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펜
"야! 한 소금 속옷을 갈아입었으면 세탁기에 넣으라고 몇 번을 말했냐?" 거실로 들어서던 내가 소리치며 말했다.
"아~ 또 잔소리네 오늘은 싸우기 싫다 그냥 가라." 한 소금이 얼굴도 쳐다보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
"왜? 또 차였냐? 너는 그 말투가 문제야! 계집애가 입만 열면…." 한 소금을 향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며 말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이내 입을 닫아버렸다.
"야~ 너나 잘해 어떻게 작가라는 년이 진득하게 앉아서 글 쓰는 꼴을 못 보냐, 네가 작가로 성공하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지겠다. 이년아!" 발끈한 한 소금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더 이상의 언쟁은 양쪽 모두에게 상처만 남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도 나도 더 이상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방문을 열고 침대로 가기 전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문을 닫다가 문득 스산한 거리를 바라보았다.
거리는 한산했다.
늦가을 바람이 한숨처럼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며 붉은 잎사귀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하늘을 덮은 구름 때문에 마치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져 내릴 듯 어둑하고 불안해 보였다.
불안해 보이는 하늘, 나는 오히려 이런 날씨가 좋다.
조금 이상해 보이겠지만 나는 이런 날 생각이 정리되며 글감이 잘 떠올라 내 대부분의 글은 이런 날 시작되고 또 완성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글이 써지지도 머릿속이 정리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연제 일을 맞춰야 했지만, 그조차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꽉 막혀 한 발짝도 걷지 못하고 벌써 몇 시간째 텅 빈 노트북 화면만 쳐다보고 있다.
"야 이년아, 그런다고 글이 써지냐? 그러지 말고 술이나 한잔하자." 어느새 방문을 열고 쳐다보던 소금이 말했다.
"아~ 마감해야 하는데…."머리를 뒤쪽으로 젖히며 오른손으론 목덜미를 잡으며 말했다.
"한잔하면 생각날 거야! 그러지 말고 같이 나가자!"
"너는 취직 안 하니?" 노트북에서 시선을 뗀 내가 뒤돌아 소금 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 나를 담을만한 그릇의 회사가 나오지 않아서 그래 조금만 기다려봐 정 보살이 그러는데 조만간 좋은 소식 온다더라" 소금이 말했다.
"정 보살? 너 아직도 그 사기꾼 만나고 다니니? 아줌마한테 이른다."
"어허~ 이 친구 왜? 이러시나~ 쉰 소리 그만하시고 일어나 이년아!" 소금이 내 등을 가볍게 때리며 말했다.
나는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다. 글이 막힐 때마다 나도 모르게 이런 행동을 한다.
물론 글을 쓸 때 말고도 가끔 손톱을 물어뜯을 때도 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초조할 때라든가 긴장될 때 혹은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생각을 몰두할 때 그렇다.
그럴 때면 소금이는 불안장애라며 놀렸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저 오래된 습관일 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며 애써 부인했다.
"생각하는 척하지 말고 한잔해!" 소금이 가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그녀가 캔 맥주를 앞으로 내밀자, 의식이 판단 하기도 전에 테이블 위 맥주캔을 집어 들고 그녀의 캔에 키스했다.
"야! 이도연 하루쯤 연제 못해도 괜찮아! 그런다고 욕하는 구독자도 몇 안 되잖아! " 그녀가 오징어를 질겅거리며 말했다.
맞다! 그럴 것이다. 하루쯤 연재하지 못한다고 욕하거나 항의하는 구독자도 몇 되지 않는다.
부인하고 싶지만 사실이다.
이도연, 웹 소설 작가. 아마도 그게 나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일 것이다.
몇 권의 책을 출판했지만, 그중 어느 것도 베스트셀러가 된 적은 없었다.
출판사에선 항상 비슷한 피드백만 돌아왔다.
‘재미있지만 뭔가 부족하다.’ , '신선하지만, 뒷심이 부족하다.' 뭐 대충 그런 피드백이었다.
차라리 그런 피드백을 해 주는 출판사는 그나마 좋은 사람들이다.
무 풀, 무대응, 이것이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어떤 곳은 원고가 도착했는지조차도 알지 못한다.
다만 이메일의 읽음 표시 혹은 카톡의 숫자 1 만으로 판단할 뿐이다.
"내가 이것들을…. 언젠가 무릎까진 아니더라도 사정하는 날이 올 거야." 내가 술잔을 내리치며 말했다.
"미친년! 예~ 예~ 그러세요." 소금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나! 너무 한심하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낙담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친년! 야 이년아, 한심한 걸로 따지면 내가 더 한심하지! 그리고 너는 이쁘기라도 하지 이 얼굴로 아직 결혼도 못 해보고 소파를 서방 삼아 사는 내 앞에서 그게 할 소리냐" 소금이 울분을 토하며 말했다.
"아니야! 너도 이뻐" , "전혀~ 위안이 안 돼"
"그렇게 이쁘면 네가 평생 데리고 살던가! , "…."
"이것 봐 꼭 결정적인 순간에는 대답 안 하지 네가 그러니까 욕을 얻어먹는 거야 아무튼 이쁜 년들은 죄다 적이야!" 소금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래 까짓거 평생 같이 살자!" 내가 웃으며 답했다.
"이년 보게 이제는 거짓말도 제법 티 안 나게 잘하는데…. 무서운 년" 소금이 가볍게 눈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우리는 그렇게 2시간을 편의점 앞에서 떠들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금이가 한 잔만 더 하자며 내 팔을 잡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편의점을 나와 세탁소를 지날 때였다.
세탁소와 무인카페 사이에 누군가 분리수거를 위해 내놓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 책들 사이에 푸른빛이 감도는 깃털이 보였다.
"저게 뭐지?" 나는 마치 홀린 듯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책 사이에 무심한 듯 박혀있는 푸른빛의 펜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깃털을 잡고 가볍게 잡아당기자,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펜 한 자루가 딸려 나왔다.
손잡이 부분은 제법 허름했지만, 깃털만큼은 아름다워 넋이 나갈 만큼 예뻤다.
그리고 가벼운 바람에도 하늘거리는 푸른빛의 깃털은 미세한 공기의 흐름에도 하늘거렸으며,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펜의 중간 부분을 잡자, 손끝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지만 기분 나쁠 정도의 차가움은 아니었다.
"예쁘다.! 펜인가?" 내가 혼잣말로 말했다.
"야~ 너 아직도 쓰레기 뒤지냐? 초등학생 때야 그렇다 치고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그 버릇을 여태 버리지 못하고…. 쯧쯧!" 소금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게 아니고…. 이거 봐! 이쁘지 않아?" 펜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 알았으니까 튀어! 누가 보면 욕해!" 소금이 내 팔을 끌어당김과 동시에 내달리며 소리쳤다.
그녀가 급히 내달린 탓에 들고 있던 펜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그녀를 따라 뛰었다.
집에 도착한 소금이 소파를 향해 "서방! 혼자있기 심심했지!" 하며 소파 위로 뛰어올랐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침 일찍 눈을 뜬 나는 냉장고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실을 지날 때 소파의 허리 베개를 껴안고 잠들어있는 소금 이를 보았지만 깨우거나 말을 걸지 않은 채 곧바로 냉장고로 향했다.
생수 한 병을 꺼내 들고 방으로 돌아온 내가 침대로 향할 때 책상 위에 있는 푸른빛의 펜을 발견하곤 걸음을 멈춰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이건 어제 그거네…. 근데 써지긴 하려나?" 펜을 들고 녀석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이면지를 찾았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아 그것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침대 위로 몸을 누였다.
하지만 아직 마감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서둘러 일어나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평소처럼 타이핑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글이 막혀 한 글자도 적지 못했다.
여전히 손가락은 키보드를 두드릴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머릿속은 공허했고 시선은 허공을 맴돌았다.
허공을 맴돌던 시선이 책상 위에 떨어졌을 때 그곳에 있던 푸른색 깃털의 펜이 떨어진 시선을 불러들였다. "거참! 되게 신경 쓰이게 하네" 혼잣말로 조용히 말하곤 서랍을 열어 필사하던 노트를 꺼내어 펼쳤다.
그저 이 펜이 사용할 수 있는 건지 알아보기 위한 단순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펜을 집어 들었다.
차갑고 조금은 묵직했지만 제법 그립감은 마음에 들었다.
손가락에 닿는 느낌이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손에 든 펜을 한참 들여다보다 필사 노트의 오른쪽 구석에 획을 그어보았다.
미끄러지듯 획이 그어지는 느낌이 손끝에서 시작에 전두엽을 때렸다.
"와~ 느낌 좋다, 이거 괜찮은데" 짧은 감탄사를 입 밖으로 보낼 때 그동안 막혀있던 올이 풀리듯 글이 떠올랐다.
마치 영사기 필름이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듯 신기한 경험이었다.
다시 펜을 노트 위에 내려놓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며 머릿속에 수없이 많은 단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홍수가 밀려오듯, 그동안 막혀 있던 글의 흐름을 뚫었다.
"와~" 하는 탄식과 함께 펜을 다시 노트 위에 내렸다.
펜 끝이 부드럽게 종이 위를 미끄러지며 문장을 만들어 나갔다.
처음에는 내가 글을 쓰고 있다고 확신했었지만, 나중엔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전계가 수없이 많은 단어 중 하나를 골라 적어나가는 느낌이었으니까 틀림없이 내가 적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 손이 아닌 펜이 나를 이끄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느낌이 막 들 때쯤 이후의 기억이 사라졌다.
사라진 기억 속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시간이 흐른 뒤 비로소 펜이 멈췄고 순간 의식이 돌아왔다.
글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 테이블 위기에는 내가 써 내려간 원고가 쌓여 있었다.
원고를 읽다 문득 어쩌면 내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바로 그 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잠시 멈춰서 다시 읽어본 글은 내가 처음 구상한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있었다.
처음엔 가벼운 일상적인 글을 쓰려고 했는데, 글이 진행될수록 점점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로 변했다.
마치 스릴러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글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 몰입감을 더해 주었다.
나는 마치 홀린 듯 글을 읽어 내려갔다. 그만큼 몰입감이 대단했다.
"이건…. 내가 평소 쓰던 문장이 아닌데…. 내가 이런 표현을 했다고?" 글을 읽는 내내 낯선 단어와 새로운 표현 방식이 신경을 거슬렀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유지한 채 잘 전개되고 있었기에 희열과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뭐야! 이젠 펜으로 글을 쓰는 거야?" 어느새 일어난 소금이 원고를 빼앗아 읽으며 말했다.
"와~ 야! 이도연~ 이 친구 글 잘 쓰네!" 원고를 읽던 소금이 나를 잠시 바라보다 또다시 시선을 원고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이리 내" , "잠깐만 있어봐!" 소금의 손에서 원고를 빼앗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 정도면 출판사에서도 좋아할 것 같은데..." 원고를 돌려주던 소금이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글을 썼다는 만족감이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그런 평안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꿈속에서 나는 누군가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였고 그의 손에는 펜이 들려 있었다.
파란 깃털이 달린 펜. 나와 똑같은 펜을 쥔 채, 그는 나를 비웃듯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행동도 심지어 말 한마디 없었지만, 그의 시선은 나를 압도했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나는 즉시 책상 위를 확인했다. 펜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꿈에서 본 장면이 머릿속에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펜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마치 나의 손끝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자꾸만 그 펜을 쥐고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기도 했다.
나는 계속해서 펜을 쥐고, 글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그 글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