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칼의 눈물 09화

현실도피

칼의 눈물 (#9)

by 서기선

할머니 집에서 나온 나는 집으로 돌아가 기타 케이스에다 칼을 넣고 간단한 짐을 꾸린 후 두 정거장쯤 걸어가 택시를 타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이동했다.

처음엔 몸만 빠져나올 생각이었지만 혹시 경찰이 가택수색이라도 하게 되면...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이 녀석의 폭주를 막기 위해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903호 할머니의 말씀을 비로소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 이날부터였던 것 같다.

터미널에 도착한 나는 원주행 버스를 탔지만, 연고가 있어서가 아니라 가장 빨리 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그중엔 내가 경찰서에 잡혀가는 상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그중에서도 거리에 CCTV를 볼 때면 목을 조르는듯한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대합실을 나오자,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것 중 가장 앞에 있는 택시에 오르곤 목적지도 말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기사 아저씨가 정겹게 인사했지만, 아저씨의 물음에 선 듯 말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손님! 어디로 갈까요?"

"직진요! 직진해 주세요.!"

낯선 도시의 이름을 알 리 없는 나는 직진만 외쳤고 아저씨는 그런 나를 의아하게 생각하셨다.

"그래서 어디를 가시는데요?" 제차 아저씨가 물었지만, 이번에도 난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손님? 혹시 지병이 있으신가요?"

당신의 물음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자 기사 아저씨는 내가 정신병 환자 이거나 취객 혹은 돌아이쯤으로 생각하신 듯했다.

"죄송해요. 아저씨 초행이라 지명을 잘 몰라요.! 직진하면 어디가 나오나요? 들으면 알 것도 같은데…."

이상 아저씨의 물음에 답하지 않으면 어쩌면 병원으로 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툭 튀어나온 변명이지만 그럴싸했다.

"연세대학교가 나오고 더 가면 매지리 쪽이고 그렇습니다."

"매지리로 가 주세요"

더 이상 말을 섞어봐야 낯선 도시의 정보를 알 리 없는 나는 더 이상 말을 섞지 못하게 눈을 감아 버렸다.

"원주는 처음인가 봅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아저씨의 물음은 계속되었다.

"저 아저씨 죄송한데 제가 너무 피곤해서 그러는데 조용히 갈 수 있을까요? 도착하시면 이야기해 주세요."

때로는 강한 거부 의사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말을 섞어가며 어색함을 지우려 하지만 그조차도 어색할 땐 차라리 어느 한쪽이 강한 거부 의사를 보여줄 때, 각자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지금이 바로 그럴 때였다.

내키지 않는 대화를 피하려고 눈을 감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자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고 난 그 잠에서 또다시 알 수 없는 꿈을 꾸었다.




'깡', '깡', '깡' 이미 날이 저물었지만, 대장장이의 망치질은 그칠 줄 모르고 날이 새도록 계속되었다.

요란한 깡깡 소리에 묻혀 눈에 띄지 않았지만, 대장장이의 흐느낌은 어둠 속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한참을 내달리던 대장장이의 흐느낌이 멈춘 건 새벽닭이 울고 난 후였다.

대장장이가 숫돌을 이용해 칼날을 갈 때 혼절했던 그의 아내가 일어나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오열하며 왜 쳤다.

"무명아~! 무명아~! 내 아기~ 무명아!" 여인은 마치 삶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서 울려 퍼지는, 영혼을 울리는 액사의 한 소절처럼 울부짖었다.

그때 대장장이가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올려 보이며 말했다.

"이제야 만들었군! 이제 우리 가족은 모두 무사할 거야! 어서 스님에게 가야겠어!" 이미 실성한 듯한 대장장이의 눈이 초점 없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우리 가족은 무사할 거야! 스님이 그랬어, 무사할 거야!, 무사할 거야! 그런데 무명이는 어딜 간 거지? 여보 아이들 데리고 나와요. 어서 스님에게 갑시다."

여인은 실성한 대장장이의 모습에 망연자실하며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아악!"

"괜찮으세요?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바로 주무시더니 끙끙 앓던데 괜찮아요?"

"예 괜찮습니다. 꿈을…. 여긴 어디지요?"

"흥업 면사무소예요. 매지리 까지는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몇 리로 가세요?"

"매지리 아무 데나 세워주세요" 기사 아저씨는 말없이 다시 차를 몰았다.

5분 남짓 달렸을까? 아저씨가 차를 세우고 내 쪽을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매지 1리 무수막리 회관인데 내리실래요?"

"예 감사합니다." 황급히 도망치듯 차에서 내렸지만,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그나마 자동차 불빛이 있었을 때는 주변이 보였지만 그마저도 없는 시골길은 암흑 그 자체였다.

달빛에 구판장간판 뒤쪽으로 작은 미닫이문이 눈에 들어왔다.

무작정 그곳으로 갔지만 입구에 커다란 자물쇠가 잠겨 있었다.

"아~ 어쩌지!" 목소리마저 어둠에 멀리 가지 못하고 금세 다시 돌아와 곁에 주저앉았다.

"거기 누구요?" 목소리는 들렸지만, 어느 방향인지 정확지 않았다.

"예 저…. 어디세요?"

"거기 누구요?" 내가 누구인지 이름을 말해도 알지 못할 텐데 자꾸 누구냐는 물음에 뭐라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그때 닫혀있던 미닫이문이 자물통과 함께 스르르 미끄러지더니 족히 80은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나오셨다.

자물통이 보였기에 문이 잠겼을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실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 시간에 뭘 묻는다는 말입니까?"

"죄송한데 초행이라 근처 여관 같은 곳은 없나요?"

"여관? 이런 촌에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지. 어딜 가려던 참이요?"

할아버지의 물음에 난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따라와요." 할아버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뒤쪽 깃발이 걸려있는 건물로 앞장서 걸으시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 회관에서 보내시고 아침에 날 밝으면 가세요. 이불 같은 건 장롱 안에 있으니 그걸 쓰시고"

"예 어르신 감사합니다."

어르신이 돌아가고 난 후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불도 깔지 않고 두툼한 이불 하나를 꺼내어 덮었지만, 낯선 공간이 어색해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들었고 난 또다시 꿈을 꾸었다.



작가의 말:

영혼을 울리는 액사의 한 소절처럼 울부짖었다는 표현은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캑캑거리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는 문학적 표현임을 알려드립니다. 발표전 딸아이가 읽어보며 의문을 제기했기에 같은 의문을 가진 구독자님이 계실듯하여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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