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드러낸 채 누워버린 어린 나무가 몸을 추스려 다시 일어서고 새 잎을 튀우는 데 1년 반 남짓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분명 나의 조카를 사랑하지만 내가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녀석을 바로 세워 흙을 돋우고 말라죽지 않도록 물을 주는 것뿐이었다. 매마른 땅에 새 뿌리를 내리고 저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오로지 녀석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걱정하는 말, 비난하는 말, 포기하는 말, 충고하는 말을 하지 않고, 믿고 기다려주는 것은 한데 뒤엉켜 난리부르스를 추는 것보다 힘들고 외로웠다.
큰조카의 문제는 작은녀석의 경우와 사뭇 달랐다. 장례를 치르고 얼마 후 함께 걸으며 자기가 엄마의 입장이어도 그럴 수 있었을 거라고, 엄마의 선택을 존중하며 엄마가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스스로 떠난 엄마가 안타깝고 가엾고, 또 미안하다고 했다. 그 때 나는 차분한 그 말이 덮고 있는 슬픔의 심연을 보지 못했다. 설사 보았다 하더라도 아이가 느꼈을 고통의 실체를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큰아이는 제 원가족의 불화가 엄마의 죽음으로 터져버릴 때까지 침묵하고 엄마를 외면했던 자신을 증오하면서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엄마를 보내고 한 달, 아이는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속수무책 무너졌다. 어둠 속으로 흩어지던 제 어미의 모습을 끝없이 되뇌며 존재의 소질점 그 너머로 함께 흘러가버릴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상담을 시작하고 나서 천천히 기운이 돌아왔다. 눈코입 없이 한데 엉겨붙은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괴로운 마음을 쏟아내면서 고사할 것 같던 어린 영혼에 서서히 평안이 스며들었다. 일어나 앉고, 밥을 먹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작은 불씨의 온기를 의지삼아 아이는 어렵게 고 2 생활을 시작했다.
입시를 앞두고 있는 입장이라 작은녀석처럼 대책없이 방황하지는 않았지만 존재하는 모든 시간이 아이에게 고통이란 것이 내게도 느껴졌다. 작은아이와는 정반대로 집, 학교, 독서실, 학원만을 오가며 말을 하지 않고 화난 얼굴로 늘 지쳐 있었다. 처음 겪는 아이의 냉냉하고 불친절한 언행이 때때로 나의 마음을 날카롭게 찔렀다. 나를 사랑한 적 없는 나의 사랑이 이 불편한 상황을 언제까지 견디며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매일 아침, 새벽에 일어나 떠듬떠듬 만든 아침 도시락을 집어들고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나가버렸다. 대체로 우울하고 풀이 죽었던 어린 우리 자매들의 아침이 떠올랐다. 저렇게라도 학교를 가니 다행이라고 위안을 하면서도 과거로 회귀하는 우리의 현재가 또 미래가 답답하고 서글펐다.
고 3이 된 아이가 힘을 내기 시작했다. 무기력이 떠난 자리에 들쑥날쑥, 웃었다 화 냈다를 반복하는 서스펜스의 날들이 대신 들어섰다. 게다가 미친 바람처럼 질주하던 작은녀석과 녀석이 들인 강아지까지...... 그래도 시간은 갔다. 고맙게도 작은녀석이 2학기에는 상당히 멀쩡한 모습으로 일상에 복귀했고 큰아이는 대학에 합격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아이들은 제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부모 노릇을 하겠다는, 이제라도 가족처럼 잘 살아보겠다는 아비의 약속을 믿고 피가 당기는 만큼의 기대를 품은 채 아이들이 짐을 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