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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Jan 18. 2024

욕쟁이 용훈이의 비밀 2

어떤 아이는 등교하는 것만으로도 칭찬을 받아야 한다.

* 개인을 특정할 수 없도록 일부 내용은 변경하였으며,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 지난주 <욕쟁이 용훈이의 비밀 1>에서 이어집니다.(클릭시 이동)



3월 말에 우리는 '성장흐름표'라는 걸 만들기로 했다. 9살까지 나름대로 긴 인생을 살아오면서 몇 살에는 어떤 모습이었고 무엇을 했는지 적어보는 활동이다. 우리가 어렸을 적 배웠던 바른생활/슬기로운 생활/즐거운 생활이 요즘은 하나로 묶여있는데, 이를 통합교과라고 부른다. 통합교과에선 인식의 범위를 나->가족->이웃->나라로 확장해 가며 내 주변 세상에 대해 이해하도록 돕는다. 성장흐름표는 '나'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간단히 꾸며보는 활동인 셈이다.


교과서에 실린 성장흐름표 예시


연령별로 사진을 하나 골라서 총 대여섯 장의 사진을 가져오도록 준비물 안내를 했다. 아이들은 아침부터 가져온 사진들을 서로 바꿔 보느라고 신이 났다. 누구누구가 아기 때 너무 귀엽다고 난리, 누구누구 백일사진에서 중요한 부분이 노출되었다고 가린다고 난리. 이유는 다양하지만 여하튼 난리통이다. 내가 그땐 참 어렸다는 말을 9살의 입에서 듣는 거. 직접 들으면 생각보다 더 웃기다.




반 애들이 죄다 사진을 보느라 여념이 없는데 용훈이는 사진이 없다. 용훈이에게 혹시 준비물을 못 가져왔으면 그림으로 표현해도 된다고 말을 건네자 용훈이가 준비물 가져왔다며 쑥스러운 표정으로 사진을 꺼낸다. 짜식, 준비물도 잘 챙겨 오고 요즘 아주 성실하단 말이야.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아기는 충분한 사랑을 받아야 한다. (출처 : adobe stock)


첫 번째 사진은 미니미 용훈이의 백일사진. 눈동자가 정말 크고 귀엽다. 그다음은 기어 다니는 모습의 사진. 솟은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세 번째 사진은 보행기 사진. 어릴 때는 다리가 통통했었네, 귀여운 녀석. 그런데 그다음도, 그 다음다음도, 그 다음다음다음도 모두 같은 날 찍은 보행기 사진이었다. 응? 왜 같은 나이 사진만, 그것도 돌 전 사진만 여섯 장을 가져왔지? 보행기 사진은 또 왜 이렇게 많이 가져왔을까?


나 : 용훈이 귀엽네~ 근데 같은 나이 사진은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용훈 : 죄송해요.

나 : 괜찮아, 준비물 잘 챙겨 왔어.


그러고는 돌아서려는데 용훈이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용훈 : ......선생님. 우리 엄마는 저 8개월 때 집 나갔대요.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듯 머리가 멍하다. 녀석은 대답을 하고 싶었던 걸까 고백을 하고 싶었던 걸까. 녀석의 짧은 한 문장으로 나는 알게 되었다. 용훈이가 왜 보행기 사진 이후로는 더 사진을 가져올 수 없었는지. 이번 준비물이 녀석의 어린 가슴을 얼마나 시리게 했을지. 아직 내 손에 들려 있는 녀석의 사진과 사진 너머 용훈이의 눈이 겹치자 참을 수 없이 가슴이 아파온다.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사력을 다해 참는다. 얼른 용훈이의 머리를 두세 번 쓰다듬고는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용훈이의 엄마는 용훈이가 8개월이 되었을 때 집을 나갔다. 용훈이의 타임라인에선 보행기 사진이 마지막이다. 용훈이가 9살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시간들은 사진으로 남아있지 않다. 한 번 밖에 없을 용훈이의 유년시절 모습이 나는 그립다. 용훈이는 아침에 혼자 일어나 등교한다. 혼자 준비물을 챙기며 8개월 이후론 텅 비어있는 사진첩을 바라봤을 녀석을 생각했다. 용훈이가 내 마음에 깊이 들어와서 박혔다. 용훈이는 나에게 더 이상 '그냥' 학생일 수 없었다.


같은 나이로, 같은 교실에, 친구라는 이름으로 앉아있지만 아이들마다 짊어진 생의 무게는 저마다 다르다. 어떤 아이는 등교하는 것만으로도 칭찬을 받아야 한다. 제 나이에 걸맞지 않은 짐을 지고 가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선생님의 옷을 입고 교실에 있으면 그런 아이들이 눈에 밟힌다. 내가 그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많지 않다. 나이에 맞게 좀 어리광 부리고 나이에 맞게 좀 천진난만했으면. 9살이면 9 만큼만 힘들었으면.




퇴근길에 보니 용훈이가 운동장 건너편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다. 퇴근하는 나를 발견하자 녀석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온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 녀석의 뛰는 소리가 울린다. 탁탁 탁탁 탁탁. 뛰어오는 녀석을 보자 내 마음이 더 벅차다. 막상 내 앞에 온 녀석은 말이 없다. 오긴 왔는데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눈치. 헉헉대는 숨을 고르고 잠시 눈을 굴리더니 짧은 한 마디를 건넨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용훈이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다시 놀이터로 달려간다. 녀석은 죽었다 깨도 모를 것이다. 방금 자기가 한 사람의 마음에 얼마나 뜨거운 사랑을 전했는지.


(출처 : adobe 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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