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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Feb 08. 2024

곰돌이 푸의 슬픈 폭풍사춘기

* 개인을 특정할 수 없도록 일부 내용은 변경하였으며,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곰돌이 푸가 사람이 된다면? 그건 딱 우리 반 재호 같을 것이다. 마치 입 속에 사탕이라도 물고 있는 듯 토실한 볼과 오통통한 손과 발. 거기다 느긋한 몸짓과 유순한 성격까지. 살짝 귀엽게 나온 뱃살과 어우러져 재호는 정말 곰돌이 푸가 사람으로 현신한 듯하다. 재호가 알림장 검사를 해달라고 공책을 내밀면 토실한 두 손이 너무 귀여워 눈을 떼지 못할 지경이다. 그런데 이번엔 재호의 발을 볼 기회가 생겼다.


우리 교실은 마룻바닥이라 실내화를 벗고 놀다 보면 손발에 가시가 박히는 일이 더러 있다. 재호도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랑 놀다가 발에 가시가 박혔다며 도움을 청했다. 발을 살펴보려고 아이를 의자에 앉히고 양말을 벗겼는데... 글쎄, 발이 너무 토실토실 귀여운 것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 발이 무슨 신생아처럼 이렇게 핏줄하나 없이 하얗고 오통통할 수 있지? 발바닥에 박힌 가시를 얼른 빼주고 재호에게 너는 온몸이 살아있는 캐릭터라며 진심 어린 칭찬을 해주었다. 그런 나의 호들갑에 재호는 그저 반달눈을 하고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재호의 발은 신생아의 발 마냥 뽀얗고 통실했다 (출처 : adobe stock)




곰돌이 푸 재호는 모범생이다. 수업시간에 글짓기를 하면 항상 정해진 칸을 다 넘어 뒷장까지 써오는 아이다. 오통통한 손으로 글씨는 또 얼마나 귀엽게 잘 쓰는지. 운동은 그다지 잘하는 축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재호는 체육시간마다 구슬땀을 흘리며 즐겁게 이리저리 뛰어다니고는 했다.


 중학년으로 불리우는 4학년 때는 저학년 를 완전히 벗고 고학년이 될 준비를 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또래관계가 상당히 중요해진다. 때문에 또래 사이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각종 허세를 부리는 아이들이 생겨나는데 재호는 전혀 그런데에 연연하지 않았다. 차례를 양보하고, 화내는 친구 하소연을 잠자코 들어주었다. 말하자면 재호는 '해탈한' 곰돌이 푸였다.

재호는 외모도 성품도 '곰돌이 푸'였다 (출처 : adobe stock)


그런 재호에게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재호는 공휴일을 싫어했다. 어린이날에 자율휴업일까지 4일을 연달아 쉬는 연휴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혹시 까먹고 학교 오는 아이들이 있을까 봐 우리는 4일 쉬고 만나는 거라고 알림장에 적어주었다. 4일이나 쉰다며 다른 아이들은 죄다 좋아하는데 재호는 '학교 오면 안돼요?', '공휴일에는 왜 학교 안 하는 거예요?'라며 혼자 울상이다. 얼굴까지 상기된 채로. 선생님이 보고 싶어 주말이 안 왔으면 좋겠다는, 누가 봐도 뻔한 아부성 발언을 하는 아이들이 가끔 있긴 했지만 재호의 표정은 전혀 그런 류가 아니다. 재호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어린이날 연휴를 보내고 맞이한 월요일. 하교 후, 나는 아이들의 일기장에 댓글을 달아주었다. 어딜 다녀왔다, 무슨 선물을 받았다, 무슨 체험을 했다는 이야기들이 즐비한 가운데 단 하나의 일기장은 슬픔에 가득 차 있었다. 재호의 일기장이었다.


재호는 학원을 8개 다닌다. 영어학원, 영어도서관, 교과수학학원, 사고력수학학원, 과학실험학원, 논술학원, 피아노학원, 수영까지. 학원에 가는 것도 일이지만 학원에 가기 전에 숙제를 마쳐야 하는 게 더 큰 일이다. 재호는 하교 후 집에 도착하면 바로 학원 숙제를 한다. 숙제를 겨우 마치면 다음 학원으로, 다시 학원에서 돌아오면 다른 숙제를. 이런 식의 반복을 하다 보면 잘 시간이 된단다. 재호는 반 아이들 누구와도 원만한 둥글둥글한 성격이지만 하교 후 재호를 놀이터에서 만난 친구는 아무도 없다. 재호는 '학원-숙제-학원-숙제'만을 반복하다가 잠에 든다.


어린이날에도 재호는 학원 보충을 갔다. 학원 보충 마치고 오는 길에 엄마가 어린이날 선물을 사주겠다고 하셨단다. 재호는 받고 싶은 선물이 있었다. 해본 적은 없지만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고 있는 게임 캐릭터 인형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 인형을 사주지 않으셨다. 뭐 그런 걸 사냐는 말에 재호는 가지고 싶은 인형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고르지 못했다. 기다리다 못한 엄마가 흰색 곰돌이 인형을 들고 이거 어떠냐고 물었고 재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재호의 어린이날 선물이었다.

재호가 가지고 싶었던 인형은 아마 이 주황버섯인 듯하다 (출처 : adobe stock)



다음날, 나는 등교한 재호를 잠깐 불러서 이야기했다.

나 : 재호야, 어린이날에 곰돌이 인형 받았다며~

재호 : 네...

나 : 곰돌이 인형 마음에 들었어?

재호 : ...

나 : 음, 다른 인형 가지고 싶었던 것 같던데... 혹시 곰돌이 받아서 속상해?


나의 질문에 재호는 아무런 말이 없다.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은가 싶어 다음에 얘기하자고 하려는데 재호의 얼굴이 새빨갛다. 귀까지 새빨개진다. 재호는 소리도 없이 뚝뚝 눈물을 흘린다. 안경을 가득 덮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는 통에 아이들에 재호 옆으로 모여들었다. 무슨 일이냐고 누가 울렸냐고.

그리고 그날 우리 모두는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던 재호의 화난 목소리를 들었다.


"저는 집이 싫어요!!!!"




어린이날도 참고 학원보충에 갔던 재호가 마트에서 게임캐릭터 인형을 집었을 때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버섯 같이 생긴 이상한 인형을 왜 사냐고, 돈 아깝게. 별 거 아닐 수 있는 그 말이 재호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무엇을 건드리고야 말았다. 재호는 아직 어려서 자기 마음을 깊이 들여다볼 수 없다. 다만 뭔가가 크게 일렁이고 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눈물콧물이 섞여서 마구 쏟아내는 재호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이 공간에서 유일한 어른인 나는 알 수 있었다. 재호는 자기 자신을 부정당했다.


재호의 시간은 재호의 것이 아니다. 재호에게는 여가시간이 없다. 재호에게는 자기가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재호는 놀이터에 나갈 자유가 없다. 재호의 친구들은 놀이터 앞을 지나가는 재호를 같이 놀자고 부른다. 그러나 재호는 같이 놀 수가 없다.바쁜 걸음으로 다음 학원으로 가는 차를 타러 가며 놀이터를 잠시 쳐다볼 뿐이다. 재호에게는 어린이날 선물을 선택할 자유마저 없다. 그렇다. 재호에게는 자유가 없다.


감정이 폭발한 재호를 겨우 토닥였다. 아직도 어깨가 들썩인 채로 훌쩍거리며 재호는 자리에 앉는다. 갑자기 우리 반에는 자기도 학원을 몇 개 다닌다며, 자기도 학원숙제가 많다고 다들 한바탕 성토대회가 열렸다. 친구들의 성화 덕분에 재호는 마음을 추스르는 듯했다. 재호는 집 보다 학교가 더 편하다고 했다. 학교에는 놀이시간, 쉬는 시간도 있고 친구들과 떠들 수도 있으니까. 학교에 오면 쉬는 것 같다는 재호의 말은 내 마음을 오랫동안 무겁게 했다. 그래서였구나. 연휴를 유독 싫어하던 이유가.




상담 때 재호 어머니에게 에둘러 이야기를 꺼냈다. 긴 상담 끝에 재호 어머니는 아이 마음을 들어보겠노라고 말씀하고 돌아가셨다. 다행이었다. 상담의 성과인지 재호는 학원 2개를 줄이게 되었다. 숙제를 빨리 마치면 학원 차 타기 전 잠깐은 놀이터에서 놀 수 있다는 허락도 받았다. 재호는 자기 삶에 생긴 이 조금의 '틈새'를 매우 기뻐했다.


언뜻 문제가 해결되어 보였다. 하지만 으레 그렇듯이 깊은 문제일수록 간편하게 해결되기는 어렵다. 가끔 '집'이나 '부모님'에 대한 주제로 글짓기를 할 때 재호의 글에는 은은한 적대감이 드러났다. 곰돌이 푸 재호는 슬슬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재호는 종종 체크 셔츠에 나비넥타이를 하고 학교에 왔다. 재호의 드레스코드는 말하자면 '비즈니스 캐주얼'이다. 고학년이 될수록 남자아이들은 트레이닝복 차림의 활동하기 편한 옷을 입기에 또래들 사이에서 재호의 옷차림은 눈에 띄는 편이다. 어느 순간부터 재호는 학교에 오면 나비넥타이를 빼서 가방에 구겨 넣고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푼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재호의 사춘기는 아마도 아주 강렬하고도 길 것임을.



덧붙이며>>> 저는 과거를 회상하며 이 글을 쓰고 있기에 재호의 이후 사정을 알고 있습니다. 곰돌이 푸 재호는 그야말로 강렬한 사춘기를 맞았습니다. 6학년 즈음에는 거친 반항을 하며 욕을 달고 사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모든 학원이며 공부를 일체 거부했고요. 중학교에 진급해서는 자주 학교를 빼먹고 비슷한 결의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고 들었습니다. 재호 어머니로부터 도와달라는 눈물의 전화를 받기도 했어요. 하지만 오랜 대화의 끝에... 중요한 때인데 마음을 잘 다스려서 어서 학원에 가야 되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재호 어머니의 말씀에 이 폭풍이 아직도 한참은 더 남았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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