고 삽니다만 김수영은 그런 속류 변증법을 택하지 않습니다. 

     

김수영은 버리기보다는 차곡차곡 쌓아놓는 길을 택합니다. 물론 터무니없는 오류는 버려야 하고 과오는 수정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버리기보다는 쌓아놓는 김수영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그는 왜 설움을 설움으로 뚫고 지나가려고 하는 걸까요? 삶과 현실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김수영이 죽을 때까지 이어집니다. 김수영에게 만일 전통 지향적인 게 있다면 전통에 대한 향수나 기득권 때문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에 대한 존중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통, 즉 과거의 정신과 문화에서 현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김수영이 여느 진보주의자와 다른 점입니다. 진보주의는 꼭 정치적 진보주의를 가리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진보주의는 옛것을 폐기 처분하는 데 열성인데, 근대문화의 특징이죠. 훗날 「거대한 뿌리」에서 진보주의에 대한 파토스가 강하게 표출됩니다. 그렇다고 그가 전통주의자인가? 정확하게 말하면 김수영은 그런 이분법을 넘어서 있죠.    

  

이러한 김수영의 이런 태도는, 자신이 살아가면서 경험하고 부딪쳤던 것들을 낡았다는 이유로 또는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상투적인 이유로 서둘러 버리는 우리에게 어떤 경종을 울립니다. 사실 이런 진보주의는 정치적 급진과는 상관없고 단지 상품의 소비와 처리 경향과 닮아 있습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우리에게 빨리빨리 소비하고 버리라고 압박합니다. 그러면서 옛것은 죄 쓰레기로 화해 버리죠.   

   

하지만 현재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사건과 사물에는 지나간 시간이 쟁여져 있습니다. 시간은 부단히 현재를 과거로 만드는 미래를 현재로 가져옵니다. 알고 보면 미래는 과거의 적층 위에 쏟아지는 햇빛 같은 것이고 과거는 그 햇빛을 받아 부단히 현재가 됩니다. 그런데 김수영은 “사람이 지나간 자국 위에서 부르짖는 것은/ 개와 도회의 사기사(詐欺師)뿐 아니겠느냐”고 합니다. 즉 지나간 과거를 발판 삼아 현재를 회피하거나 정당화하려는 자는 “개와 도회의 사기사(詐欺師)뿐”이라고 합니다, 상당히 신랄하죠.   

    

자세히 읽어보면 이 표현도 김수영이 가지고 있는 기본 인식, ‘달나라의 장난’에 빠지지 않으려는 긴장된 인식이 여전함을 증명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다시 「달나라의 장난」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달나라의 장난」에서 팽이가 어떻게 돈다고 했습니까? “수천 년 전의 성인과 같이” 돈다고 했지요? “사람이 지나간 자국 위에서 부르짖는 것은”은 바로 “수천 년 전의 성인”과 연동됩니다. 현재의 삶에 아무 영향을 못 미치는 과거에 얽매이는 것, 새로운 길을 발명하는 게 아니라 현재의 고통과 곤란을 과거 시간에 헹구어 재탕하려는 것, 이런 것을 하는 이들은 “개와 도회의 사기사(詐欺師)뿐”이라는 겁니다. 당연히 「달나라의 장난」 때보다 진전된 인식이고 또 그만큼 자신이 있는 말투입니다.      


과거와 전통을 팔아먹는 행위, 과거에 얻은 명예와 위치를 통해 더 큰 권력을 가지려는 행위, 이런 것들에 대한 김수영의 경멸은 깊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언어가 시로 통할 때”를 추구하던 김수영이 가장 못 견뎌 하는 것이었죠. 물론 「영롱한 목표」가 그러한 세속적인 세태에 대한 비판을 위해 써진 것은 아닙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거리 2」에서 “명랑한 나의 마음”을 자문하고 있듯이, 자신 또한 구체적 생활을 긍정하다 빠질 함정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지나간 자국 위에서 부르짖는 것은/ 개와 도회의 사기사(詐欺師)뿐 아니겠느냐”고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비판이랄까 담금질은 다음 시간에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학이 기본적으로 대화적 장르라는 이야기는 고전적인 명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문학은 독자(‘보존자’-하이데거)들을 필요로 하고, 작품을 읽는 행위 자체가 대화의 한 방식이라면 고전적인 게 아니라 본질 명제일 수 있을 겁니다. 작품의 완성은 작가와 독자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언제나 독자와 대화하는 마음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는 독자의 구미에 맞게 작품을 쓰는 매문 행위와는 질적으로 다른 이야기이죠. 김수영 또한 자신이 쓰는 글이 매문 행위는 아닌가 하는 자의식에 시달렸고, 독자에게 아부하는 시인들에 대한 경멸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사실 문학을 떠나서도  대화는 상대방과 하는 것이면서 자기 자신과도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화를 하는 존재가 단지 타인만은 아닌 거죠. 그리고 자신과 진심으로 대화를 해야 타인에게도 진심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속이지 않아야 타인도 속이지 못하는 것이죠. 사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만큼 양심적인 일은 없습니다. 김수영이 말한 양심은 아마 이것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만 시가 우리를 찾아옵니다.     

실제로 김수영은, 1964년 7월에 발표한 「요동하는 포즈들」이라는 시평에서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합니다. 김현승 시인의 「무형의 노래」에 대한 평인데요, “거짓말이 아니다. 이 시에서 문명 비평이니 잠재의식이니 발언이니 하는 것은 찾을 수 없지만, 거짓말이 없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한 일이랴.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현대성보다도 사상보다도 백배나 더 중요한 일이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시의 근원 중 근원은, 자신에게 거짓말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경우 나 자신을 속이면서 살죠. 그러지 않고는 살기 힘든 게 바로 근대 세계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근대 문명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분열시키는 문명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근대인은 대지에서 유리된 존재이기 때문인데 대지라는 바탕이 없으면 현존재는 분열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이 분열을 인식하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자기기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자기를 기만하지 않고는 존속할 수 없으니까요. 저는 근대시의 여러 특징 중 가장 근본적인 요소로 이 분열을 솔직하게 앓는 것이라고 봅니다. 최소한 시를 쓰고 읽을 때는 자신을 속이지 않아야 합니다. 김수영은 그것을 정확히 꿰뚫어 봤습니다.  

     

「영롱한 목표」에서 노래한 “희열”은 나중에 다시 도전을 받습니다만, 지금은 이 작품의 다른 장점을 만끽해도 됩니다. 시라는 것은 순간의 고양을 언어로 노래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귀고리보다도 더 가까운 곳에/ 종소리보다 더 영롱하게” 같은 구절에서 뭔가 쨍쨍 울리는 신선함을 느낍니다. 매우 감각적인 표현입니다. 시에서 감각은 대단히 중요하고 또 시에 생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합니다.

      

감각적인 언어라는 것은 이렇게 작품에도 생기를 불어넣고 독자도 그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지, 자극적인 어휘나 상황을 배치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감각적인’이라는 말은 심하게 오용되고 있습니다만 독자가 시를 읽으면서 느끼는 감각이 아니라면 그것은 감각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감각적 표현이란, 시인이 주관적으로 선택한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시인 자신이 느낀 감각을 자신도 모르게 생동감 있는 방식으로 되살릴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요는, 먼저 사건과 사물을 통해 시인이 먼저 감각이 열리고 그것에 의해 새로운 정서와 인식이 생기해야 감각적 표현이 가능한 것이라는 말이죠. 시인이 의도적으로 노린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튼 저는 이 작품에서 “귀고리보다도 더 가까운 곳에/ 종소리보다 더 영롱하게”에서 생생한 감각을 느낍니다. 아마도 이것은 김수영 자신이 직접 경험한 바에서 시작되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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