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대상
2025.03.01
요즘 온통 창조적 글쓰기, 특히 픽션 쓰기에 몰입해 있다. 늘 내가 꿈꾸는 세계이다. 인간의 고차원적 즐거움 가운데 하나이다. 호모 루덴스, 유희적 인간의 전형이다. 창조하는 가운데 희열을 느낀다. 인간은 여러 이유로 창조적 행위를 한다. 가장 근원적으로는 주술적 목적이 있다. 기원과 축복을 위해 창조행위를 한다. 벽화와 시, 노래, 춤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주술적 목적이 창조행위의 부분일 수는 있지만 전부는 아니다. 창조에는 기쁨이 있다. 온 힘을 다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는 거룩한 행위를 통해 하나의 결과물을 완성할 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때로 그 창조의 행위는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동반한다. 역설적으로 그러한 고통이 창조의 기쁨을 배가시킨다. 아이러니이다.
계속 꿈을 꾼다. 영원히 살 것처럼. 내가 창조한 세계가 가져올 기쁨을 상상한다. 근본적으로 예술은 모방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의 대상을 모방한다. 그러나 그 모방은 이미 창조이다. 창작자 고유의 개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의 생명체로서 경험해 온 모든 느낌과 감정과 세계에 대한 해석이 작품에 반영된다. 삶의 여정의 총화이며 결집체로서 고유한 아우라를 발산한다. 빛나는 자기만의 삶을 사는 것이다. 아주 매력적인 과정이다. 권태와 무의미한 일상을 혁파하고 역동적이고 매혹적인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미의 추구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의 추구, 미 자체의 탐닉은 허무주의를 낳는다. 예술지상주의이다. 감각의 허상이다. 삶과 유리된 탐미의 집착은 그로테스크와 우울, 허무를 낳는다. 아름다움은 인간 삶의 아름다움이어야 한다. 이른바 관계미이다. 미의 대상은 자연과 사회, 인간이다. 미적 대상으로서의 사회는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모방이어야 한다. 인생에 대한 아름다움을 말한다. 거기에는 창작자의 세계관이 개입된다. 세상에 대한 해석이 전제된다.
<라쇼몽>의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설국>의 가와바다 야스나리, <인간실격>의 다자이 오사무, <금각사>의 미시마 유키오, 그 외에 기타무라 도코쿠, 이쿠라 슌게쓰, 가와카미 비잔, 아리시마 다케오 등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시인, 소설가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이들은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두 명이라면 개인의 고유한 개성이며 스스로의 삶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이라 여길 수도 있다. 이들 모두 아주 뛰어난 작품을 창조하고 사랑받았던 일류작가들이었다. 이들의 선택에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나는 이를 집단 무의식이라고 본다. 이들 예술가들의 무의식 안에 삶을 지배하는 원형적 사고가 있다.
작고한 박경리 작가가 이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있다.
“일본 문학의 탐미주의, 예술 지상주의는 갇혀버린 사회에서 도피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선함과 진실함이 결여되어 있고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표면적으로 자유가 확장되었지만 그 자유로 인해 인간내면의 불안과 공포가 심해졌다고 말했다. 선택의 자유가 가져오는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한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갑자기 주어진 자유가 오히려 불안을 야기했다는 사실이 역설적이다. 그 도피처가 전체주의였다. 집단의 광기 속에 자신을 몰아넣어 불안을 잊고자 했던 것이다. 예술가들은 미자체에 탐닉함으로 우울과 불안을 극복하고자 했다. 마조히즘과 사디즘은 불안극복의 극단적인 방법이다.
자유의 확대로 인한 불안은 참고 견디며 선택을 통해 대가를 치르며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새장에 갇혔던 새는 새장 문이 열려도 쉽사리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두려운 것이다. 자유는 선택이고 선택은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탐미주의를 통한 불안의 극복은 필연적으로 허무주의로 귀결된다.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는 명예를 이유로 죽음을 찬미한다. 배를 가르고 죽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봄날 화려하게 피었다가 비처럼 떨어지는 사쿠라를 보며 미의 극치라고 여긴다.
애상, '모노아와레' 일본인의 대표적 정서이다. 여기에는 짙은 허무가 배어 있다.
나는 <설국>을 읽으면서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을 떠올렸다. <설국>에는 일본인 고유의 정서 모노아와레가 담겨있다. 주인공의 허무주의와 게이샤의 의식구조, 작가가 보여주는 문체미학, 눈 덮인 북해도의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 가장 일본다운 소설이다.
<삼포 가는 길>에는 술집 작부, 개발과 근대화로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가장 눈에 띄게 다른 점은 인간을 대하는 주인공들의 태도이다. 여자를 관능의 대상으로만 보며 허무주의에 경도되어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하는 <설국>의 주인공과 다르게 <삼포 가는 길>의 인물들은 길에서 처음 만나 사이면서도 따스한 연대와 인간미를 보여준다.
눈 덮인 설국과 개발로 사라지는 고향, 미의 추구 속에 길을 잃어버린 주인공의 정서와 근대화로 인해 사라져 가는 인간의 선함을 잃지 않으려는 따뜻한 손길. 내가 이 두 소설을 통해 두 나라의 미래를 읽을 수 있는 단초를 찾았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자유의 확대로 인한 불안은 도피로 해결할 일이 아니다. 불안과 고통을 견뎌내며 새로운 선택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거기에 진짜 삶의 의미가 있다. 애상에 젖어 죽음을 미화하는 집단무의식에 사로잡힌 그들은 나약한 정신의 소유자들이었다. 이들 작품을 읽으며 함께 모노아와레에 심취했던 일본국민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긴 독재와의 투쟁 속에 피흘리며 쟁취한 민주주의, 촛불혁명, 내란과 빛의 혁명으로 이어지는 다이내믹한 역사의 현장 속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장갑차를 가로막으며 여의도로 뛰어가던 수많은 시민들을 기억한다. 과거가 현재를 살리고 죽은 자가 산자를 살리는 선함의 역사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역사이다. 인간은 결코 홀로일 수 없으며 나눔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생의 희망을 찾는다. 이것이 관계의 아름다움이다. 너무나도 빠른 풍요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고유의 따뜻함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온전하게 내재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싶다. 내가 창조하고 싶은 세계이다.