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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Apr 23. 2023

퇴근은 했지만 다음이 없을 때

노는 것도 일이 된 우리들에게


소방서 퇴근 후 비번날이면 꼭 하는 몇 가지가 있다. 충분히 잠자고 헬스장 가서 운동하고 콩자씨 만나고.


보통은 할 일이 있기에 이 세 가지 일도 해내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럼에도 가끔은 정말 할 일 없이 여유로운 날이 있는데, 그럴 때면 세 가지 일 말고도 꼭 찾게 되는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두둥. 바로 넷플릭스에 입장하는 일이다.

두둥

집구석 문화생활


최근에는 워킹데드라는 미드에 빠져있다. 좀비로 물든 참혹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런 여정과 이야기들을 아주 현실적이게 담아낸 드라마다.


보통 좀비물이라면 대게 공포 스릴러 액션물로 생각하지만 이 드라마는 조금 다르다. 멸망하다시피한 세상에서도 인간성을 지키고 살아가고자 하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수많은 우여곡절을 복잡 미묘한 인간적인 부분들에 비춰 적나라하게 잘 표현했다.



여러 사건을 직면한 주인공을 볼 때면 그 입장이 되어보곤 했다. 척박한 환경에서 아들을 교육해야 하는 마음, 인간이었던 좀비들을 죽여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적인 딜레마, 법도 질서도 없는 환경에서 윤리관을 지켜나갸아만 하는 이성적 고민.


만약이라고는 하지만 괜히 섬뜩해지곤 한다. 난 과연 좀비가 덮친 세상에서 어떤 선택과 지혜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다 보면, 결국엔 내가 지키며 살아가고픈 신념과 가치관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정말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지만 함께 사시는 할머님 눈엔 그렇지 않았나 보다. 누워서 빈둥거리며 화면만 보고 있는 내가 못마땅하셨는지 나가서 좀 움직이라며 사랑의 걱정을 해주셨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었지만 말이다.


워킹데드 대장정을 구구절절 말씀드릴 순 없기에.. 그저 배 긁으며 누워서 세상을 배운 셈이라 생각하며 몸을 일으켜 세우곤 했다.


할머니 메롱

운동 하나는 해봅시다


아무리 피곤해도 헬스장엔 꼭 가려고 한다. 근손실은 나를 더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야무지게 짐을 싸고 집을 나서면 할머니께선 꼭 이렇게 말씀하신다. “니는 집에서 도통 보기가 힘드네 허허허”


나를 듬뿍 사랑해 주시는 할머니의 말씀이지만 가끔은 대답하기가 참 어렵다. 집에 좀 오래 있다 싶으면 ‘얘가 이래서 될까.’ 걱정하시고, 집에 좀 없다 싶으면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나. ’ 더 걱정하신다. 온 세상 할머니들의 마음은 아마 걱정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요즘은 참 운동 가기가 힘들었다. 일도 바빠 피로했고 손에 입은 화상 덕에 땀나기가 꺼려졌다. 며칠 전, 꼭 운동을 가겠다 다짐하며 오전부터 마음을 먹었지만 무기력에 빠져 밤이 늦어서야 헬스장에 갔었다.


역시 운동을 하니 활력이 생겼다. 미뤄둔 할 일이 머릿속에서 정리되면서, 늦은 밤이었음에도 정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밤이 되기 전까지는 망한 하루를 살았던 것일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유튜브에서 벗어날걸, 빨리 이부자리를 정리할걸.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의미 없는 후회일 뿐이었다.


생각을 조금만 바꿔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나. 그때라도 무기력을 이겨내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것에 칭찬해 주는 방법도 있으니 말이다. 지난 일을 후회하기엔 활력을 가진 내게 너무 미안해지는 일이지 않을까.


운동 하나는 꼭 해보자.


우리 할머니께선 힘이 있는 날이면 “운동 다녀온다!” 하시며 집 앞 근처를 좀 걷다 오시기도 하고, 어쩌다 내가 시간이 있는 날엔 드라이브를 가기도 한다. 그럴 때면 몸이 불편하신 와중에도 얼굴에 힘이 생기신 것을 볼 수 있다.


내일이 오면 오늘은 돌아오지 않는데 후회만 하다 보낼 순 없는 노릇. 산책도 좋고 드라이브도 좋고 운동은 더 좋고, 뭐든 좋으니 밖으로 나서보는 건 어떨까.




다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 아입니까


내 최애 라면은 단연코 짜파게티다. 군대에서도 집에서도 소방서에서도 짜파게티는 늘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힘들 땐 위로를, 행복할 땐 축하를 해준 아주 고마운 친구다.


이 친구가 어느덧 마흔을 내다보고 있다고 들었다. 헬스를 끝내고 밤 열 시가 되어 집에 돌아오니, 짜파게티 히스토리팩이 아름답게 식탁 위에 놓여있었다.


고민할 겨를도 없이 버너에 물을 올렸다. 얇은 묶음 봉지를 뜯어보니 이제껏 나를 기쁘게 해 준 친구들의 역사가 들어있었게 아닌가!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향수 자극 포장지에 눈이 돌아갔다. 분명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엔 닭가슴살 맛을 고민했건만, 친구에게 결례를 줄 순 없기에 두 봉지를 물에 빠뜨려버렸다.


역시 내 친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몸무게에게 졌다.

운동하고 돌아와서 이런 정크푸드를 먹는 것은 모순적일 수 있겠지만, 내 기준에선 아주 적절한 일이었다. 땀 흘려 운동한 만큼 맛있는 것을 먹고, 행복하게 운동하고 행복덩어리 짜파게티로 정점을 찍고.


소위 말해 헬창이라 불리는 분들께서 보신다면 불편하실 수 있겠지만, 내 기준으론 최고의 밤을 보낸 격이다. 최근 순간들 중 손꼽을 만큼 행복했다.


그럼에도 우리 할머니가 보시기엔 좀 그러셨나 보다. “그 가루음식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은데 끄흠..”


짜파게티도 먹고 사랑도 먹고, 일석이조였다.



노는 것이 일이 되지 않게


얼마 전, 친하게 지내던 형과 밥을 먹었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이다.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형이 가진 고민들을 들어줄 수 있었다. 부끄럽지만 형은 예전부터 스트레스받지 않고 여유를 가지며 열심히 살아가는 내 라이프 스타일을 동경하듯(?) 했는데, 자신도 그런 삶을 가지고 싶다며 운을 뗐다.


감사한 말이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보시다시피 내 하루는 정말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배 긁으며 넷플릭스를 보고 우당탕탕 운동을 하는 것이 전부였지 않나. 게다가 형은 이런 나보다 더 바쁜 삶을 살아오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본인 말에 따르면 자신은 열심히 살려고만 하지, 성과도 없고 즐겁지도 않은 하루들이 지나는 것만 같다고 했다. 내가 볼 땐 그렇지 않았다. 부지런히 회사에서도 틈틈이 자기 계발할 수 있는 거리를 찾으려 했고, 퇴근 후에도 쉬지 않고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법


형에겐 내 떡이 좀 더 커 보였 나보다. 내가 기대하는 내 모습과 실제 내 모습의 간극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었다. 그 간극이 좁을수록 마음의 여유가 넉넉하지 않을까.


무엇이 옳고 그르고 할 것은 없을 노릇, 간극이 크다면 발전적인 삶을 살 기회가 많을 것이고 간극이 좁다면 지금이라는 시간을 행복하게 보낼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죠 생각하기 나름이네요


넷플릭스 보고, 운동 가고, 짜파게티 먹고. 위에 적어둔 이야기들은 사실, 모두 형에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해준 나의 찐 일상 이야기였다.


내 이야길 들려주며 형도 나처럼 넷플릭스, 운동, 짜파게티로 가득 찬 똑같이 하루를 살았다면 과연 만족할 수 있겠냐며 물어보니,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했냐 보다는 어떻게 했냐가 중요하니 말이다.


생각보다 우리는 당연한 듯 지나가도 꽤나 소중한 순간순간들이 많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제때 퇴근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루를 살아온 것도 대단한 일이고, 더 멋진 시간을 만들기 위해 신경을 쓰는 것도 그만큼 나의 삶에 책임감이 있었다는 아주 멋진 일이지 않나!


그 순간들을 잘 간직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정말이지 참 쉽지가 않다. 이 세상엔 비교할 만한 멋진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고, 그들의 삶을 너무 쉽게 볼 수 있으니 말이다.


하품 크게 하며 넷플릭스 보고, 밤늦게서야 운동을 가고, 닭가슴살을 생각하다 짜파게티를 먹는 것도 의미를 담아보며 행복으로 풀이해 보니 나름 멋진 하루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누군가에겐 별 것 아닌 일이 될 수 있겠지만, 나름대로 정말 행복한 순간순간들이었다.


제 말이 이 말입니다


노는 것도 일이라 생각할 만큼 우린 우리의 시간을 많이 사랑하고 있었나 보다. 나를 위해 마음을 쓰고 있는 우리 스스로들을 대견하게 생각해야지 않을까.

퇴근은 했지만 할 게 없어 한숨이 쏟아지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자니 스스로 한심해 보이고.


좀 속상한 밤이라도 괜찮다

우린 매일 퇴근할 수 있으니 말이다.


걱정만 낳는 걱정은 제쳐두고 넷플릭스를 켜보자


워킹데드는 우릴 기다리고 있다.

광고는 아닌데 꼭 보세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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