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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윤슬 Jul 17. 2023

차가운 여름

어둠에 짓눌린 소녀 이야기

온 세상을 싱그럽게 물들이는 여름, 바다를 품은 한적한 해안 마을에 어둠에 짓눌린 한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언제부터 이 마을에 살고 있었는지, 어디서 왔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어요. 가여운 소녀는 마음의 병으로 인해 매일매일을 두려움과 불안의 소용돌이에 휩싸였고, 밤마다 잠 못 이루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죠. 하늘을 그대로 담은 듯한 푸른 바다와 황금빛 모래가 반짝이는 마을의 아름다움도 소녀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어요.


따스한 햇살이 마을을 비추면 소녀는 밖으로 나와 마을 사람들의 여유로운 웃음과 행복이 춤추는듯한 얼굴을 관찰하곤 했어요. 그러나 소녀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녀에게 행복은 기억나지 않는 감정이었고, 고통의 장막에 싸인 수수께끼였거든요. 자신의 마음속 어둠에 고립된 소녀는 공허한 해안선 바라보며 위안을 찾곤 했어요. 부서지는 파도의 소리는 소녀의 영혼의 혼란을 대신 떠들어 주는 듯했고, 그 거칠음은 소녀 자신의 제어할 수 없는 감정과 같이 느껴졌죠. 소녀는 바다가 그녀가 찾는 답을 담고 있는지, 자신의 존재의 비밀이 그 깊은 곳에서 속삭이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이 웃음과 설렘으로 북적거릴 때, 소녀는 평소와 같이 바다를 바라보러 집을 나서다 지금 까지는 보지 못했던 잊혀진 길을 발견했어요. 무언가에 이끌리듯 소녀는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갔고, 그 길의 끝에는 시간의 끈질긴 손길에 풍화되어 낡아버린 오두막집이 있었어요. 소녀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 주위를 살펴보았고, 집 한쪽 모퉁이에 있는 책상 서랍 속에서 오래되어 누렇게 변한 먼지투성이의 낡은 일기를 발견했죠. 소녀는 떨리는 손으로 부서질 거 같은 낡은 일기 페이지를 넘겼고, 한장 한장 일기를 넘길 때마다 소녀는 왠지 모를 연민과 그리움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원망이 두 눈에 가득 맺혔을  때 이것이 자신의 엄마의 일기장이었음을 알게 되었어요.


일기에는 아름다운 해안 마을에서 소녀의 아버지와 나눈 사랑 이야기로 시작해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무사히 그들의 소중한 아이가 탄생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써져 있었어요. 소녀는 당장이라도 일기를 집어던지고 그 오두막에서 뛰쳐나오고 싶었지만, 자신이 왜 이곳에 혼자 버려져야 했는지, 엄마와 아빠는 어디로 갔는지 알기 위해 서러운 마음을 꾹 참고 페이지를 다시 한장 한장 넘기기 시작했죠.  그런데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일기의 내용이 점점 어둡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소녀의 엄마는 엄마가 된다는 그 책임감과 중압감에 압도되고, 스스로가 소모되는 것 같다는 불안감과 괴로움을 일기에 쓰기 시작했죠. 일기는 그녀의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어둠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소녀는 엄마도 자신처럼 마음의 병에 시달렸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일기에는 엄마의 헛된 시도와 원망의 글도 쓰여 있었죠. 작은 배로 물고기를 잡았던 소녀의 아빠는 곧 태어날 아이와 가족을 위해 비가 오고 거센 바람이 부는 날에도 바다에 나갔고 하늘이 절규하며 태풍이 몰아치던 8월의 여름날, 소녀의 아빠는 소녀가 매일 바라보며 위한을 찾던 그 바다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했어요. 엄마는 신에게 기도 하는 마음보다 더욱 간절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부탁했지만 그들은 매정하게 외면했어요. 그리고 소녀가 태어났을 때, 그 어떤 누구도 소녀의 탄생을 기뻐하거나 축복해 주지 않았어요. 그들은 바다신의 저주를 받은 존재라며 소녀의 가족을 꺼리고 싫어하고 피하곤 했죠. 마을 사람들의 냉담한 거절과 잔인함은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눌러쓴 듯 일기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어요. 그리고 일기에 마지막에는 소녀의 엄마가 내린 절망적인 결정, 영혼을 찢는 선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어둠에서 탈출할 수 없었고, 어린 딸을 외딴 오두막 문 앞에 버려두고 누군가 그녀를 찾아 돌봐주기를 바란다며 일기는 그렇게 끝이 나죠. 소녀는 눈물이 두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밝혀진 진실은 상상 이상의 고통이었어요. 일기장에 나와있는 마을의 모습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죠. 고통을 외면하는 곳, 힘든 사람을 고립시키는 곳,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공감이 결여된 곳. 그녀는 도무지 공감할 수 없었던 마을 사람들의 웃음과 행복은 이제 공허하고 냉담하게 느껴졌어요. 낡아빠진 오두막을 뒤로하고 소녀는 엄마의 일기와 더욱 어두워진 마음을 안고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소녀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행사나 축제가 있을 때까지 기다렸어요. 그리고 여름의 끝자락, 마을 큰 행사가 있던 날 소녀는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있는 광장에서 분노와 경멸로 떨리는 손과 목소리로 일기의 어두운 사실을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죠.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자비한 이기심과 비정함을 폭로하는 소녀의 외침에 감추고 싶었던 진실이 밀려오는 것을 아연실색하며 침묵 속에 들었고, 그들의 웃음은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다 이내 그들은 사실을 부인하며 소녀를 정신병 환자 취급을 하기 시작했어요. 소녀는 그때 태어나 처음으로 웃음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엄마의 낡은 일기에 불을 붙여 사람들을 향해 던져 버렸습니다. 불길은 순식간에 마을 사람들을 덮쳐 버렸고 사람들은 그제서야 소녀에게 잘못했다고 살려달라 소리치며 용서를 빌었죠. 하지만 그 누구도 분노와 원망으로 타오르는 불의 장막 속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어요. 소녀는 그렇게 엄마의 일기와 마을, 그 어둡고 차가운 기억들을 모두 불길 속에 태워버린 채 시리도록 아름다운 바다를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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