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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Jan 11. 2024

욕쟁이 용훈이의 비밀 1

올해도 제발 무사하길. 제발제발젭알

선생님이 되면 많은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게 교사의 본업이니까. 그런 아이들 중엔 마주 대하고 나면 유독 가슴께가 아파오는 아이들이 있다. 용훈이가 그랬다.(*용훈이는 가명입니다.)




새 학년을 맞이하는 아이들의 마음은 얼마나 떨릴까. 근데 그건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다음 해에 어떤 학년을 맡게 될지는 오조 오억 개의 변수가 우주의 기운과 맞물려 정해지게 되므로 예측 불가다. 물론 지망을 받긴 하지만 지망은 말 그대로 지망일 뿐...


고학년을 주로 맡던 내가 학교를 옮기면서 이번엔 2학년을 맡게 되었다. '와, 귀엽고 예쁘다는 2학년을 드디어 해보는구나!' 기뻐하는 나에게 친한 선배언니가 이야기한다.

"저경력에 전입교사인 니가 2를 맡은 걸 보면 뭔가 있나 본데?"

언니의 말은 정확했다.


학생들이 어마어마하거나, 학부모들이 어마어마하거나, 혹은 둘 다 어마어마하거나 하면 그 학년을 지망하는 선생님들은 자연히 줄게 된다. 저경력인 내가 2학년에 가게 된 전말이 이것이다. 우리 반 명단을 뽑아와서 이름을 보고 있는데 작년 선생님들 몇 분이 나를 보고 위로를 건네신다. 어마어마한 학년 중에서도 어마어마한 반을 뽑은 것이다.


우리 반을 어마어마하게 만든 일등공신은 용훈이다. 용훈이는 교사의 지시에 매번 불응할 뿐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거친 행동으로 문제를 일으키기 일쑤였다고 한다. 용훈이가 우리 반 최고의 욕쟁이라는 제보(!)가 있어 물어보니, 우리 학년에서 욕을 제일 잘하는 아이가 용훈이란다. 1학년 때부터 한 문장에 욕 서너 개를 넣는 건 기본이라니 유창한 욕 실력이 대충 가늠이 간다. 교권이 바닥까지 떨어진 요즘 세태에 용훈이 같은 애들은 솔직히 부담스럽다. 나이스(*교육행정정보시스템)에 떠 있는 용훈이 사진을 보며 빌었다.


올해도 제발 무사하길.


제발제발젭알




3월은 새 학급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서로 맞춰가며 적응하는 시기다. 반 아이들 전체를 지도하면서도 한쪽으로는 용훈이에게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용훈이 이 녀석은 보면 볼수록 내 예상과 달랐다. 고학년을 하다 2학년을 해서 더 그런가. 어마무시한 무용담에 비하자면 이 녀석은 너무 작고 너무 말랐다. 얘가 진짜 걔라니.


용훈이는 아침마다 뻗친 머리에 눈곱도 안 떼고 학교를 와서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수업을 대충 듣고, 급식을 와구와구 얼른 먹는다. 얼른 밥 먹고 점심시간에 더 많이 놀려고 그러는가. 엄청 말랐는데 먹성은 좋네. 첫 일주일을 특별한 대치 상황 없이 무사히 마무리했다. (얘가 내 말을 잘 들었다기 보단 내가 얘 눈치를 봤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요즘은 학교에서 이런 실내화를 신어요


사건은 둘째 주에 벌어졌다. 요즘 초등학교에서는 운동화처럼 뒤꿈치 부분이 막혀있는 실내화를 신는다. 그런데 우리 반에서 용훈이 혼자 실내화를 꺾어서 슬리퍼처럼 신는다. 그렇게 신으면 여러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으므로 용훈이를 불러 실내화를 제대로 신을 것을 요청했다. 내 앞에선 실내화를 바르게 고쳐 신었는데 다음 시간에 보니 또 실내화를 꺾어 신고 있네. 나는 재차 지도했고 용훈이는 재차 꺾어신었다. 살짝 열이 받는다. 역시 선생님 말을 개똥으로 생각하는건가.


다음 쉬는 시간. 용훈이를 불러서 훈육을 하려고 하는데 녀석의 꼬질한 실내화가 눈에 들어온다. 보통 3월에는 부모들이 새 실내화를 사주거나 세탁해서 깨끗한 실내화를 보내는데 용훈이 것은 해도 해도 너무 꼬질하다.  애초부터 회색인 것만 같다.


작년 걸 그대로 신어서 그런가? 일 년을 꼬박 신는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꼬질할 수가 있나? 아... 혹시 작은 건가? 실내화가 혹시 작냐는 내 물음에 용훈이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하지만 꺾인 실내화 뒤축을 펴서 발을 넣자 엄지발가락이 접혀서 실내화 앞부분이 불쑥 솟아오른다. 역시. 실내화가 작은 거였군.


나는 새 실내화를 보내 줄 것을 알림장에 적어 요청했다. 헌데 며칠이 지나도록 용훈이는 꼬질한 실내화를 슬리퍼처럼 질질 끌고 다녔다. 주연락처로 되어 있는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옛날 분인 할머니는 선생님의 요청에 매우 송구해하시며 내일 꼭 실내화를 새로 보내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다음 날. 용훈이는 어제와는 다른 실내화를 신고 왔다. 이번에는 자기 발을 다 넣고도 족히 2센티는 남을 것 같은 큰 것을 신고 왔다. 이번 실내화는 저번과는 달랐다. 이번엔 크고, 꼬질했다.


나 : 용훈아, 이 실내화 너한테 좀 큰 것 같은데?

용훈 : ...... 이거 형아 거예요.

나 : 아, 그래? 형아가 몇 학년이야?

용훈 : 6학년이요.


뻗친 머리와 허겁지겁 먹는 급식, 가끔 두 개씩 먹는 우유와 꼬질한 실내화가 하나의 통찰로 이어졌다. 아마도 이 시점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용훈이를 보면 가슴께가 시렸다. 용훈이는 할머니, 형과 같이 산다. 아빠는 멀리 지방에서 일하고 계시고 가끔 집에 오신다고 한다. 용훈이의 말에 따르면 한 달에 한 번와서 치킨을 사주신단다. 할머니는 새벽같이 식당일을 나가셔서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신다. 용훈이는 혼자 일어나서 학교를 온다.  


용훈이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처음엔 실내화가 작아서 슬리퍼처럼 꺾어 신었을 뿐이고, 그 다음에는 실내화가 커서 슬리퍼처럼 질질 끌고 다녔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건 할머니의 잘못인가. 할머니의 짐은 이미 너무 무겁다. 그리고 용훈이도 나도 알고 있다. 용훈이의 가장 큰 버팀목은 바로 할머니라는 걸.




살다보면 누구도 잘못한 일이 없는데 잘못되는 일들이 있다. 나는 퇴근길에 학교 앞 문방구에서 실내화를 두 켤레 샀다. 자존심 센 용훈이 녀석이 이걸 받을 리 없다. 나는 계획을 구상한다. 다음 날 아침, 아이들 앞에서 어제산 실내화를 들고 이야기한다. 이건 우리 반 비상용 실내화니까 실내화 깜빡하고 안 가져온 친구들은 이걸 빌려주겠다고. 그리고 용훈이에게 이야기한다. 용훈이 껀 지금 좀 크니까 일단 선생님에게 기부하면 비상용 실내화랑 바꿔주겠다고. 그리고 니껀 발 큰 친구들의 비상용 실내화로 사용하겠다고.


용훈이는 이제 발에 맞는 실내화를 신고 다닌다. 여전히 뻗친 머리에 눈곱을 달고 학교로 오지만 학교에 오자마자 눈곱도 떼고 머리에 물도 바른다. 자다가 지각을 몇 번 경험한 후로 용훈이는 전략을 바꿨다. 용훈이는 이제 우리 반에서 1~2등으로 학교에 온다. 어떨 때는 나랑 같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한다. 여전히 수업엔 시큰둥하고 친구들에게 틱틱거릴 때도 있지만 아직 용훈이로부터 니가 뭔데 나에게 잔소리하냐는 투의 거부를 경험한 적은 없다.


다행히 우리 반의 평화는 아직 지켜지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 다음주 <욕쟁이 용훈이의 비밀 2>에서 이어집니다.(클릭시 이동)

* 개인을 특정할 수 없도록 일부 내용은 변경하였으며,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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