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푸른 밤

# 코스母스 21화

by 서기선

제주도의 푸른 밤


공항에 도착한 어머니는 마치 수학여행을 떠나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아빠가 그러는데 비행기 탈 때 신발 벗고 타야 한다던데 맞아? 아니지?, 멀미약 사야 하는데..., 수영복을 가지고 올 걸 그랬나?, 필름 그래 필름은 가지고 왔니?] 한껏 들떠있던 어머니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버럭 화를 냈지만, 어머니는 동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아버지를 향해 [늙어서 자식에게 구박당하지 않으려면 조용히 있어요] 하시며 아버지의 버럭을 잠재우셨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아마 철저히 자신의 우방이라 믿고 있던 불야시와 김 서방이 함께 있어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 큰소리칠 수 있었던 건 어머니 손에 손자가 들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첫 손자를 무척이나 예뻐하셨다.

당신의 큰 목소리에 녀석이 놀라 경끼리도 할까 봐 언제나 노심초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손자를 품에 안은 어머니는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듯 당당할 수 있었다.

순간 아버지가 동생 내외를 향해 [야 너희 시작도 하기 전에 계약위반이야.] 하시며, 핀잔을 주셨다.

아이들은 너희가 돌볼 것이라는 두 번째 조항을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할머니의 목덜미를 끌어안은 아이는 전혀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았고 시작도 하기 전 본의 아니게 계약위반이 자행되었다.

어느덧 제주도에 도착한 어머니가 공항을 빠져나오며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이렇게 가까워?] 셨다.

물론 거리상으로 보면 먼 거리였지만 비행기로 이동한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가까운 거리인데 이 나이 먹도록 한 번도 밝아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해 그랬을 수도 있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열대나무가 즐비한 게 마치 외국의 어느 도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자나무 주변을 장식한 꽃들에 시선이 멈춰진 어머니가 절로 탄성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가셨다.

[어머나! 저 꽃 좀 봐] [엄마 ~ 같이 가] [나 여기서 사진 찍어줘] [엄마 우리 숨 좀 돌리자] [알았어. 그러니까 빨리 찍어줘] [김 서방 이리 와보게 여기서 우리 사진 좀 찍지] [예 어머니 제가 찍어 드릴게요] [아니 같이 찍자고 빨리 왜 이리 서봐] 평소에도 꽃을 좋아하시던 어머니는 한껏 기분이 좋아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존재감을 과시하셨다.

하지만 금세 하늘이 어두워지고 검은 구름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때 불야시가 어머니를 불러 세웠다.

[엄마 하늘 봐 비 올 것 같아 먼저 숙소로 이동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만하고 얼른 움직입시다.]

불야시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기에 주저함 없이 바로 숙소로 이동했다.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하는 중 진짜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택시기사님이 우리 쪽을 보며 짧은 미소로 친근함을 표한 뒤 인사를 하셨다.

[이제 도착하신 거예요?] [예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비가 오네요] [아이고 하루만 더 일찍 오시지 며칠 온다고 하던데요] [그래요? 며칠이나 온다고요?] [예 한 사나흘 온다고 했던 거 같은데... 며칠이나 계시는데요?] [4일요] [저런 그럼 아슬아슬하겠네요] [.......]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곳은 비가 와도 예뻐요]

아저씨와 간단한 이야기를 나눈 사이 어느덧 숙소에 도착했고 서둘러 체크인하였다.

김 서방이 안내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아버님의 투덜거림이 시작되었다.

[날도 더럽게 못 잡았네 이게 뭐람 기껏 제주도까지 와서 비라니...] 그러다 문득 어머니 쪽을 보시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셨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어떻게 날도 이렇게 잡니?] 가만히 있는 어머니에게 화풀이하시든 아버지를 이상하게 보든 김 서방이 아버지에게 다가가 조용히 자신이 날짜를 잡았노라며 자백을 하였지만, 아버지는 그래도 여전히 어머니 탓을 하였다.

이제는 엄마 탓하는 게 버릇처럼 되어버렸고 자신의 유행어처럼 활용하고 계셨다.

비가 와도 엄마 탓, 눈이 와도 엄마 탓, 밥 먹다 탈 국 질을 해도 엄마 탓 뭐든 그랬다.

너무 의아해 한 건 자신을 놀리고 있는 아버지가 밉지도 않은지 오히려 맞장구를 치시며, 그런 아버지를 오히려 놀리는 듯 보였다.

심지어 [욕먹으면 오래 산다던데 도대체 날 얼마나 오랫동안 괴롭히려고 이렇게 만날 탓을 하는 거야?] 하시며 도발도 서슴지 않으셨다.

한참을 지켜보던 동생이 노인네 두 분 그러고 노는 거야? 재미 하나도 없구먼. 하며 선 놈은 도발을 감행했고 당황한 아버지가 더는 어머니 탓이라고 놀리지 않았다.

물론 그날이 마지막이었지만....

테라스에서 비 오는 것만 구경하던 불야시가 어머니를 꼬드겨 밖으로 나가보자며 설득했고 어머니는 그런 딸의 제안을 받아들이셨다.

그렇게 첫날부터 삐걱거리긴 했지만, 비를 맞으며 예정했던 일정을 수행하기로 하고 용두암을 시작으로 서귀포 쪽으로 돌아보기로 하였다.

용두암에 도착한 어머니가 의아해하시며 동생에게 조용히 무언가를 물었는데 동생의 대답으로 어머니가 어떤 것을 물었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어떤 게 용머리야?] [엄마 앞에 보이는 거 이게 용두암이래 용머리 같아?] [아니 개 대가리 같다.] [하하하] [어딜 봐서 용머리라는 거야? 착한 사람들에게만 용으로 보이나 봐] [와~ 엄마 그런 개그는 어디서 배운 거야? 엄마도 그런 농담을 하네] 하며 어머니의 입담에 넉이나 간 동생이 감탄하며 어머니를 잔뜩 들뜨게 하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개 대가리 발언에 심술 난 빗줄기가 잔뜩 몸집을 부풀리더니 쓰고 있던 우산마저 부숴버릴 기세로 내리꽂기 시작했고 일행 모두는 다음을 기약하며 숙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숙소에 도착한 동생이 제일 먼저 세면장으로 들어가 발을 씻고 나오자 뒤이어 김 서방이 따라 들어갔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김 서방이 나온 뒤에야 세면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은 마땅히 어떤 걸 해야 할지 암담해했지만, 어머니는 제외였다.

테라스를 바라보던 어머니가 베란다 창문을 열자 갑자기 차가워진 날씨에 놀란 바람이 다급히 들어와 식은 몸을 달궜다.

그리고 바람과 함께 들어온 제주 향기에 빠져버린 어머니가 절로 감탄하시며 [제주도는 바람도 참 예쁘게 분다.]라고 읊조리셨는데, 그 모습을 본 김 서방과 동생이 어머니 쪽으로 다가서며 [어머니 춥지 않아요?] 하고 물었지만, 여전히 제주 향기에 흠뻑 졌거든 어머니는 어느덧 당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시조를 읊으셨다.


바람 불으소서

비 올 바람 불으소서

가랑비 그치고

굵은 비 내리소서.

한길이 바다가 되어

임 못 가게 하소서


어머니의 시조를 들은 김 서방이 다시 한번 어머니를 바라보며 [와 우리 어머니 멋지다 그런 걸 다 외우세요? 그건 누구 시예요?] 하며 물었지만, 어머니는 [몰라 어디서 읽었는데 모르겠네] 하시며 기분이 좋으셨는지 한 수 더 읊으셨다.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에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긋지 아니는고

우리도 그치지 마라 만고상청(萬古常靑)하리라


이번엔 동생이 물었다. [처음 듣는 시조네 이건 누가 지은 거야? 청산 어쩌고 유수 저쩌고 하는 거 보니 자연을 노래한 거 같은데 맞아?] [호호호 아니 이건 이황 선생님 시조인데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이야.] [그래? 그런데 무슨 청산 어쩌고 저쩌고 그러냐 사람 헷갈리게... 아무튼, 시 이런 건 나하고 안 맞아] 동생의 말을 듣던 어머니가 동생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며 한소리 하셨다. [오빠는 이런 거 잘 아는데 이 녀석은... 어이구~] 곁에 있던 김 서방이 어머니 쪽으로 고개를 획 돌리며 [어머니 그러면 다음엔 처남하고 한 번 더 와요] 하고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그래 다음엔 함께 오세] 하며 다시 시선을 베란다 밖 야자나무 쪽으로 향하셨다.

아버지는 비 오는 날 베란다에 모인 셋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야 ~ 청승 떨지 말고 들어와 비 오는데 뭐 하는 거야!] , [여기서 고스톱이나 치자] 그러자 김 서방이 서둘러 아버지 쪽으로 달려가 가지고 온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검정 케리어에서 화투를 찾아낸 김 서방이 아버지 쪽을 바라보며 가지고 온 화투를 내밀었다.

그 모습에 아버지가 환히 웃으며 [역시 준비성이 철저하구먼. 하하하] 하시며 기분이 좋았는지 당신의 호탕한 웃음으로 김 서방을 격려하였다.

[어머니 오세요, 자기야~ 빨리 와] 김 서방이 모두를 한 곳으로 불러들였고 그렇게 한자리에 모인 식구들은 화투를 치며 첫날밤을 보냈다.

다음날 제일 먼저 일어난 건 아버지였는데 아버지가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리는 통에 나머지 식구들도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참을 꼼지락거리던 동생이 기지개를 켜며 [지금 몇 시야?] 하고 물어보았지만, 진짜 시간이 궁금해 물어본 것인지 자신이 일어났음을 알리기 위해 말을 섞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반쯤 감은 눈으로 이리저리 사방을 훑어보던 동생의 시선이 멈춘 것은 여전히 베란다에 있는 어머니의 뒷모습이었다.

처음엔 어머니의 뒷모습만 보였지만 서서히 주변 정경이 눈에 들어오며 비가 그친 하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 비 안 오네] 동생이 늘어진 몸을 펴기 위해 기지개를 켜며 [엄마~! 뭐 해?] 하며 어머니를 불러봤지만, 닫혀있는 베란다 창 때문에 동생의 음성을 듣지 못한 어머니는 미동도 하지 않으셨다.

드디어 몸을 추스른 동생이 어머니 쪽으로 가려는데 순간 인기척을 느낀 어머니가 뒤를 돌아보며, [딸~ 이제 일어났어!] 하시며 닫힌 창을 열고 방으로 들어오셨다.

[아침부터 거기서 뭐 했어?] [뭐 하긴 하늘도 구경하고 나무도 구경하고 그랬지!]

[그 하늘이 그 하늘이지 뭐가 달라?] [비가 그쳐서 그런지 오늘은 공기도 좋다.]

[그래! 엄마 빨리 아침 먹고 둘레길 가보자] [둘레길?] [응 이 근처에 있다고 했거든 가봅시다.]

[그럴까!] [아빠~, 김 서방하고 빨리 준비해요. 나갑시다.]

서둘러 아침밥을 먹고 둘레길을 오르던 어머니가 길가의 꽃들을 보며 또다시 기쁨을 당신이 알고 있던 몇 마디 시조로 표현하자 김 서방이 달려가 어머니의 팔짱을 끼며 [와 ~ 우리 어머니는 시조 많이 아신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외우세요?] 하며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버지가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이보게 자네 장모 그것만 잘하네 나는 노래를 잘하는데 내가 한 소절 불러줄까?] 뒤따르던 동생이 조카를 아버지 품으로 내어주며 [동현이나 안아줘요 아빠 노래하고 해 봐야 산 너울 아니면 기찻길이겠지 뭐] 하며 핀잔을 주었고 동생을 핀잔에도 아무 말 못 하신 아버지가 [너는 동현이 아니었으면 벌써 맞았다.] 하며 분위기를 엉뚱한 곳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웃고 떠들며 둘레길을 걷고 있었는데 멀리 사진사가 한 명 다가서며 [추억한 장 남기세요.] 하며 말을 걸었고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사진사가 가지고 있던 본보기 사진에 시선이 집중됐다.

[말이네요!] [예! 저기 준비된 말이 있습니다. 한 바퀴 돌아보시고 사진으로 추억도 남겨보세요.]

사진사의 현란한 언어구사력에 모두가 홀려 말을 탔고 사진도 몇 장 찍었다.

난생처음 타보는 말에 아버님과 어머님은 당황해하셨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적응하셨는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 보이시며 제법 여유를 부리기도 하셨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함께하지 못한 아들을 자주 거론하시며 다음엔 함께 오자고 하셨지만, 그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하셨고 그곳에서의 행복했던 시간이 당신이 살아계실 때 했었던 마지막 여행이었음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닮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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