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스母스 19화
# 아버지와 불야시
동생에게 아군이 생기면서 본인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물론 소신 발언을 하기는 했지만, 무게감이 달랐다.
조금 더 어른스러워졌고 생각의 폭도 싶어져 졌다.
무엇보다 아버지에게 날 선 비판을 아끼지 않았고 그럼에도 잘 정돈된 친화력으로 상황을 적절히 유도하는 등 마치 아버지를 어르고 달래는 듯 보였다.
한 번은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오셨는데 그 모습을 본 동생이 능글거리며 아버지에게 다가가 [아빠는 꼭 혼자만 맛있는 거 먹고 오더라] 하며 비아냥거렸지만, 아버지는 그런 동생의 모습이 싫지 않으셨는지 [그래! 그러면 다음에는 우리 딸내미 하고 한잔해야겠구나] 하시며 동생의 도발에 응수하셨고 이에 질세라 [그래~ 다음엔 김 서방하고 우리 같이 한잔해요] 하며 아군을 거론하며 출가외인임을 다시 한번 각인시킴과 동시에 자신도 아버지 당신과 같은 어른의 반열에 올라와 있음을 드러냈다.
처음엔 딸아이의 도발적인 행동이 마냥 귀엽게만 느껴졌던 아버지도 계속되는 뼈 있는 말이 신경이 쓰이셨는지 어느 순간 [에이 저년 꼴 보기 싫어 술을 끊든지 해야지] 하시며 마뜩잖아하셨다.
동생의 행동은 단순히 아군이 생겼기에 그런 도발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간 개인사업과 판매원을 하면서 습득한 자신만의 노하우가 생겼거나 어쩌면 마음의 평안에서 오는 자신감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필요한 순간 소신 있게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동생이지만 어른스러웠고 당당해 보였다.
동생의 도발적 언행에 이따금 아버지는 [에이 저게 누굴 닮아 저러는지 모르겠네] 하시며 한탄하시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아빠 자식인데 누굴 닮았겠어. 아빠 닮았겠지] 하며 오히려 아버지를 압도하기도 했다.
말싸움에서 밀린 아버지가 화를 내려고 하면 이미 분위기를 읽고 태세전환을 하는 동생의 모습은 그야말로 불야시가 따로 없었다.
그리고 불야시가된 동생은 많은 부분에 변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로는 아버지가 더는 밖으로 돌지 않았으며, 집에서 어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자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할 수 있는 조촐한 술자리를 자주 만드셨다.
그리고 그때마다 소주 한 병으로 두 분이 나눠 드시는 다소 파격적인 변화를 보여주셨다.
평소 앉은자리에서 소주 서너 병은 거뜬히 드시던 아버지가 소주 한 병으로 나눠드신다는 건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아마 남의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불야시가 만들어낸 큰 그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봤다.
평소 당신의 모습처럼 술이 건 하게 취해 돌아오신 아버지는 김 서방이 인사드리겠다며 기다리기를 몇 번 반복하자 그 후론 다소 조심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아버지의 변화는 길 잃은 웃음소리를 불러들였고 어머니는 미소로 화답하였다.
그맘때쯤 아버지가 건축사무소를 차리셨지만, 수입이 일정하지 않자 어머니가 수선집을 하겠노라고 모두에게 선포하셨다.
놀라운 점은 아버지가 흔쾌히 허락하셨다는 것 말고도 그런 어머니를 도와 함께 물건구매를 하기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 계셨다는 것이었다.
두 분이 함께 시장을 다니시며 데이트를 즐기는듯한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어머니가 수선집의 위치를 알아보기 위해 동분서주하시다 집에서 한 시간가량 떨어진 두실이라는 곳에 마침내 자리하게 되었다.
괴정에서 두실까지 지하철 이동시간만 50분 25km가 넘는 거리였지만 어머니는 행복해하셨고 매일 50km가 넘는 거리를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하셨다.
모처럼 쉬는 날 머리 좀 식힐 겸 인근 시장을 배회하고 있었다.
한동안 재고물량 파악하느라 입, 출고 목록과 판매리스트 등 지난 1년간의 자료들을 들추느라 머리가 아파 정화가 필요했다.
그럴 때면 괴정 시장을 배회하곤 했었는데 딱히 목적이 있어 그런 건 아니었고 상인들의 생기가 넘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은 정리되는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나의 오랜 습관 같은 것이었다.
이제 막 모퉁이를 돌아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하늘빛이 심상치 않았다.
하늘의 구름이 낮게 깔리며 주위가 어둠으로 가득했고, 어둠을 뚫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안도하고 있을 때 벽에 걸린 괘종시계에서 오후 6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의 괘종시계 소리는 유난히 요란스럽다.
하지만 요란한 종소리 덕에 잠시 잊고 있던 어머니를 생각나게 했다.
오늘 아침 어머니는 분명 빈손으로 출근하셨다. 이대로라면 어머니는 비에 흠뻑 졌어 들어오실 것이 뻔해다.
서둘러 우산을 들고 지하철역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같은 시간에 오셨기에 확신할 수 있었고 조금만 더 지나면 지하철을 빠져나올 것이었기에 그보다 서둘러 도착해야 했다.
내 것과 어머니 것의 우산을 들고 뛰어나가는데 슬리퍼가 빗물에 미끄러지면서 발목 위로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바늘허리에 묶어 못쓴다는 말이 있는 듯했다.
서두르다 다치기라도 하면 오히려 걱정거리를 만들어주는 양상이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애써 태연 한척해 보지만 여전히 종종거리는 걸음은 멈추질 않았다.
제법 굵어진 빗방울에 시야가 흐려질 때쯤 지하철 출구에 서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들어왔다.
[엄마~] 하며 소리쳐 보지만 자동차 경적소리가 내 목소리를 삼켜 버렸다.
나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신 어머니가 들고 있던 손가방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빠르게 시장 속으로 뛰기 시작하였다.
조금 더 서둘러야 했지만, 여전히 신고 있던 삼선 슬리퍼가 문제였다.
빗물에 미끄러져 벗겨지거나 발목으로 기어오르는 삼선슬리퍼는 비가 오는 날엔 최악이었다.
다시 한번 [엄마 ~] 하며 소리쳐 보지만 여전히 어머니는 나를 인지하지 못하시고 속옷 가게의 천막 밑으로 몸을 숨기셨다.
어머니가 숨을 고르는 동안 가까스로 어머니의 곁에 올 수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엄마!] 하고 부르며 어깨를 툭 하고 쳤더니 화들짝 놀란 어머니가 [어! 아들 마중 나온 거야?] 하시며 환한 미소를 보여주셨다.
[아까부터 불렀는데 못 들었어?] [그래? 못 들었어! 어디서부터 따라온 거야?] [지하철... 뭔 노인네가 그리 빨리 달리느냐?] 장난 석인 노인네라는 말에 눈을 흘기고 팔뚝을 꼬집으시며 [노인네라니!] 하시며 애정 섞인 투정을 부리셨다.
오래간만에 어머니와 둘이 시장을 걷고 있는데 어머니는 나와의 데이트보다 여전히 그날 저녁 반찬거리가 먼저인 듯했다.
[저녁에 콩나물 무침 해줄까?, 김 하나 사서 가자 이 집 김이 맛있어, 비도 오는데 부추 부침개 해줄까? 아니면 김치 부침개는 어때? 아빠는 김치 부침개 좋아하는데...] 신이 난 어머니는 시장의 이곳저곳을 다니시며 나의 의견을 물어보셨지만 결국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김치 부침개로 낙점하셨다.
그날은 소주병 대신 막걸리병을 들고 귀가하였고 아버지는 김치 부침개와 막걸리로 저녁을 대신하셨다.
저녁상을 물리고 방 안으로 들어온 나는 한동안 읽지 못했던 이외수 님의 겨울나기를 다시 집어 들었지만, 여전히 몇 장 넘기지 못한 채 아버지의 불음에 설거지를 해야만 했다.
언제부턴가 아버지가 나에게 설거지를 시키기 시작했다.
분명 예전엔 없었던 모습이었지만 달라진 아버지의 태도가 나쁘진 않았다.
아버지는 당신이 직접 설거지를 하는 파격적인 행동도 보이셨기에 아들이 하는 설거지쯤은 아무렇지 않게 시키셨고 나 역시 반감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 집에서 더는 남자가 설거지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막 설거지를 마치고 들어가려는데 동생과 김 서방이 찾아왔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지만 궁금해하지 않았다.
보통 이런 때 어머니 혹은 아버지의 옷이거나 함께할 음식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불야시가 들어오면서 [부침개냄새 좋다] 하면서 주방을 먼저 기웃거렸고 남아있던 반죽을 보면서 어머니에게 [엄마! 부침개 만들어줘! 이 사람 아직 식사 전이야.] 하며 공연히 가만히 있는 김 서방을 소환하며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런 동생의 모습에서 가정을 꾸리며 산다는 게 어떤 걸까? 하는 의구심도 생겼고 또 그런 가정을 이루고 있던 불야시가 마냥 부러웠고 기특했다.
[아빠! 비도 오는데 막걸리 한잔합시다.] [계집애가 무슨 술타령이야.] [그러지 말고 한잔하자니까] [시끄러워] [뭐야! 아빠 약한 모습 보이는 거야? 하하하] 둘의 대화가 정겹다.
국민학교 때 아버지가 해주셨던 “가화만사성”이라는 글귀가 생각났다.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 동생의 당당함이 그곳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