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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인간 / 조희

-조희 <종이인간> 『시산맥』(2024·봄)

by 조희


종이인간


조희



네가 떠난 후


나를 구겨서 버렸어

빈터에 날아다니는 종이처럼


안경과 포크도 없이

고지서가 우체통에 쌓이는 동안

밤이 다가오는 도시 뒷골목을

혼자서 걸었지


마스크 쓴 사람들은 지하철역 출구로 쏟아져 나오고


누군가가 후투티 새를 말했어 어쩐지 아프리카 바람이 부는 것 같고 예니세이 강가에 쓰던 이름들이 기억나고

내 안에 불온한 책들을 쑤셔 넣다가


고개를 돌리면

빌딩 전광판에

인간이 인간을 못살게 구는 사건들 속에서

거짓말이 태연하게 진실 같은 뉴스로 빛나고

편의점 모퉁이에서는

카프카가 나를 부르고


바퀴벌레처럼 납작 엎드리다가

보도블록과 맨홀 사이에서

누군가가 내 발목을 잡았는데


벌레가 된 줄 알았던 내 몸에서

무엇인가 뭉치고 일어서는 느낌

보푸라기 마음은 가라앉는 방식을 모르지


천사의 마음을 훔쳐서 너에게 던져봤지만

구겨진 몸통은 펴지질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윗몸일으키기 하는 기분으로

몸을 접었다 펴고 접었다 펴면서

곰곰이 생각해


종잇장처럼 납작했던

너의 마지막 모습을


한낱 종이 한 장 차이로 존재하는


누군가 가위로 도려내기 전까지

죽을 수도 없는


나는 종이인간



-시산맥 2024 봄호, 177~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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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탕사진출처:https://kr.123rf.com/photo_53803464_unity-of-paper-human-team-work.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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