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15.(월)
1.
옛날 아주 옛날 인도의 어느 왕국에 음악을 아주 사랑하는 왕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소리에 민감해 온갖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그 소리의 좋고 나쁨을 구별하였고 어릴 때부터 자연의 음악에 심취해 하루 종일 소리를 들으며 보내곤 하였다. 네 발로 기어 다닐 때부터 곤충이 내는 소리를 듣고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었고 새들과 동물들의 소리에서 그들의 감정을 느끼고 공감할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바람과 구름과 별들의 움직임 속에서도 섬세한 멜로디를 감지해 자신만의 감성으로 받아들였다. 왕은 소리에서 색깔을 느끼며 구별하였고 자연의 소리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다. 커갈수록 왕이 가진 재능이 더욱 빛을 발하여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그 사람이 가진 심성의 선함과 악함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왕은 자신의 유일한 취미인 음악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전문연주단을 구성하였고 그 단원들은 나라에서 제일가는 실력자들로 구성되어 단원으로 뽑히는 순간 평생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왕은 자신이 직접 연주자를 골라 뽑았으며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심성이 올바르지 않으면 왕의 악단에 들어올 수 없었다. 나라 안에 음악에 재능이 있는 실력자들은 누구나 왕의 악단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2.
그러나 그런 왕에게도 부족한 점이 있었으니 음악을 듣고 감상할 수는 있었지만 그 아름다운 소리를 재료로 직접 음악을 창조하는 재능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지는 못했다. 자신이 만든 음악으로 악단들이 연주할 때마다 왕은 절망했으며 자신의 재능 없음을 한탄했다. 뛰어난 스승을 모셔와 집중교육을 받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스스로가 만족하는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는 훈련이 아니라 천부적 재능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왕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음악을 만드는 능력만큼은 갖고 태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눈물을 머금고 왕은 작곡가를 찾기로 했다. 왕에게는 뛰어난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작곡가가 필요했다. 왕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을 갖고 싶었다.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연주곡을 원했다. 왕은 신하에게 명령했다. 나라 안을 다 뒤져서 자신이 감상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작곡가를 찾아오라고. 만일 나라 안에서 찾을 수 없다면 전 세계를 다 뒤져서라도 찾아오라고. 끝내 찾지 못한다면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신하들은 온 나라를 다 뒤졌다. 하지만 힘들게 찾아서 데리고 간 작곡가들은 한결같이 왕에 의해 거부당했다. 왕이 찾던 탁월한 능력을 가진 작곡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신하들은 점점 초조해졌다. 이러다 왕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온 힘을 기울여 새로운 작곡가을 찾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히말라야 산기슭에 산다는 어느 연주자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침저녁 하루에 두 번 자신이 직접 만든 피리를 가지고 산 정상에 올라가 연주한다는 것이었다. 그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산의 모든 동물들이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하던 동작을 멈추고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경배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인지 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인근 마을에 소문이 파다하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신하들은 직접 그 연주가가 산다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침 일찍부터 연주가는 집에 없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그가 올라갔다는 산 정상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숲은 휘감고 도는 신비한 소리가 들려왔다. 안개처럼 은은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신하들도 생전에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주변을 돌아보았을 때 눈에 띄는 동물들은 모두 산 정상에서 들여오는 그 소리를 향해 서 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경배였다. 모두 고개를 쳐들고 자신들의 왕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경이롭고 기이한 일이었다. 피리소리를 듣고 있던 신하들의 마음도 점점 그 소리가 전하는 신비한 기운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신하들은 황홀한 감정을 느꼈다. 분명 자신들이 찾던, 그리고 왕이 원하는 그런 작곡가임에 분명했다. 그의 이름은 부르드카였다. 신하들은 서둘러 산 정상으로 올라가 부르드카를 만났다 그에게 자신들의 신분을 밝히고 함께 궁으로 갈 것을 정중하게 요청했다.
“나는 갈 수 없소.” 이것이 부르드카의 답이었다.
“평생 못다 누릴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겠소.” 신하들은 다시 한번 청했다.
“난 이미 이 산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소.” 부르드카는 단호했다.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소. 거절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왕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왔소. 음악을 사랑하는 왕이라는 것도, 궁중악단을 가지고 있고 단원들도 직접 뽑는다는 것도 알고 있소.”
“그런데 왜 왕의 요청을 거부하는 것이오?”
“왕이 보여주는 음악에 대한 사랑은 편집증이오. 왕은 음악에 미쳐있단 말이오. 왕의 음악 사랑의 끝은 비극이오. 모두 비극으로 끝날 것이오. 난 이미 알고 있소.”
“잘 이해는 되지 않으나 어쨌든 왕의 명령을 거역해도 끝이 안 좋은 건 마찬가지요. 명령을 따르시오.”
“그렇다면 왕이 직접 오라고 하시오. 그가 진정 음악을 사랑한다면 그가 사랑하는 음악을 얻기 위해서 이 먼 곳까지 오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지 않겠소? 가서 왕에게 전하시오. 직접 오라고. 그렇다면 왕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소.”
난처한 건 신하들이었다. 하지만 부르드카의 완강한 태도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나 궁궐로 돌아가 왕에게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보고했다.
왕은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직접 가야지. 당장 떠날 채비를 하라.”
왕은 그 자리에서 부르드카의 요청을 수락하고 그가 사는 히말라야로 떠났다.
일주일이나 걸리는 먼 여행을 마친 왕은 마침내 부르드카와 마주 앉게 되었다. 이미 어제저녁에 도착하여 부르드카가 만든 음악의 연주를 들은 뒤였다. 아주 만족해하며 뿌드르카에게 함께 갈 것을 청하였다.
“나의 궁중악단에 들어와 음악을 만들어 주시오. 남은 생을 행복하게 살도록 만들어주겠소.”
“어찌하여 소인과 같이 미천한 자의 음악을 청하는 것입니까?”
“내가 지금껏 들어본 인간이 만든 소리 중 가장 아름다운 소리였소. 어젯밤은 정말 행복했소. 속히 궁궐로 들어가 나의 옆에서 그대의 소리를 들려주구려. 내 이렇게 정중하게 부탁하겠소.”
“그렇게 인정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왕께서는 어찌 그리 음악을 사랑하시게 되었습니까?”
“나도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태어날 때부터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하오. 그리고 내 주변의 사물들과 자연이 내는 그 아름다운 음악에 점점 빠져들게 되었소. 이제는 하루도 음악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런 내가 되었소.”
“왕이 좋아하시는 음악 안에는 도대체 뭐가 들어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조화요. 모든 음들이 제각기 자기의 소리를 내는 데 그 소리들이 주변의 소리와 어울려 원래의 소리보다 더 아름답게 들리는 것. 그것이 조화인데 나는 내 나라도 그렇게 음악의 하모니처럼 아름답게 어울려 살게 만들 것이오. 나의 음악은 내가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소. 사람들은 내가 음악에만 빠져있다고 하는데 나는 왕으로서 나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음악은 나에게 큰 영감을 주고 있소.”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소인은 왕의 명령에 따르겠소. 단 왕이 지금 말씀하신 조화의 음악이 깨질 때 다시 말해 왕께서 초심을 잃고 이 나라가 잘못된 길로 빠진다면 저는 주저함 없이 왕의 악단을 나와 제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저의 이 조건을 들어주신다면 왕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내 마음이 초심을 잃고 그리된다면 그대의 자유의 지대로 하는 것을 막지 않겠소. 신하들 앞에서 왕의 이름으로 약속하겠소.”
그날 밤 부르드카는 다시 산 정상에서 마지막 연주를 마치고 왕과 함께 궁궐로 들어갔다. 그때 산의 모든 동물들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부르드카의 피리소리를 들으며 이별을 함께 슬퍼했다.
3.
궁궐로 들어온 부르드카는 제일 먼저 궁중악단부터 점검했다. 단원들을 차례대로 만난 뒤 악기의 구성을 다시 편성하고 연주할 음악의 방향을 정하고 연습에 돌입했다. 새로 단장을 맞이한 악단은 기대감에 부풀어 연습을 거듭하면서 최고의 악단으로 거듭났다. 매일 연습을 마친 부르드카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 왕에게 헌정할 노래를 구상하고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단 노래가 다 만들어지면 연습을 거친 뒤 왕에게 들려줄 계획이었다. 궁궐의 생활이 익숙해지면 부르드카는 자신의 고향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과 저녁, 하루 두 번에 걸쳐 왕에게 자신이 만든 노래를 연주할 생각이었다. 드디어 어느 정도 연습이 진행된 후 드디어 자신이 만든 첫 번째 노래를 연주할 날이 찾아왔다. 왕의 기대 속에서 첫 연주가 시작되었다. 부르드카는 최선을 다해 자신이 만든 음악을 지휘하였고 단원들도 연습한 대로 온 마음을 다해 연주를 마쳤다. 부르드카는 왕의 얼굴을 살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왕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모두들 긴장했다. 알 수 없는 왕의 표정!. 기대에 못 미쳤다는 뜻인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부르드카의 마음속에서만큼은 한없이 긴 시간이 흘러갔고 마침내 왕의 표정이 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왕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부르드카의 두 손을 잡았다.
“그래 내가 원하던 음악이 바로 이것이었소. 아름다운 조화, 그리고 선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선한 음악. 연주하는 내내 황홀했소. 내가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음악이 바로 내 앞에서 연주되고 있다니. 아~ 행복했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황공합니다.” 숨죽이던 단원들도 그제야 긴장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왕의 표정을 보고 모두들 안심했다.
“오늘 밤 마음껏 마시고 편히 쉬도록 하시오. 그대들이 나의 마음을 행복하게 했고 그로 인해 이 나라도 태평성대할 것이오. 하하하!”
그 밤 궁궐 안은 웃음과 기쁨과 평화가 가득 넘쳤다.
부르드카가 첫 고비를 넘겼지만 창조의 고통은 생각보다 컸다. 매주 왕에게 선보일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비록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왕은 끝없이 새로운 음악을 요구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소리와 음악에 심취한 왕을 만족시키는 음악을 만드는 일은 초인적인 에너지를 요구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부르드카는 자신의 모든 음악적 역량을 쏟아부어서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다. 지난 시간 히말라야 산의 정기와 숲의 에너지를 받으며 내면 속에 축적했던 창작의 기운을 남김없이 모두 끌어와 썼다. 그러나 부르드카는 시간이 갈수록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불면의 밤이 거듭되었다. 그 결과 창작된 음악들이 왕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왕의 표정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부르드카와 단원들이 모를 리 없었다.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큼 부르드카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르드카는 그 믿음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상당 기간의 휴식을 취하면서 음악적 재충전을 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음악적 영감을 불러일으킬 강렬한 체험이 필요했다. 이 경우 사랑, 그렇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 그것보다 강렬한 체험은 없을 것이다. 부르드카를 살릴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은 에로스의 신이 그를 찾아와 메말라 가는 그의 영혼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부르드카는 뮤즈를 간절하게 찾고 있었다. 그리고 기적같이 부르드카의 뮤즈가 나타났다.
4.
예술과 아름다움에 탁월한 감각을 가진 왕 아쉬난에게는 여러 명의 왕비가 있었다. 아쉬난은 한 명의 부인에 만족하지 못하고 각기 다른 미모를 소유한 여러 명의 왕비를 두고 있었다. 대개의 왕들이 그렇듯이 후사를 위한 신하들의 강력한 권유도 한 원인이었다. 그중 첫 번째로 결혼한 왕비 라이는 탁월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열세 살 어린 나이로 왕과 결혼해 지금은 20살의 꽃다운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왕의 여성편력으로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는 그런 신세였다. 궁궐의 생활은 외로움 그 자체였고 왕실 정원의 꽃과 나비를 보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아쉬난 왕은 라이 왕비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라이는 외모뿐만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과 현명함으로 점차 자신의 매력을 뿜어내는 절정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늘씬한 키에 짙은 눈썹, 첫눈에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깊은 영혼을 간직한 눈동자, 오뚝한 콧날과 붉고 진한 색깔의 두 입술은 저절로 입맞춤을 부를 수밖에 없는 그런 외모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터질 듯한 두 가슴은 모든 남자들에게 원초적 욕망을 불러오는 타고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너무 많은 여인을 소유한 아쉬난 왕만이 첫 번째 왕비 라이의 매력을 간과하고 있었다. 왕을 위한 연주회가 진행될 때마다 연주회가 진행되는 왕의 콘서트 홀 비밀의 방에서 라이 역시 몰래 부르드카의 음악을 감상했다. 악기의 조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을 감상하면서 라이는 고향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자연의 노랫소리와 온갖 동물들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다. 라이는 부르드카의 음악에 점차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아가 부르드카를 마음속에 품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와 왕의 사랑을 온전히 받지 못한 여인에게 부르다카의 음악은 왕의 사랑의 대신할 수 있는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어느 날 연주회가 끝나자 라이는 부르드카를 직접 만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하지만 아쉬난 왕이 신경 쓰였다. 라이는 얼굴을 가리고 두 눈만 내어놓은 채 궁궐 밖을 빠져나가는 부르드카와 마주쳤다. 철저히 신분을 감춘 라이는 가려진 얼굴 뒤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자신의 감정을 전했다.
“당신이 만들어 낸 소리는 고향의 소리예요. 저는 당신의 음악에서 어린 시절 제 고향을 느껴요.”라고 말했다.
부르드카는 비록 얼굴을 가려서 알아볼 수는 없지만 자기가 마주친 여인의 두 눈을 보자마자 깊은 영혼을 소유한 고귀한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웃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바로 성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온 부르드카는 궁궐에서 마주친 그 여인의 두 눈을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메말라 가는 한 예술가의 심장에 새로운 창작의 기름을 붓는 그런 역할을 했다. 다시금 맑은 샘물이 차오르고 샘물 속에서 온갖 멜로디들의 서로 어울려 화음을 만들면서 쏟아져 나오는 그런 경험을 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다시 만나고 싶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마음속에서 불같이 일어났다. 내일 다시 궁에 가서 그 여인을 찾아봐야겠어. 누굴까? 하는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그날 밤을 보냈다.
새로운 뮤즈의 등장으로 인해 부르드카의 음악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멜로디는 훨씬 역동적이었고 리듬까지 살아나 연주하는 이들도 감상하는 자도 함께 즐거워했다. 무엇보다도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던 부르드카는 새로운 영감의 원천에 힘입어 창작의 기쁨을 누리며 즐겁게 작업할 수 있었다. 라이 또한 새로워진 음악에 격하게 반응했다. 무엇보다도 아쉬난 왕의 만족도가 매우 높았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지녔던 왕은 전에 듣지 못했던 곡과 연주를 접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토록 달라진 음악이라니. 놀라고 또 놀라면서 그 변화의 원인을 궁금해했다. 이러한 영감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무엇인가 일상의 변화가 생긴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창조자이자 지휘자인 부르드카의 음악세계에 대해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한편 라이는 부르드카의 음악에 심취해 날마다 그의 음악을 떠올리며 행복에 빠졌다. 사랑받지 못해 시들어가는 영혼이 가뭄 끝에 다디단 비를 머금은 예쁜 꽃들처럼 다시 활짝 피어나 절정의 미모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굶주렸던 라이의 욕망이 내면에서부터 활활 타오르면서 함께 타오를 누군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것은 막을 수 없는 인간 본래의 존재방식이었다. 그는 누군가를 원하고 있었고 이제 행동으로 나타날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시녀를 시켜 은밀하게 부르드카의 모든 것에 대해 알아오라고 지시했다. 고향은 어디인지 언제 음악을 시작했는지. 결혼했는지 등등
그리고 마침내 라이는 달이 밤에 잠겨 어두워진 어느 그믐날 조용히 궁을 빠져나와 미리 알아둔 부르드카의 집을 찾았다. 마치 밤안개가 산허리를 감싸듯 아주 자연스럽게 접근해 한 천재적인 음악가의 작업실을 엿보고 있었다.
작업실에서 작곡에 몰두한 부르드카는 누군가가 창문 밖에서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오로지 오선지 위에 자신의 내면에서 떠오르는 미묘한 감정의 선을 그려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다소 희미해져 가는 영감의 에너지를 끌어 모으며 모든 상상을 동원해 그날 오전 만났던 그 여인의 숨겨진 관능을 찾아내려고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 점점 희미해지고 있어. 다시 한번 그 여인을 만날 수 있다면. 그 깊은 눈동자와 맑은 목소리를 접할 수 있다면 나의 영혼이 고동쳐 수천억 개의 별보다 많은 음표들을 그려낼 수 있을 텐데..... 나의 기억아! 조금만 더 힘을 내 그 여인을 떠올려 줘! 아니면 난 이 밤 또다시 괴로움에 휩싸여 나의 모든 육신을 태워 멜로디를 만들어야만 해! 부디 제발......” 독백이 밤의 정적을 깨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처절한 울부짖음이었다.
라이는 그 고독한 천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싶었다. 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내가 저 사람의 눈앞에 나타난다면,... 나의 마음의 갈망을 저 사람에게 표출한다면.... 나도 구원을 받고, 저 고독한 예술가도 구원받을 수 있겠지? 이건 두 사람 모두를 구원하는 자비로운 행동인 셈이지. 그렇다면 주저할 이유가 없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고통받고 있나요?” 라이는 창문 밖에서 이렇게 물었다.
“누구신가요?” 부르드카는 밤의 정적을 깨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창조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을 구원하는 위로자.”라고 대답하면서 창문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었다.
“아니 그대는 그날 아침 만났던 그 여인?”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희열이 차오르고 있었다.
“방해가 되었나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볼 수 있지요.”
“당신의 음악은 날 구원했어요.”
“나의 음악을 듣고 한 사람이라도 그런 생각을 한다면 전 행복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왕을 위해서만 음악을 만드는 사람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렇지만 예술이란 결코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왕을 위해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지만 누군가가 나의 음악을 듣고 행복해한다면 그것은 저 또한 행복해지는 일입니다. ”
두 사람의 대화는 깊은 밤까지 이어지고 마침내 서로를 구원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차오르는 음악적 영감으로 인해. 다른 한 사람은 차오르는 욕망으로 인해 구원받고 있었다.
5.
아쉬난은 음악에만 빠져있는 그런 무능한 왕은 아니었다. 탁월한 심미안으로 사람의 흉중을 꿰뚫어 보면서 충신과 간신을 구별할 수 있었고 사람을 적재적소에 쓰는 그의 용인술로 인해 나라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백성은 없었고 풍요 속에 일상의 평안을 누리고 있었다. 오전의 연주회를 끝내고 대신들과의 왕궁회의를 마친 후 한가로이 정원을 거닐다 저 멀리 산책 중인 라이 왕비를 보게 되었다. 첫 번째 왕비로 맞이해 애틋함도 있었지만 그때는 너무 어렸다. 관능의 쾌락을 알기 전이라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이후 대신들의 재촉으로 두 번째, 세 번째 비를 들이면서 본격적으로 교접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라이와는 그렇게 뜨거운 사이로 지낼 기회가 없었다. 자신이 라이에게 소홀했다는 일말의 미안함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이 날따라 저 멀리서 꽃구경을 하면서 거닐고 있는 왕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왕실의 정원에서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래 꽃구경을 하고 있었나 보구나.”
“네 폐하! 오셨습니까?”
인사를 마친 후 고개를 드는 라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쉬난이 알던 예전의 풋풋한 라이가 아니었다. 이미 다자라 익을 대로 익은 몸과 붉디붉은 입술, 깊이를 알 수 없는 맑은 눈동자는 아쉬난의 숨이 가빠지게 만들었고 묘한 흥분을 가져다주었다. 게다가 얼굴에서 발산되어 나오는 그 행복함과 온몸에서 쏟아내는 관능의 에너지는 이전에 보아왔던 라이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것은 바로 사랑에 빠져있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예민한 아쉬난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라이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젊음의 에너지는 또 다른 사랑의 에너지를 만날 때 폭발적으로 증폭되어 주변을 환하게 밝힌다. 과거 아쉬난과 라이의 첫날밤은 그렇지 않았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수한 소년과 소녀의 만남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쉬난의 눈앞에 있는 라이는 성숙한 여인이었다. 뒤돌아 정원을 나오는 아쉬난은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왜 천하절색의 라이를 몰라봤을까? 아니 잊고 있었을까?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는 게 분명해 누구지? 나의 예감은 틀린 적이 없지. 누굴까? 그 순간 아쉬난의 내면에서는 무엇인지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에너지가 치솟아 올랐다. 감히 왕의 여자를 탐한 놈이 누구지? 나 말고 누가 라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가? 예술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한 왕이었지만 아쉬난도 한 사람의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라이의 달라진 모습을 뒤늦게 깨달은 왕은 이제 라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알 수 없는 남자에게 불같은 질투를 느꼈다. 다시 라이를 빼앗고 싶은 치졸한 경쟁심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아쉬난은 사람을 시켜 라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비밀의 방에서 왕궁악단의 연주를 감상하면서 라이는 부르드카가 연주하는 노래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자신을 만나 에로스의 영감에 불이 붙은 음악가의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니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음악을 들으면서 첫 번째로 행복했고 또 그 밤 이후 수차례의 밀회를 통해 부르드카와 깊은 감정의 교류를 했다는 사실에 두 번째로 행복했다. 영혼의 교감으로 인한 충만감이 제일 먼저 라이에게 찾아왔다. 그러나 밀회가 계속될수록 두 사람의 교감은 영혼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부르드카를 먼저 유혹한 것은 라이였다. 라이가 가진 육체의 아름다움은 부르드카를 정복하기에 차고도 넘쳤다. 게다가 부르드카는 아직 라이가 누구인지 몰랐다. 아마 알았더라도 라이의 저돌적 유혹을 버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왕의 무관심 속에 꺼져가던 사랑과 욕망의 불씨가 한 음악가를 만나 다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라이는 영혼의 교감만으로는 부족했다. 모든 욕망을 태워버리는 그 절정의 쾌락까지 다다르고 싶었다. 라이는 이미 그 경지의 기쁨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쉬난 왕과의 관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였다. 만남이 거듭될수록 두 사람은 뜨겁게 타올랐고 그것은 두 연인을 다시 살아가게 만들었다. 부르드카의 음악은 갈수록 무르익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왕은 너무나 흡족했다. 새롭게 연주는 되는 곡들의 선율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진행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경이로웠다. 부르드카도 이전과는 다른 창작의 과정을 직접 체험하고 있었다. 내면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선율의 발산을 받아 적기에도 바빴다. 뼈를 깎는 고통이 아니라 남녀관계의 절정에서나 맛볼 수 있는 그런 창작의 희열을 느끼며 터져 나오는 선율을 오선지 위에 기록해야만 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뮤즈 라이의 덕분이라는 것을. 부르드카는 그녀를 결코 놓칠 수 없었다. 설령 자신이 목숨이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와의 사랑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한 결심이 예술가로서의 절대미를 창조하기 위한 예술혼이었는지 아니면 라이를 사랑하는 한 남자의 마음이었는지는 부르드카 자신도 구별하기 힘들었다. 스스로 몇 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대답할 수 없었다.
6.
아쉬난의 명령에 의해 라이를 따라다니던 자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라이는 오랫동안 비밀의 방에서 왕이 듣던 연주를 몰래 들으며 부르드카를 좋아하게 되었고 밤마다 그의 집에 들러 사랑의 밀회를 즐기고 있다는 보고였다. 왕은 그제야 부르드카의 음악이 달라진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에게 음악적 영감을 제공한 것이 라이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왕은 이제 선택해야만 했다. 이대로 모른 체하고 부르드카의 음악을 계속 즐길 것인가? 아니면 왕의 여자를 탐한 자를 심판해서 왕의 위엄을 만백성에게 과시할 것인가?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날이 밝았고 이날도 어김없이 연주회가 열렸다. 전날 밤의 밀회로 한껏 달아오른 사랑 충만한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다. 부르드카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감정을 악단을 지휘하며 표현했다. 또 한편 비밀의 방에서도 음악에 흠뻑 취해 라이는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음악을 감상하던 아쉬난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부르드카에게 근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연주를 멈추어라” 갑작스러운 왕의 명령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부르드카는 연주를 멈추었다. 그리고 왕을 쳐다보았다. 모든 단원들도 예상치 못했던 연주중단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왕에게 집중시켰다. 왕은 밖에 있던 왕실 호위대장을 불렀다.
“가서 라이를 끌고 오라.”
잠시 후 왕비가 호위대에 의해 끌려 나와 아쉬난 앞에 무릎 꿇었다. 왕은 부르드카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 여인을 아는가?”
부르드카는 끌려 나온 여인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 여인이 자신이 사랑하는 라이임을 알았다.
“아니 어떻게? 왕이시여! 무슨 일입니까?” 부르드카는 왕을 보면서 되물었다.
“너는 저 여인이 누구인지 아는가?”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라이가 왜 여기에 끌려왔는지 몰라 당황했을 뿐이다.
“너는 왕의 여자를 탐했다. 저 여자는 나의 첫 번째 왕비 라이이니라.”
순간 부르드카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사랑한 뮤즈가 왕의 부인이라니. 이건 죽음으로 갚아야 할 대역죄였다. 순간 부르드카는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뜨고 왕에게 입을 열었다.
“저 여인이 누구인지 압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인입니다. 그러나 저 여인이 왕비라는 사실은 지금 알았습니다.”
“그것이 너의 죄를 가벼이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때였다. 라이가 입을 열었다.
“왕이시여! 자비로운 왕이시여! 저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제가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저 사람에게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저에게 죄를 물으십시오.”
“지금 저 반역자의 편을 드는 것이냐? 왕의 여자를 탐한 자는 반역한 자와 다르지 않다.”
“왕이시여 제 말을 들어보소서. 저는 열셋의 나이에 궁으로 와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사랑받았다는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분을 만나 그동안의 불행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저지른 죄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으로만 갚을 수 있는 죄입니다. 그러니 저에게 죄를 묻고 부르드카를 살려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쉬난은 라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에게 묻겠다. 저 자를 사랑하느냐? 내가 너에게 다시 한번 살 기회를 주겠다. 지금부터라도 나를 받들겠다면 너를 살려주겠다.”
“저자를 살려주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저자는 살아날 방법이 없다. 너를 살려주고 싶은 나의 자비로운 마음 때문이다.”
“저분이 죽는다면 저도 살 이유가 없습니다. 저도 함께 죽음의 길을 따라가겠습니다.”
“이 두 연놈들이 끝까지 나를 능욕하는구나.”
이번에는 분노의 화살을 부르드카에게 돌렸다
“부르드카, 난 너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최상의 것들을 주었다. 그 대가가 겨우 이것이란 말이더냐?”
“아쉬난이시여. 저는 그대의 요구에 단 한 번도 소홀히 한 적이 없습니다. 매일 왕에게 바치는 노래를 만들면서 저의 심신은 소멸되어 갔습니다. 그러던 중 저 여인을 만나 다시 왕에게 드릴 노래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무엇이 행복했단 말이냐? 저 여인을 만나서 행복했단 말이냐? 나에게 바칠 노래를 만들 수 있어 행복했단 말이냐?”
부르드카는 왕의 질문에 잠시 숨을 멈추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어찌 대답해야 하나? 어떻게 하면 저 여인을 살릴 수 있을까?
“저는 예술가입니다. 예술가에게는 무엇보다도 창작의 기쁨이 생명과도 같이 소중합니다. 비록 왕의 여인을 만나 불충의 죄를 지었지만 이를 통해 얻은 영감을 왕에게 바칠 노래로 승화시킬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 덕분에 왕께서도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으셨으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저 여인을 살려주소서.”
“저 여인이 아니라 나에 대한 헌신으로 인해 행복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너의 입술은 참으로 내 마음에 드는 말을 하고 있지만 너의 두 눈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구나. 저 여인을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그리고 그러한 너희들의 사랑놀음이 나를 더 화나게 한다.”
왕은 마지막 결정을 모든 사람들에게 통보했다.
“부르드카, 너는 라이를 만나 창작의 기쁨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창작의 고통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왕의 여인을 탐한 죄이다.”
경호대장에게 명을 내렸다.
“부르드카의 고막을 뽑아 귀를 멀게 하라. 그리고 계속 나를 위해 노래를 만들게 하라. 그것이 나를 향한 저주의 음악이라도 상관 않겠다. 귀가 들리지 않는 가운데서 음악을 만들어야 하는 고통을 평생 동안 느끼며 살아야 할 것이다.”
아쉬난은 고개를 돌려 라이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왕비 라이의 두 눈을 멀게 하고 궁궐 내 가장 높은 옥탑에 가두도록 하라. 사랑하는 이가 고통스럽게 만든 음악을 평생 동안 듣는 형벌을 내리겠노라”
잔인한 왕이었다. 질투는 그의 심장을 차갑게 만들었고 음악을 사랑하던 아름다운 마음은 소멸되고 냉혹한 이기심만 남았다. 그러나 왕의 형벌이 두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귀가 멀고 눈이 멀었지만 서로를 향한 그리움의 고통은 아름다운 멜로디로 승화되었다. 이전에 왕이 듣던 음악보다 더 아름다운 음악이 온 궁 안에 퍼졌다. 다만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왕은 이미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는 더 이상 아침마다 연주회를 들으러 오지 않았다. 그러나 형벌을 위해 연주회는 계속되었다. 그 덕분에 온 궁궐과 나라 안에 부르드카가 만든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들이 전해져 지치고 병든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그 뒤 아쉬난왕이 병으로 죽고 두 사람은 다음 왕에 의해 사면을 받아 고향 히말라야로 돌아가 남은 생을 숲 속의 동물들과 함께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