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ther’s love story

# 코스母스 18화

by 서기선

a mother’s love story


부산에서의 삶은 동생이 결혼하면서부터 조금씩 안정되어 가는 듯했다.

굳이 ‘듯’이라는 의존명사를 붙인 건 아직 피해의식 속에 살고 계신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당신이 피해를 본 것이 어머니 때문이라며 자기 합리화를 하고 계셨던 터라 어떠한 이유에서든 모든 탓을 어머니에게 돌리는 치졸한 모습을 보이고 계셨다.

물론 예전에 비할 바 아니지만, 여전히 술에 취하면 폭군으로 변하시어 자신의 위신을 확인받고 싶어 하셨고 그럴 때마다 우리 가족은 당신의 술주정을 고스란히 받아줘야만 했다.

하지만 머리 굵은 자식 앞에서 더는 당신의 주사가 아무런 위엄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버지는 동생의 눈치를 살피는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동생에게는 남편이라는 강력한 아군이 생겼기 때문에 더는 하대할 수 없었고 동생의 결혼이 아버지로 하여금 백기 투항하시는 계기가 되었다.

동생이 결혼하면서 우리 집은 근처 주택으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다시금 일을 시작하셨는데 놀라운 것은 아버지가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는 점이다.

나중에서야 김 서방이 어머니 편에서 조력자 역할을 잘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선택하신 당신의 일은 옷 수선이었다.

처녀 시절 고등학교를 졸업 후 대학진학이 가족의 반대로 좌절되자 어머니는 재봉기술을 배웠고 한동안 그런 일을 하신 적 있다며, 옛이야기를 들려주시며 강한 자신감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당시의 기억을 소환하신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첫 만남부터 결혼까지 하게 된 과정을 들려주셨다.

요즘도 그렇지만 기술 없이 일자리를 구하기란 힘든 일이다.

19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을 때 당시 산업화 정책이었던 섬유와 의류봉제공업 등 경공업이 유행이었으며, 그에 발맞추어 어머니도 재봉 기술을 배우셨다고 하셨다.

역사강의나 TV를 통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이른바 ‘여공’으로 불린 여성노동자들 그 속에 어머니도 함께하셨던 모양이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어머니를 몇 날 며칠 따라다니며 구애를 하셨다는 아버지의 젊은 시절 이야기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연상케 했다.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서 꽤 큰 농지를 가지고 계셨던 외가는 만석꾼 집안으로 동내에서도 유명한 집안이었다.

일제의 고문을 이기지 못하시고 광복과 함께 고문 후유증으로 외할아버지가 귀천하시고 큰외삼촌마저 불자의 몸이 되신 터라 외할머니는 처가 일을 살뜰히 돌봐줄 성품이 반듯한 사위를 보고 싶어 하셨지만, 아버지는 외할머니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기에 격렬히 반대하셨다며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셨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마음을 받아주기로 한 건 아버지의 무모한 행동에서 오는 진정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 철길을 걷고 계셨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으셨지만, 어찌 되었건 어머니가 영월의 철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는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머니에게 구애하셨지만, 외할머니의 격렬한 반대 말고도 그간의 행실로 보아 도무지 믿음이 생기지 않았기에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아버지의 구애를 받아주지 않으셨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날따라 아버지의 눈빛에서 무언가 강렬한 느낌을 받으셨다는 어머니는 사건이 있던 날로 나를 안내하셨다.

철길을 걷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느닷없이 어머니의 팔을 잡아당기며 [차라리 함께 죽자] 하시며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셨다.

바로 그 순간 두 분 모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먼발치에서 진짜로 기차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빠른 뜀박질로 철길을 마저 건널 수는 있었지만 당황한 어머니가 다가오는 기차를 향해 뛰어가셨고 순간 아버지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뒤따라 뛰시며 충돌 전 어머니를 안고 다리 밑으로 떨어지셨다.

당시의 사고로 어머니는 왼쪽 무릎이 찢어지는 상처를 입으셨지만, 아버지는 생사를 오가는 중환자가 되었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부상이 어머니의 알 수 없는 돌발 행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신 어머니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고 기어이 부상 전 상태의 몸으로 되돌려 놓으셨다며 당시를 회상하셨다.

그리고 두 분은 그 일을 계기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며 당신의 러브스토리를 들려주셨다.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였지만 현실의 아버지를 생각해 보니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변하지? 하는 마음이 목 밑까지 올라와 불편했다.

이야기를 듣던 내가 외할머니의 생각이 궁금해져 [외할머니는 어떻게 설득했어요?] 하며 묻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니 엄마 때문에 생사가 오락가락하는데 그걸 때어놓는 어미가 어디 있다던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신 것이지] 하시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씀하셨다.

그러고 보니 옛날 외가에 갔을 때 생각이 났다.

서울에 살 때 유난히 커피를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외할머니도 좋아하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에 당신의 기호식품인 커피를 사서 외가에 들린 적이 있었다.

매 식사 후 커피를 드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지 그날 저녁 외할머니는 아버지가 사다 드린 커피 1통을 가마솥에 넣고 한 솥 가득 커피를 만드셨다.

그리곤 어머니를 불러 저리도 커피를 좋아하는데 쪼끔 한 데다 한 잔씩 준다며 어머니를 나무라시며, [가마솥에 한 솥 해뒀으니 한 사발 가져다줘라] 하셨다.

당시 외할머니의 넘치는 사랑을 목격한 나로선 격렬히 반대하셨다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상상하기 힘들었다.

외할머니는 언제나 웃는 모습이었다.

축 늘어진 눈썹은 어머니의 것과 같았고 입꼬리가 올라간 형상이라 진중한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마치 안동의 하회탈처럼 미소를 보이는듯한 인상이었다.

그런 웃는 상이 었던 외할머니의 격렬한 반대란 어떤 모습이었을까 잠시 상상해 보았지만,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당신의 옛날이야기를 해주시던 어머니가 신이 났는지 행복했던 순간들과 아찔했던 순간들의 이야기 들을 연이 들려주시며 한껏 들떠 있었다.

그중에 나의 갓난아기 시절 이야기도 있었는데 처음 듣는 이야기라 귀를 쫑긋거리며 이야기를 계속해 들었다.

돌이 막 지난 갓난아이를 안고 친척 집을 예방한 부모님 날이 저물자 인근의 하숙집에서 하룻밤 묵기로 하고 짐을 푸셨으나 도무지 잠을 자려하지 않고 보채기만 했던 나를 안은 부모님께서 번갈아가며 밖에서 어르고 달래기를 두어 시간 했다며 당시를 회상하셨다.

잠시 후 보챔이 잦아지자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입구에서부터 매캐한 연탄가스 냄새가 올라왔고 당시 우리 가족을 제외한 다른 투숙객들은 죽거나 중독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주변인들이 말하길 아들이 제 부모 살렸다며, 기특해하셨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던가 내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나의 보챔이 생명을 살렸다는 마음에 득의양양해 있던 나에게 이번엔 비탄했던 기억도 이야기해 주셨다.

경제개발 5계 년 계획 중 3차 말 혹은 4차가 이루어질 때의 일이다.

당시 우리는 서울에서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양화점을 차리기 전 새마을 운동에 참여하신 적이 있다고 하셨다.

이른 새벽에 새마을운동에 참석하고 나면 참으로 빵이 지급되었는데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주려고 빵을 매번 가져다주셨다고 하셨다.

하지만 처음엔 잘 먹던 빵이 점차 물리면서 더는 먹으려 하지 않고 이윽고 빵을 집어던지며 밥 달라고 떼쓰던 어린 시절 나의 모습을 묘사하시며 당시 집안에 쌀이 떨어져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밥 달라며 떼쓰는 어린 아들의 절규마저 외면해야 했던 당신의 마음을 토로하셨다.

지난 과거의 이야기들이었지만, 어머니는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내내 행복해하셨고 어두웠던 과거마저 행복해하시는 미소에 밝게 빛이 났다.


이전 17화어머님의 일기장 t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