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벌레의 서랍

4부 나비의 날개는 자유를 향한다

by 달그림자

16장 정적인 아이들과 불안의 거울


후회와 보상을 넘어서는 사랑


가게 앞에는 긴 의자가 있었다. 동네 어른들의 마실장소와 장기 ㆍ바둑을 두는 장소였다.


어쩌다 그 자리가 비워지면 기어 올라앉았다. 땅에 닿지 않는 두 다리를 흔들며 앉아서 노래도 부르고, 지나가는 동네분들의 말에 대꾸도 하며 놀았다.


그렇게 놀다가 의자 위에서 잠이 들기도 했다.

놀다가 잠이 들면 아버지가 나오셔서 안고 방에 눕히셨다. 난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잠시 깼다가 곧 잠이 들곤 했다.


과일을 잔뜩 사다가 풀어놓으실 때면 그중 가장 예쁘고 맛있어 보이는 것으로 항상 챙겨 주셨다.


"사랑한다" 굳이 말씀 없으셔도 온몸으로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집은 늘 웃는 소리로 가득했다. 오빠와 싸우다가 책받침을 던져서 오빠 얼굴에 상처를 냈을 때를 제외하고는 소리 내어 야단치신 적이 없었다.


엄마는 소풍 때가 되면 작은언니와 나에게 손수 치마를 뜨개질로 만들어 주셨다.


흰 블라우스에 잘 어울리도록 예쁘게 만든 치마와 흰색 스타킹을 신고 새로 산 빨간 구두를 신었다. 그 덕에 인기가 있었다.


엄마의 정성스러운 도시락은 늘 인기가 많았다.

선생님부터 아이들까지 내 도시락은 금세 동이 나고 난 군것질만 하고 왔다.


참 따뜻하고 행복했던 시간으로만 기억에 남는다. 그런 사랑이 있었기에 나의 에너지가 충만했고, 자유롭게 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했던 것 같다.


반면 내가 꾸린 가정은 그러지 못했다. 눈뜨면 돈 걱정으로 시작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무책임했던 부모덕에 우리 아이들은 나의 어렸을 때와는 다르게 너무도 정적이었다.


남편과의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그런 모습을 감추려 했지만 굳어진 얼굴로는 감취 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어린아이들만 집에 두고 일을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아이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주게 되었다.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나 너무도 가슴 아픈 시간이었다.

그 때문인지 아이들은 나를 전혀 힘들게 하지 않았다. 늘 조용히 옆에서 나를 도우려 했다.

미운 다섯에 벌써 철들어 버린 것처럼..

그것이 너무나 아팠다.


27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미안하고 가슴 아프고 안타깝다.


내가 받았던 사랑을, 내 아이들에게 온전히 주지 못한 것이 죄스럽게 생각되기도 했다. 나의 불안이 아이들의 날개를 적셔버렸다.


후회는 현재의 행동으로 치환될까?


​지난 시간을 되돌려 '미운 5세의 자유'를 아이들에게 보상해 줄 수는 없다. 이 불가능성 때문에 더 큰 아픔을 느낀다.

그러나, 후회로 자책하기보다는 '지금부터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려 한다.

​핑계를 멈추고 주저앉기보다, 두려움을 떨쳐내어 도전하는 모습으로, 내 감정하나 다스리지 못해 울그락 불그락하는 못난 모습보다 아버지가 보여주셨던 그 평온함과 인자한 모습으로 살려한다.


나의 안정된 모습 자체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희망적인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의 행복을 충분히 누리고 행복한 시간들로 기억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후회를 넘어서는 사랑은, 과거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완성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